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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공산주의, 개인숭배, 프롤레타리아트독재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13 11:14
  • 수정일
    2014/01/13 11: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사회주의, 공산주의, 개인숭배,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이채언 교수의 정치경제학 강의
 
이채언 교수 
기사입력: 2014/01/13 [00:1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오른쪽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서양에서 사회주의를 창시하고 발전풍부화시킨 3대주역이다. © 진보정치 제공, 설명글은 자주민보
 
 
흔히 공산주의라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이른바 공산주의 원칙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매우 풍요로운 사회에서나 실현가능하다고 여기고 아주 먼 미래에서나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 풍요가 아무리 넘쳐나도 공산주의가 실현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질적 풍요가 공산주의의 실현가능성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 둘 사이 어떤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정의 가족관계를 예들어 보자. 가정에서야말로 가족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가족끼리 우애와 사랑이 넘치면 어떤 물질적 궁핍도 능히 극복할 수 있지만, 우애와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해도 풍비박산난다. 문제는 그러한 사랑과 우애가 다른 가족, 다른 지역, 다른 나라, 다른 인종끼리도 가능할까에 있다.

 
능력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사랑과 우애는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지 사상이나 이론, 법이나 국가폭력으로 강제될 수 없다. 저절로 사랑과 우애가 우러나려면 빈번한 접촉과 교류가 먼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빈번한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질적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저절로 깊어지고 우애와 사랑이 싹트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화와 반목만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접촉과 교류,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적어도 어떤 원칙 위에 이루어져야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생기고 우애와 사랑이 싹틀 수 있다. 그런데 그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주의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부터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원칙에 따른 접촉과 교류가 가로막혀 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과 능력에 적합한 일자리를 얻기는커녕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실업상태에 놓여 있다. 적어도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창의적인 능력을 키울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존조건인 토지, 산림, 천택(川澤), 바다 어느 한 군데라도 접근이 불허되지 않아야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러한 생존조건들을 누군가가 미리 독점해 함부로 접근 못하게 막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한정된 생존기회와 교육기회 속에서 발견되거나 습득되어진 재능만 발휘될 수 있고, 발견되거나 습득된 재능이라고 해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직장과 직책은 미리 기득권자들에게 선점당해 그들 밑에서만 그들의 구미에 맞는 방식으로만 발휘하도록 배치된다. 그마저도 교육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재능이 있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실업과 빈곤에 놓인다.
 
따라서 ‘능력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즉, 사회주의사회가 되려면 먼저 ①다채롭고 다양한 재능과 능력이 존중될 수 있도록 온갖 종류의 직업과 직책이 먼저 개발되어야 하고, ②사회적 여건이나 교육기회 때문에 사장당하는 일 없이 천부적 재능과 능력이 꽃피워질 수 있어야 하며, ③사회의 착취구조와 수탈구조가 청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①을 위해서는 글로벌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시장이 확대되어야 각종 직업과 직책이 분화되고 각종 직업이나 직책마다 적정규모의 수요가 창조될 수 있으며 거기에 맞는 능력과 재능이 존중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글로벌시장경제의 발달이 필수적인데 그러한 글로벌시장경제의 발달을 강제할 기관차야말로 자본주의체제다.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고도의 자본주의경제의 발달이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한 생산력의 발달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자본주의시장경제가 생산력을 파괴하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생산력발달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생산력의 해방을 위해 글로벌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이 요구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②를 위해서도 글로벌 시장경쟁이 필수적이다. ②의 실현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사회적 장애물들은 그 본성상 자본주의시대 이전의 구시대 유물에 불과하지만 자본주의시장경제 속에도 계속 변형된 형태로 살아남아 불공정경쟁을 조장해왔다. 그러나 직업이전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규제들, 부의 세습이나 직업의 세습을 가능케 하는 온갖 관습적 및 제도적 장치들, 갑을관계를 만드는 경제외적 힘의 작용 등이 글로벌 시장경쟁과 충돌하면서 하나씩 제거되거나 파괴된다. 전문경영인을 CEO로 영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지 널리 인재를 구하기 위해 각종 분야에서 연구비나 장학금을 확대시키거나 학벌이나 사회적 배경을 불문에 부치는 것 따위도 글로벌 시장경쟁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전체적 인간이 가져야 하는 다양한 재능이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적합한 재능이나 능력만 편중해서 구한다는 점에서 생산력의 발달을 왜곡시킨다는 점뿐이다.
 
 
개인의 자의식과 전체적 인간으로 발달가능성
 
글로벌 시장경제에서는 애국심이나 민족의식 같은 것도 거추장스러운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될 정도로 글로벌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의식과 개성과 재능, 능력을 최고조로 개발시켜 전체적 인간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축적시킨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업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자의식과 전체적 인간으로 발달가능성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요소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의 실험’(1820년대 로버트 오웬이 했던 뉴하모니 실험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신공동체 건설로 실험했지만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에서 드러났듯이 사회구성원들의 개인주의적 자의식이 미개발된 상태에서 실행되는 사회주의는 시스템의 기능을 관리하고 감독해야 하는 사회지도자 개인에게만 늘 분주히 돌아다니며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지도자 개인에겐 만성피로상태에 놓일 만큼 과중한 부담을 주고 주민들에게는 사회시스템의 장점과 기능을 사회지도자 개인의 자질과 능력으로 오인하게 해 신격화되면서 그 개인을 숭배토록 만든다. 개인숭배가 국가시스템의 강제에 의한 것이면 강제력만 풀면 쉽게 고쳐질 수 있겠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자의식의 미발달에 의한 것일 때에는 해결이 쉽지 않다.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에 불과한 지도자를 묵시록이 약속한 재림예수처럼 인식해 숭배하기 시작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개인의 자의식의 발달, 전체적 인간으로서의 자아발견,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재능과 능력의 발달이 개인의 능동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지도자의 시혜나 관심 혹은 배려에 의존하는 피동적 인간형을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통념과 다른 의견을 표출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모든 사람이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면 내 눈에는 비록 사슴으로 보여도 나의 착각 때문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수탈구조와 착취구조
 
③을 위해서는 수탈구조와 착취구조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수적이다. 수탈은 부등가교환을 토대로 한다. 인간의 생존조건인 자연물이나 사회적 인프라를 횡령해 그 사적소유권을 토대로 놀고먹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착취는 등가교환을 토대로 한다. 사회적 결합노동을 조직해 그 생산물전체에 대한 처분권을 혼자 독차지함으로써 여타의 사회적 노동에 대해서는 전체생산물 가운데 일부로써 사후적으로 지불해서 교환과정을 거치는 외관을 취한다. 전자는 토지, 산림, 강, 바다, 자연의 동식물 같이 한번 소유하면 닳거나 고갈되지 않는 비(非)노동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가 그 토대이지만, 후자는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으로 기능하는 지적재산이나 건물, 기계설비 같은 노동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가 그 토대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불법과 비리로 이룬 비(非)노동생산물의 사적소유에 대해서는 사법정의 차원에서 국가소유로 환원시키지만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 모은 사적소유에 대해서는 개인소유를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사회가 점유권만 행사한다. 그러나 사회적 결합노동의 생산물전체에 대한 사적소유에 대해서는 그 법적근거를 무위로 돌리기 위해 노동계급에게 화폐발행권을 부여함으로써 노동력의 매매가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사회적 결합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사회적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소유권의 재정의(再定義)가 사회의 기득권이나 이해당사자의 의사를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독재가 실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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