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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신비주의

종교 없는 신비주의

 
성해영 2012. 11. 10
조회수 290추천수 0
 

 

 

이스터섬의 일몰-이정용-.jpg

이스터섬의 일몰 사진 이정용 기자

 

 

신비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신비적 합일 체험

 

신비체험을 다룬 저번 글을 올리고 어쩌다 보니 한참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후속 글을 기다렸을 분들과 조현 기자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이런 저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이 일에 시간을 내지 못했다.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린다.

 

체험담을 올린 후 생각보다 많은 메일을 받았다. 많은 분들이 흥미롭게 읽었다는 반응과 더불어 격려해 주었다. 또 메일로 자신의 경험담을 상세하게 적어 보낸 분들도 있었다. 어떤 분은 의식 변형 상태를 체험하려고 ‘감각 박탈 탱크’라는 걸 직접 제작해 실험했던 경험을 알려주기도 했다. 마치 우주적 유머인 듯 두 차례의 태풍으로 옥상에 만들어 두었던 탱크가 부서지는 바람에 정작 의식 변형 체험을 갖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대목에선 한참을 웃었다. 그 분의 진지함과 강인한 모험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체험담을 직접 적어 보내 주신 분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 한 분은 고어 비달(Gore Vidal)이라는 소설가가 ‘줄리앙’이라는 작품에서 묘사한 신비체험을 적어 보내주었다. 기독교에 반발해 로마의 다신교 전통으로 돌아가려했던 젊은 황제 줄리앙(Julian the Apostate)의 얘기는 익히 들은 적이 있었지만, 비달이 자신의 소설에서 줄리앙의 신비 체험을 묘사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소개에 감사드리며, 독자들을 위해 그 부분만 간략하게 옮겨 볼까 한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보내준 부분은 줄리앙 황제가 미트라(Mithras) 비교(秘敎)에 그의 주치의인 오리바시우스(Oribasius)와 함께 입문한 대목과, 그 이후 신비적 합일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다루는 부분인 듯하다.

 

“......날이 질 무렵 오리바시우스와 나는 다시 태어나 동굴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 때 그 일이 일어났다. 내가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빛에 의해 사로 잡혔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체험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나는 일자(一者, the One)를 보았다. 나는 태양에 흡수되었으며,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빛이 돌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창조의 근저에 자리하는 단순함 그 자체를 보았다. 그것은 언어와 마음을 넘어선 곳에 있기에 신의 도움 없이는 아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명료했던지, 우리가 그것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의 부분으로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여태껏 알지 못했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묘사다. 신비적 합일 체험의 기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대목이 희랍·로마 종교 전통에서 흔히 궁극적 실재로 일컬어지는 일자(一者, to hen)와 하나가 되는 체험(henosis)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분명하게 지적했듯이 인간은 ‘체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임스는 그 체험들을 ‘종교 체험’이라 불렀고, 종교 체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비 체험’을 꼽았다. 그리고 신비 체험은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도대체 신비주의란 무엇을 의미할까?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종교학 전공자라고 밝히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 ‘종교가 무엇이냐’다. ‘종교가 없다’라고 답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종교학을 곧 신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교 없이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게 이상한 모양이다. 얘기 끝에 세부 전공이 신비주의라고 하면 분위기가 묘해지기 십상이다. 대뜸 ‘귀신이 보이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점을 볼 줄 아느냐’, ‘UFO의 존재를 믿는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초자연적 현상과 기기묘묘한 것들에 대한 질문이 따라 나온다. 이렇게 왕성한 호기심을 표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거고, 신비주의라는 단어에서 비합리적이고 황당한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냥 종교심리학을 공부한다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흔해졌다.

 

신비주의라는 말에는 참으로 많은 오해가 덧붙여져 있다. 신비주의는 본래 인간이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수행을 통해 이 체험을 체계적으로 추구하고, 나아가 체험으로 얻게 된 앎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신비 체험, 신비적 수행, 신비 사상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신비 체험’은 신비적 합일 체험을 필두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나 ‘세계’가 인간 의식에 드러나는 여러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체험 중에서도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신비적 합일 체험은 가장 핵심을 차지한다. ‘신비적 수행’은 신비적 의식 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다양한 의식 변형의 유도 방법들을 뜻하며, 종교 별로 명상을 포함해 다양하고 독특한 테크닉들을 발전시켜 왔다. 끝으로 ‘신비 사상’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적 앎에 기초해, 궁극적 실재와 현상 세계 사이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궁극적 차원, 신비적 수행법과 체험 간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이론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신비주의 전통은 이처럼 체험, 수행, 사상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핵심은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 사후(死後)가 아닌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도중에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사후 구원이 신비주의와 양립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주된 목적이 되기는 힘들다. 이러한 정의가 윌리엄 제임스를 비롯한 학계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비주의의 개념 정의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복잡스럽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주의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반하는 개념으로 비합리적이며, 초자연적 현상을 총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심령 현상, UFO, 접신, 점복, 종교적 기적, 초능력 현상, 신유(神癒) 등 합리화된 현대 사회에서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사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한편 신비주의는 종교적 견해의 차이를 폄하하는 용어로도 널리 사용된다. 종교 생활의 주된 목적이 신비적 합일 체험이 아니라, 사후에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 여기는 입장에서 신비주의적 종교성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견해, 즉 이단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비주의자들이 이단으로 심판받고 목숨까지 잃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신을 궁극적 실재로 여겨 신과 하나가 되겠다는 입장은 무신론적 종교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의심스럽거나 혹은 한 단계 낮은 종교성의 표현이라 간주되기도 한다. 일부 동양 종교 전통이 서양 신비주의를 유신론으로 낮추어 보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불교인들이 선불교는 서양의 근기 낮은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는 주장이 전형적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서양 종교가 자력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과 같은 종교 체험을 주된 목표로 삼는 동양 종교를 폄하할 때에도 신비주의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동양의 종교를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비난했던 19세기 서양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와 달리 신비주의를 동서양 종교의 핵심이나 근본으로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이 입장은 앞서 설명한 태도와 달리 신비주의의 개념 정의를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이 경우는 자칫 신비주의에 경도될 위험성을 내포한다. 즉, 궁극적 실재의 동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교리나 수행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동서양 종교의 차이를 간과할 가능성이 크다. 또 신비 체험을 종교 생활의 핵심에 두는 탓에, 체험 그 자체에 모든 에너지를 투여해 이른바 ‘체험 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성도 크다. 체험이 모든 삶의 문제에 해답을 준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선 90년대부터 갑자기 연예기자들이 ‘비밀주의’를 신비주의로 혼동해 사용하는 현상마저 생겨났다. 연기자나 가수들이 대중 매체에 의도적으로 노출을 꺼리는 전략이 바로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TV 광고의 ‘티저(teaser) 기법’ 역시 신비주의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기자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신비주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자신을 적절하게 숨겨, 실제보다 더 ‘신비롭게’ 보이는 전략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 탓인지 요즈음에는 신비주의를 전공한다고 하면, 연예계나 광고계에 종사하느냐라는 질문마저 받게 되었다.

