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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엔 풀이 먼저 일어났는데 지금은 왜 안될까' 정의당 대표의 질문

9일 정의당 중앙당사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양경규 신임 대표. ⓒ 정의당

"바람보다 풀이 먼저 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양경규 정의당 신임 대표가 기억하는 1987년은 지도자가 바람을 일으켜 대중을 움직인 시대가 아니다. 풀이 먼저 분노했고 먼저 일어났다. 앞장선 사람은 흩어진 분노를 묶고 투쟁을 조율하면 됐다. 뚝심이 있고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이던 때였다.

지금은 정반대라고 했다. "선풍기를 갖다 붙이고 왕부채로 부쳐도 풀이 일어나지 않는 시대"다. 조직된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영세사업장·플랫폼 노동자와의 연대를 호소하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만으로 기후와 젠더, 인종과 전쟁까지 설명할 수도 없다. 조합원은 과거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판단한다. 지도자가 더 공부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시대다.

지난 9일 서울 구로구 정의당 중앙당사에서 만난 양경규는 '정의당 신임 대표'라는 현재 직함도 중요하지만, 한국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라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대한상공회의소 노동조합에서 출발한 그의 이력은 노동조합운동이 독자 정치세력화를 결의하고 정당을 세운 시기부터 원내 진출과 분열, 재통합 시도, 사회운동과 정당의 이완, 정의당의 원외화까지를 한 줄로 잇는다. 새 대표에게 당의 쇄신책을 묻기 전에 그가 지나온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시간을 먼저 물은 이유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삶을 설명하며 꺼낸 말은 투쟁도 희생도 아니었다. '자유'였다.

삶과 생존 그리고 자존

양 대표가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들어간 직장은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곳이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굳어진 병영식 위계가 일터에도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이 직장 안으로 들어오자 "이렇게는 못 사는 것 아니냐, 우리도 일어서자"는 분위기가 생겼다.

1987년 대한상공회의소 노조 활동 중 촬영된 사진. 맨 왼쪽이 양경규. ⓒ 양경규

"처음에는 구체적인 이념보다 삶과 생존 그리고 자존의 문제로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조합원의 근로조건과 인간적 대우에서 출발한 일이 평생의 운동으로 이어질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그는 학생운동을 거쳐 현장에 들어온 '학출 노동자'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먼저 부딪치고 실천한 뒤 부족한 것을 공부했다. 자신을 "자연발생적인 PD(민중민주 노선을 뜻하는 말- 편집자주)"라고 부른 이유다.

운동 때문에 다른 삶을 포기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 했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갈수록 맞설 자신감이 생겼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있잖아요.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 세상과 부딪히는 데 자신감과 자유로움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그 자유의 대가를 가족이 함께 치렀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해고된 뒤 오랜 생활고가 이어졌고 가족은 그의 선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몫을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1999년, 양 대표는 수배 생활 중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두 분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 장례식에는 갔느냐고 묻자 그가 되물었다.

"그런 게 궁금하세요?"

그는 이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4월 19일 공공부문 총파업 뒤 수배된 그는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빈소를 지켰다. 발인 날 새벽에는 변장하고 빠져나와 명동 농성장으로 돌아갔다. 그해 9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경찰과 협상해 발인과 삼우제까지 마친 뒤 출두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발인 날은 민주노총 임원 선거일이었다. 장례를 마친 뒤 "부위원장에 당선됐다"는 전화가 왔다.

2000년 민주노총 부위원장 시절 단병호 위원장과 함께한 양경규(맨 왼쪽). ⓒ 양경규

그가 되물은 것은 자신의 고생을 특별한 이야기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이름 없이 운동한 사람이 많았고,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노조 활동을 시작한 자신은 오히려 편하게 운동한 편이라고 했다. 개인의 고생을 앞세우기보다 그 시대를 함께 지나간 사람들을 먼저 기억했다.

그때는 박수를 받았고 지금은 왜 받지 못하나

1987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 출발점은 임금과 노동조건이라는 '내 호주머니'의 문제였다. 그런데 한 사업장의 승리가 이웃 사업장으로 번지고, 공공부문의 승리가 전체 노동자의 조건을 끌어올렸다. 다른 사업장의 승리를 곧 내 승리로 받아들이면서 연대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전투적 조합주의였지만 밖으로 드러난 모습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고, 그 수익자는 시민들이었습니다."

노동운동이 바꾼 것은 임금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지 않게 된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면, 직장에서 '노'라고 말하는 문화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바꾼 일이었다.

"하늘 같은 사장한테 삿대질을 하고 '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한국 사회의 기본 구조를 바꿔놨습니다."

자기 사업장의 요구를 걸고 싸웠지만 그 성과가 아직 노조가 없는 노동자와 시민의 삶까지 바꾸던 때였다. 노동운동이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사회의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사업장이 안정되고 기업별 노조가 자리 잡으면서 노동운동은 자기 울타리 안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잘돼야 임금이 오른다는 이해가 강해지면 노동자는 계급의 주체보다 회사의 종업원으로 묶인다. 기업별 노조는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깨우면서 동시에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오늘의 조직노동은 이미 일정한 생활기반을 가진 노동자가 중심이다. 그들에게 사업장 바깥의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와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설득하기는 과거보다 어렵다. 양 대표가 "왕부채를 부쳐도 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대중을 탓해서가 아니라 달라진 노동운동 리더십의 조건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조합원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판단합니다. 조합원보다 더 공부하고 더 많이 알지 않으면 이들을 움직일 리더십을 갖기 어려워요. 뚝심이 있고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것만으로 지도자의 자질이 확보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노조 간부라면 공부해야 합니다."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 노동운동이 사회 전체의 조건을 바꾸는 힘을 이어가려면 조직과 정치가 함께 달라져야 했다.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양대 과제로 세웠다. 전자는 기업별 노조의 벽을 넘기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투쟁으로 얻은 힘을 제도의 변화로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총파업이 가르쳐준 '여의도의 정치'

