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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듯 옥살이' 감옥을 서재로 삼은 바보새, 함석헌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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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가둬도 '씨알'의 생각은 가두지 못해

18세에 3·1운동에 참여, 박정희·전두환 반대

일제·북 공산정권·남 독재정권서 잇단 투옥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통해 백성의 역사 기록

눈치 안보는 독립 매체 '씨알의 소리' 만들어

비폭력·소박한 공동체 강조한 '한국의 간디'

하얀 산신령, 저잣거리로 내려오다

함석헌(1901–1989)의 이름 앞에는 붙는 말이 많다. 역사가, 종교인, 시인, 잡지발행인, 농사꾼, 그리고 감옥 단골손님까지. 명함 한 장에 다 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흰 두루마기에 흰 수염, 흰 고무신까지 갖춰 영락없는 산신령인데, 이 산신령은 산속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저잣거리로 내려와 권력의 멱살을 잡았다. 주먹이 아니라 글과 말로.

 

함석헌, 1980년대(위키피디아)

하늘이 걷어찬 공, 감옥으로 굴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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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덟 살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학업을 중단했다. 오산학교에서 유영모(1890–1981)를 스승으로 만났고,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우치무라 간조(1861–1930)의 무교회 사상을 접했다. 목사나 교회의식에 의존하기보다 성경과 양심을 중시하는 신앙이었다. 벗 김교신(1901–1945)과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한 것도 이 인연에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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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귀국해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지만, 일제의 식민지 역사교육은 조선의 굴욕과 패배를 강조했다. 그는 짓밟힌 백성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쓰고자 했다. 1930년대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그 출발이었다. 이 글은 1950년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이후 대폭 수정되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난의 역사에도 뜻이 있다는 그의 역사관은 여기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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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값은 비쌌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약 1년간 구금됐고,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다시 1년가량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신의주 학생사건과 관련해 북한에서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1947년 남으로 내려왔다. 일제와 북쪽의 공산정권, 남쪽의 독재정권까지 두루 감옥살이를 겪었다. 감옥마다 출석도장을 찍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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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걷어찬 공처럼 이리저리 굴렸다고 말했다. 공이 구르는 길마다 감옥이 있었으니, 하늘의 발길질치고는 조준이 참 짓궂었다.

 

함석헌, 1950년대(위키피디아)

고난의 여왕에게 뜻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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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승리한 왕과 장군의 연대기가 아니다. 침략당하고 짓밟힌 백성의 역사다. 고난은 부끄러운 실패의 기록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과 민족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묻는 과정이다. 영어권에서는 이 책이 『고난의 여왕』(Queen of Suffering: A Spiritual History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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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고난을 무조건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주저앉으라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역사를 다시 읽어 절망을 넘어설 뜻을 찾으려 했다. 칼로 원수를 갚는 대신 정신으로 일어서자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런 생각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훗날 그 생각은 민주주의와 민중의 자각을 떠받치는 밑천이 됐다.

 

영어판 함석헌의 책(김성수 시민기자 소장)

생각하는 백성은 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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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부터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며 함석헌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게 했다. 8월 8일 체포됐다가 25일 풀려났으니, 구금 기간은 20일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속기간 중 젊은 검사에게 뺨을 맞았고 수사관들에게 매타작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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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글의 요지는 분명했다. 전쟁과 분단의 책임을 남에게만 돌리지 말고, 우리자신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생각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제목에는 불온한 낱말 하나 없었다. 생각하라는 말이 불온하다면,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백성의 무지가 아니라 각성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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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는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를 비판한 「5·16을 어떻게 볼까」를 『사상계』 7월호에 발표했다. 민중을 앞세우지 않는 혁명은 결국 민중과 멀어지고 지배자의 본색을 드러낸다고 경고했다. 박정희가 내세운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그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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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에는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씨알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과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는 뜻이다. 임금이나 지도자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역사가 움직인다는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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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1979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이른바 위장결혼식 사건에도 연루돼 구속됐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아래에서는 가택연금에 국가폭력까지 당했다. 정권은 달라졌지만, 권력이 비판자를 대하는 버릇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함석헌(왼쪽), 류영모(오른쪽), 김흥호(뒤)1950년대(위키피디아)

바보새가 된 한국의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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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53년 군산의 구호 현장에서 서구 퀘이커를 처음 제대로 만났다. 목사나 정해진 의식 없이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평화와 평등을 실천하려는 종교친우회였다. 그는 퀘이커의 비폭력과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 끌렸다. 1961년부터 미국 펜들힐(Pendle Hill)과 영국 우드브룩(Woodbrooke)에서 공부하고 교류했으며, 1967년 정식회원이 됐다.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Arthur Mitchell)이 그에게 했다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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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퀘이커가 되기 전부터 이미 퀘이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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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과 소박한 공동체를 강조한 그는 ‘한국의 간디’로 불렸다. 1958년 시작한 씨알농장도 간디의 공동체정신을 본뜬 시도였다. 미국 퀘이커들은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그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며 겸손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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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스스로 붙인 별명은 ‘바보새’였다. 신천옹을 가리키는 일본어 별명에서 따온 것으로, 제 먹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는 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처럼 보였던 이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양심이 가리키는 곳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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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평화올림픽 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인 1989년 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사후에 그를 한국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함석헌 평전(김성수 시민기자)

 

영어판 함석헌 평전(김성수 시민기자)

오늘의 씨알은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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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 응원봉을 든 시민들의 모습은 함석헌이 말한 씨알의 힘을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권력도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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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몇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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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생각을 남에게 맡기지 말자. 맞춤형 영상과 편향된 소식이 판단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비판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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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우리 편의 잘못도 비판하자. 함석헌은 일제와 북쪽의 공산정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권력을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진영의 충성보다 양심의 판단이 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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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비폭력의 힘을 제도로 이어 가자. 광장의 평화로운 저항은 출발점이다. 그 힘을 선거와 법치, 민주적 제도의 변화로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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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작은 목소리를 지키자. 『씨알의 소리』처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립매체와 시민의 목소리는 민주주의의 숨구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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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고난의 진실을 기록하자.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기억하고 책임을 밝히는 일은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다.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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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함석헌의 몸을 가둘 수 있었지만 생각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정권은 바뀌고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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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리고 살아 있는 씨알이라야 역사를 바꾼다.

 

함석헌 1980년대(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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