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응원봉 연대의 기수이자 X 계정주, 김지연(28)씨를 지난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만났다.
-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97년생 김지연이라고 하고요. 야간 대학인 서울의 모 전문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전공심화 학부과정(전문대학에서 취득할 수 있는 4년제 학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대학을 중간에 자퇴했다가 재입학을 한 거라 취업을 좀 일찍한 편이었는데요. 고객센터에서 상담사로 계속 일하다 오늘(7일) 퇴사했는데, 아마 계속 같은 업종으로 갈 거 같아요. 제 정체성 중 하나를 콜센터 노동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윤석열 파면 선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으셨어요?
"당일에 저도 헌재 앞에 깃발 들고 갔고요. 마음이 뭔가 얼떨떨하더라고요. 파면 선고 후에 노래(데이식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나왔는데, 원래 노래가 나오면 깃발을 늘 이렇게 흔들거든요. 근데 동행해 주신 저희 전국 응원봉 연대 광주지부 기수님이 깃발을 안 흔드시고 우시는 거예요. 그분을 보니까 저도 '엉엉' 이래가지고… 동행한 또 다른 응원봉 지부 두 분이랑 옆에 계시던 모르는 할머니, 또 다른 시민분과 이렇게 어울려서(?) 다같이 엉엉…"
- 왜 눈물이 났을까요?
"해방감, 성취로 인한 자기 효능감 때문인 거 같아요. 말하면서 또 눈물 나려고 하는데… 하프나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해서 딱 끝 라인을 통과하는 느낌… 다른 분들도 '마치 주마등처럼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지나갔다', '울음이 막 났다'고 하시더라고요."
- 원래 회사 출근 해야하는 시각 아니었어요?
"연차를 냈죠."
"내가 여성들을 초대하자"
전국 응원봉 연대는 광장에 처음 등장한 조직이 아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광장에 처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걸 2024년의 광장에서 되살린 것은 지연씨였다. 박근혜 탄핵 광장 당시, 대입 재수생이었던 지연씨는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신문 1면에 등장한 또래 여성들 사진을 보며 그는 부채감을 느꼈다.
"여대 다니던 친구들이 많아서, 이화여대 시위(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설립 반대 투쟁)나 박근혜 퇴진 집회에 나간 애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동덕여대 공학 전환 사태 때부터 기시감, 데자뷰 같은 게 느껴지면서 이화여대와 겹쳐 보이는 게 많았어요."
동덕여대에 연대할 방법을 고민하다 맞은 계엄 사태는 '무언가 역사가 쓰이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깃발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깃발은 그의 여러 정체성 가운데 사람들이 동질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메이저리티'(다수)한, 다수를 포괄할 만한 정체성에 입각해 만들어졌다.
"제가 그때 한창 의식하고 있던 여성 의제와 트위터에서 활동해 왔던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게 '응원봉'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제 응원봉을 들고 나가고 싶었고요. 2016년에 만들어졌던 '전국 응원봉 연대'의 트위터 계정이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오마주해서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2D(만화, 애니메이션, 웹소설 등), 3D(K팝 아이돌 등 현실 속 연예인), 버추얼(가상)을 모두 망라한 응원봉의 연대 깃발이 탄생했다. 이전 깃발에 있던 'JUST LET ME DUKJIL'은 'let us cry only for ticketing'으로 바뀌었다.
전국 응원봉 연대는 오프라인 광장에 나서기 전부터, 온라인 광장에서 먼저 '흥했다'. 모일 장소와 시각을 알린 지연씨의 첫 글은, 실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피해자 실명을 SNS에 공개했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인 김민웅씨가 상임대표인 촛불행동에 대항한 행동이었다.
"당시 '응원봉 들고 가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촛불행동에서 '얼마든지 들고 오시면 된다'고 메시지를 남긴 게 한창 알티를 타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걸 보니까 배알이 꼴리는 거예요. 저는 박원순(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거든요. 저를 존중해 주지 않는 초대자가 있는 곳에 객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여성들을 초대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지난해 12월 7일, 2024년 버전 '전국 응원봉 연대'는 처음 광장에 등장했다. 막상 약속 장소인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로 가기 전 여의도 공원 인근에서 깃발은 이에 화답하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휩싸였다. 처음 함께 동행을 구했던, 오픈채팅방을 개설한 이인 '방장'을 찾을 새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방장님이 마중을 나오신 줄 알았어요. 너무 많은 분들이 나와서 '응원봉을 들고 왔다'고 환호를 해주시더라고요. 인파가 너무 많아 길이 막혀서 결국 '여기 있겠습니다' 하고 밤이 돼서 행진할 때까지 거기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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