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물론, 대정친목회와 동민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된다고 밝힌 연구소는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전하며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이다. 한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종교·법조·언론·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