1996~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선언과 교육에서 실제 정치조직 건설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다. 당시 전문노련 위원장이던 양 대표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교섭을 투쟁 준비의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쪽이었다. 노동자들은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18일까지 24일간 이어진 3단계 전면 총파업과 이후 산발적인 파업과 집회투쟁 등을 통하여 정부의 사과와 법안 재논의를 끌어냈다. 노동운동이 정치적 쟁점을 걸고 벌인 전무후무한 규모의 파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돌아간 법은 일부만 고쳐 다시 통과됐다. 막대한 투쟁력을 보여주고도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 곳에 노동자의 자리는 없었다.

"승리한 파업이었지만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파업이 됐죠.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수백 번의 교육보다 단 한 번의 투쟁으로 깨달았어요. 투쟁의 정치와 여의도의 정치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요."

1997년 5월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 된 양 대표는 권영길 위원장의 대통령 선거 출마와 국민승리21 결성을 위한 조직사업을 맡았다. 산별연맹과 지역본부, 대공장을 돌며 100차례 가까운 간담회와 정치교육을 했다.

"민주노총이 모이라고 하면 다 모이던 시대"였지만 생각까지 같지는 않았다. 김대중 후보를 통한 정권교체가 먼저라는 쪽과 현장투쟁·산별노조 건설에 집중해야 한다는 쪽이 맞섰다. 양 대표는 조합원과 지도부의 간극보다 지도자들 사이의 간극이 더 컸다고 기억했다.

민주노총 밖에서는 전국연합과 사회운동 세력, 서로 다른 좌파 정치세력까지 한자리에 모아야 했다. 정치세력화에는 동의해도 어떤 정당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현장 조합원의 기대와 변혁정당을 구상한 정치활동가의 목표 사이에도 거리가 있었다.

1997년 9월 7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약 2000명이 모인 국민승리21 발족대회에서 양 대표는 사회를 봤고 권영길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렵게 어렵게 노동자들을 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차는 다음 정거장이 어딘지도 모른 채 그렇게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6월 11일 아시아나항공노조 파업 현장에 함께한 양경규 당시 공공연맹 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 양경규

당을 키운 배타적 지지, 정치를 맡기는 대리주의

국민승리21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양 대표는 민주노총의 모든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을 통해 한다는 배타적 지지 방침을 대의원대회에 제출했다. 민주연합론자와 일부 좌파 세력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배타적 지지를 이념의 당위가 아니라 당을 존속시킬 현실적 수단으로 설득했다. 대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과거 진보정당이 선거 뒤 해소된 것은 대중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 패배해도 살아남는 당이 되려면 대중적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만든 당마저 다시 문을 닫는다면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배타적 지지는 선거 뒤에도 민주노동당이 성장할 조직적 기반이 됐다. 2004년 국회에 진출했고 2006년 지방선거에는 전국에서 802명이 출마해 81명이 당선됐다. 무상급식과 무상의료처럼 훗날 상식이 된 의제를 제기하며 보수 양당 체제를 넘어설 가능성도 보여줬다.

성공의 방식은 부작용도 낳았다. 노동자는 현장을 맡고 정치는 당에 맡기는 대리주의가 강해졌다.

"노동자는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우리는 돈 대주고 당비 내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생겼어요. 앞으로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배타적 지지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올바른 방식도 아닙니다."

노동운동의 공간은 현장이었고 정당 활동의 공간은 지역이었다. 하루 종일 교섭하고 조합원과 부딪친 노동자가 퇴근 뒤 지역 당 회의까지 계속 참석하기는 어려웠다. 노동자의 실질적 참여가 줄면서 당은 정치활동가의 무대가 됐고, 노선 차이에 인사와 패권 경쟁이 겹쳤다.

2001년 자주·민주·통일 계열이 민주노동당에 본격 결합하면서 당의 외연은 넓어졌지만, 북한과 통일 문제, 민주당과의 관계, 독자적 계급정치를 둘러싼 자주파와 평등파의 노선 대립도 선명해졌다. 여기에 비례대표 순번과 지역위원장, 당직과 인사를 둘러싼 경쟁이 얽히면서 정파 갈등은 더욱 격렬해졌다.

2005년 5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 참석한 양경규 당시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 위원장. ⓒ 양경규

2008년 분당 때 양 대표는 끝까지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NL의 패권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PD 계열의 실력 부재와 노동운동·정당운동의 분리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정파 간 대립 때문에 활동가들이 피곤한 줄은 알겠는데, 활동가가 피곤하다고 대중을 피곤하게 하지 마라. 꼭 분당하고 싶으면 대중을 설득한 다음에 나가라. 번갯불에 콩 튀어 먹듯이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는 진보신당에 가지 않고 오랫동안 무당적 상태로 남았다.

1987년에는 풀이 먼저 일어났고 지도자는 그 분노와 희망을 묶었다. 지금은 지도자가 왕부채를 들어도 풀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세상을 바꿨고, 동시에 자기 울타리와 진영 안에 갇혔다. 그 성취와 실패를 모두 지나온 양경규가 다시 정의당 대표가 됐다.

그는 운동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고, 그 이해 속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과거를 잘 아는 사람이 얻은 자유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자유까지 뜻한다면 이제 답해야 할 것은 하나다. 1980년대의 답안지 없이 오늘의 풀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것인가.

- <[인터뷰②] "1980년대의 답안지로 2020년대 문제를 풀 수는 없다">로 이어집니다.

#양경규#정의당#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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