 

요컨대 모두가 공감하는 신비주의의 개념 정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 단어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 역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신비주의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인간의 참된 본성, 존재의 근본적 의미,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적 앎과 관련되어 왔다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음 논의로 넘어갈 수가 있을까. 적어도 여기서 연기자 이영애 씨와 가수 서태지 씨의 신비주의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 정도는 분명히 하자(^^).

 

 

 

신비주의에 내포된 여러 가지 질문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 신비주의의 핵심이라면,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질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들을 서로 비교하는 종교학의 하위 분야인 ‘신비주의의 비교 연구(comparative study of mysticism)’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주요한 질문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이 소설가 비달(Vidal)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와 인간의 마음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면 이런 것들을 학자들이 제대로 다룰 수 있는지와 학문적 접근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학계에서 얼마나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지를 알게 되면, 학문적 접근이 그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유용성을 갖는다는 점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신비적 합일 체험을 비롯해 여러 가지 종교 체험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의 체험인지를 다루는 유형론(typology)이 있다. 여기에는 신비적 합일 체험의 대상인 궁극적 실재가 무엇일까에 대한 얘기를 포함해, 합일 체험의 구체적인 유형에 관한 논의가 포함된다. 그 연장선에서 신비 체험이 종교별로 같을까라는 중요한 질문도 제기된다. 논리적인 귀결로 만약 체험이 다르다면 왜 다를까라는 물음도 등장한다. 종교 교리와 수행 방식이 달라서 체험이 달라지는 걸까? 그렇다면 초월의 체험이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신비 체험은 진정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는, 즉 문화적 맥락과 종교 전통을 초월한 것인가? 그리고 궁극적 실재는 무엇이며,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일까? 예컨대 불교의 공과 기독교의 신이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궁극적’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수행과 체험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체험을 위한 더 효과적인 수행법이 있을까? 수행은 반드시 체험을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신비적 합일 체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수행의 관점에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구에게나 체험이 일어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신성 혹은 불성과 같은 개인적 마음을 넘어선 차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으로 수행 과정에서 감정은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까? 지성은 수행과 양립할 수 없을까? 특히 인간의 성(sexuality)을 비롯해 욕망은 신비 체험의 획득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금욕주의가 신비적 합일 체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깨달은 자들은 세속적 윤리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왜 동양의 깨달았다는 종교 구루들이 서양에 가서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동양적 깨달음과 서양적 신비 체험에 존재하는 차이가 스캔들의 원인인가? 또 종교 없이 신비 체험이 가능한가? 즉, 세속적 신비주의(secular mysticism)라는 게 가능할까? 여성성과 남성성은 신비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비주의가 정치적 자유 혹은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을까? 왜 플라톤은 서양 신비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질까?

 

이처럼 많은 질문들이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물론 이 모든 질문들을 앞으로 내가 여기서 다루어가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이런 저런 다양한 문제들이 신비주의 비교 연구라는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덧붙여 질문이 가능하다는 게 곧바로 답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이런 모든 질문들에 그야말로 자로 잰 듯한 깔끔한 답이 있다고 믿기는 곤란하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이런 질문들 자체가 아예 부질없는 것이라거나, 모든 질문에 답이 너무도 분명하니 헛고생하지 말라고 나에게 조언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전공자인 내 입장에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다. 이 질문들이 무의미하거나, 혹은 너무도 자명한 답이 있었더라면 내 밥벌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신비주의는 종교학계에서 뜨거운 주제였고, 많은 학자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연구에 투여해 왔다. 그러므로 이런 학문적 탐구가 비록 모든 질문들에 대한 확실한 답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이 문제들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믿는다. 질문 자체를 꼼꼼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여러 차원이 더 분명하게 그 속살을 드러내리라는 기대는, 적어도 우리 마음을 편하게는 못 만들어도 두근거리게는 만들지 않을까. 여하튼 오랜만에 돌아와 참으로 면목이 없기는 하지만, 오랜만이니 더 반갑게 맞아 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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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영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문화관광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고교 때 체험한 신비체험을 규명하기 위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공부한 뒤’로 서울대 HK(인문한국) 교수로 있다. 종교체험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지 탐구중이다. 저서로 오강남 교수와 함께 나눈 얘기 모음인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있다.
이메일 : lohel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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