“선감학원에 끌려온 아이들은 ‘학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교육’을 받기는커녕 섬의 개간, 농사일 등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있을 당시 약 200명 정도의 원생이 머물렀는데, 매일 얻어맞고 기합 받는 게 일상이었죠. 야간 점호 시간에는 관리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곡괭이 자루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상황이 너무 공포스러워 오줌을 지리기도 했습니다. 먹는 것 또한 말도 못하게 부실해서 거의 매일 소금국으로 식사해야 했고 심지어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음식을 먹은 날도 많았습니다. 혹한에서 일하다 동상에 걸려 왼쪽 3개의 발가락 일부를 잘라내기도 했어요.”
선감학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아수용시설은 원생들 간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도 상당히 많았다. 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중간 관리자 선임 및 군대식 조직 편제와 같은 폭력적이고 기형적인 구조가 시설 내부에서 작동함으로써 원생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방식을 추구하면서 함께 생활 하는 동료 원생들을 폭행하고 이 과정에서 약자는 더욱 큰 인권침해와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 대부분의 원생들은 늘 그곳을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가까운 대부도는 탈출이 조금 수월해도 금방 주민들에게 잡혀 다시 끌려오는 게 반복되었습니다. 탈출한 원생을 데려오면 주민들에게 일종의 수당 같은 것을 지급했습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바다에 빠져 죽고, 탈출하다 죽은 원생들이 수백 명입니다. 저는 썰물 때를 골라 인근 섬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요.”
그가 탈출한 ‘어섬’은 선감도에서 거리가 멀어 쉽게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죽음을 각오했고, 위험하지만 잡힐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결국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양식어업을 하는 어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곳에서 나랑 같이 일할래, 아니면 선감학원으로 데려다 줄까?”라는 어민의 말에 선감학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1년여 동안 또 다시 지옥 같은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기회를 틈타 재탈출에 이르게 된다. 이후 어렵게 가평의 본가를 찾아갔지만 집 주인은 바뀌어 있었고 가정은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실종된 한씨를 찾아 헤매면서 불화가 생긴 부모님은 이미 이혼한 뒤였다.
국가는 그에게 지독할 만큼 잔인했다. 개인이 국가를 처벌할 수만 있다면 그는 ‘국가를 2중 3중으로 처벌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