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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은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법인 스님 2012. 10. 30
조회수 139추천수 0
 

20121030_3.jpg » 한겨레 자료 사진.
 
도심에 살다 보면 갈수록 눈에 띄게 늘어나는 어떤 모습을 보고 듣게 된다. 노숙자, 범죄자, 그리고 확성기로 외치며 다니는 종교전도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총생산량과 사람의 불안이 동행하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내가 사는 조계사와 인사동 주변에도 이들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우정국 주변에는 노숙자들이 조계사 주변에서 무료급식을 하며 오래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일주문 앞에서 좌선 흉내를 내며 시주를 청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또 문화의 거리로 불리는 인사동에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는 사람이 등장한 것도 예전엔 없던 풍경이다.
 
이들을 보노라면 마음 한 편에 늘 불편함을 느낀다. 성스러운 말씀을 전파하는 종교전도자들까지,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고 날을 품고 있고 웃음이 사라진 얼굴이다. 시선은 방향을 잃고 오로지 한 곳만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체념과 도피로 자신의 삶터에서 이탈되어 있다. 조그만 희망의 불씨조차 피울 의지와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우리와 한 시대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도피와 이탈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들의 이탈과 성자들의 삶을 견주어 보기로 하자. 혹자는 이런 견줌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자들이 뭐 그렇게 특별한 분들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분들이 우리와 견주어 특별하지 않아야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 ‘성자들은 매우 특별한 분’이다. 그분들이 매우 특별해야만 우리가 희망의 세상을 꿈꾸고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자들도 우리와 같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도 부조리한 사회에 속해 살았고,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비난과 모함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괴로워했고 더없이 슬픈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우리와 견주어 한 치도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와 달리 무엇이 특별했을까? 성자들은 이기적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웠다. 분노와 절망보다는 자애와 희망의 등불을 밝혔다. 나와 너, 민족과 계급, 피부와 남녀의 금 긋기를 부정하고 평등과 상생의 세계를 꿈꾸고 가꾸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와 견주어 아주 특별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한 번 생각해보자. 붓다의 출가와 구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절실하게 간구했던 예수의 고행, 55세 나이에 바른 세상을 구현하고자 14년 동안 천하를 떠돌았던 공자, 진리 앞에 목숨까지 초연했던 소크라테스, 이들 성자들은 물론 간디와 슈바이처와 같은 선각자들까지, 그들이 지혜와 더없는 자애의 열정으로 희망한 세상은 어디일까?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해탈과 정토, 하나님의 나라, 도덕과 예의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죽어서 가는 천당과 극락이 아니다.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한 어떤 정신과 관념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유마경은 말한다. “중생의 국토가 보살의 불국토다.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깨달음이다.”
 
묻는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쓰레기장과 향기로운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이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가? 답한다. 그 의지처는 땅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그 땅이 본래부터 쓰레기장이었고 꽃밭이었던가? 본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꽃밭과 쓰레기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거듭 답한다. 쓰레기를 던지니 쓰레기장이 되었고 꽃씨를 심고 가꾸니 꽃밭이 되었다.
 
자! 이제 확연해졌다. 루쉰의 말대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그러므로 길은 어디에도 있다. 그 길은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가꾸는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의 길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신앙한다는 것, 수행한다는 것,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 해탈과 하나님나라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 사람’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 현실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공상을 좇고 있다. 구원의 세계가 죽어서 가는 세계라고 말하고 믿는 종교인이 있다. 우리의 신을 믿고 기도하지 않으면 불행하고 지옥에 떨어지고, 믿고 기도하면 천당에 간다고 겁박하거나 믿는 종교인이 있다. 인간은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이고 죄지은 자라고 세뇌하면서 늘 회개하고 욕망을 억압하라고 강요하는 종교인이 있고 자신을 그렇게 단정 짓는 신자가 있다. 기도나 헌금을 많이 하면 부자가 되고 은혜를 받는다고 설교하는 종교인이 있고 그렇게 부자를 꿈꾸는 신자가 있다. 지금도 반공과 멸공을 부르짖으면서, 생명과 환경, 인권과 정의와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종북좌파라며 증오와 대립으로 몰아가는 일에 앞장서는 종교인이 있다. 이쯤 되면 세계 으뜸의 고학력 문명사회 대한민국의 종교지능지수는 여전히 두 자리 수라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와 붓다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상식과 보편의 세계를 떠나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연민. 지혜. 자애. 겸손. 청빈. 순결. 평등. 정의. 평화를 저버릴 때, 그 자리를 강건하게 지킨 그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특별함이다.
 
삶의 기적은 현실에서 지극히 합당한 진리의 실천으로만 이루어진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일화가 있다. 알라의 계시자라고 소문난 무함마드에게 사람들은 신비한 기적을 기대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아, 내게로 오라”고 기도했다. 몇날 며칠의 기도에도 산은 무함마드에게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갈 수 밖에 없노라”고 말하고는 걸어서 산으로 갔다.
 
석가모니 붓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람들이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가미니라는 청년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게으르고 온갖 나쁜 업을 지은 사람이 축원을 받는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 치자. 마을 사람들이 못 가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설사 기도로 산이 무함마드에게 오고 못에서 돌이 떠오른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탐욕과 집착의 노예가 되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한다면 바로 그곳이 지옥인 것을.
 
종교는 현실을 잠시 잊는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다. 판타지는 정직하고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다시 또 다른 판타지로 재구성한다. 판타지는 허구다. 판타지는 망각과 환상의 마약을 사람에게 계속 주입한다. 괴로움은 어떤 신비한 이적과 단순한 위로와 왜곡된 환상과 도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서늘하게 새기자.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혜와 자애와 불굴의 정진으로 ‘지금. 여기. 나’의 자리에서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 옛 선시 한 구절을 붙인다.
 
“하필이면 서쪽만 극락세계이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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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부장으로 승가 교육 진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메일 : abcd36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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