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국민연대’ 선두에 서라
[김종철 칼럼] ‘아름다운’ 양보만으로 새정치와 정권교체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김종철·언론인 | media@mediatoday.co.kr

 

 

무소속 대통령후보 안철수가 ‘사퇴 선언’을 하고 난 11월 23일 밤 9시쯤 나는 한 지인과 전화를 하게 되었다. 종교인으로서 40년이 넘게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동안 온몸의 피가 다 말라버리는 것 같아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이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는 12월 19일의 대선을 통해 올곧은 민주정부가 들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문재인과 안철수가 지루하고 답답한 협상을 되풀이하던 지난주에 모두 비슷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안철수의 결단으로 5년 가까이 기다려온 정권교체가 저절로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안철수 사퇴 발표 이후에 나온 여러 여론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그를 지지하던 유권자들 거의 모두가 자동적으로 문재인 후보 쪽으로 이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안철수의 사퇴로 이루어진 후보 단일화는 한국 정치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1997년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연합, 2002년 노무현과 정몽준의 여론조사에 따른 단일화 결정과 비교하면 안철수가 후보등록 이틀을 남겨두고 스스로 결단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백의종군’이라는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한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선거를 50여 일 앞둔 1997년 10월 말에 이루어진 DJP 연합은 김대중과 김종필이 철저히 정치적 계산을 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여론의 추세를 보면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이 35%,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이 30%, 국민신당 이인제가 20%, 자민련의 김종필이 10%였다. 김대중 혼자서 이회창을 이기기는 어려워 보였고, 김종필은 당선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개표 결과 김대중은 겨우 37만여 표 차이로 이회창을 눌렀다. 그런데 심각한 사태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서명한 ‘합의문’ 때문이었다. “김종필이 국무총리를 맡고 경제부처 장관들에 대한 임명권을 갖는다”는 항목이 김대중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박정희에 이어 5·16쿠데타세력의 2인자였던 김종필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구보수주의자였으므로 그와 자민련 사람들이 총리직을 독점하고 있던 정권이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한 것을 근거로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통령 김대중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국민의 정부는 그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바람직한 개혁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지난 23일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며 사퇴를 발표하는 안철수 후보
©연합뉴스

그렇게 큰 장애를 안고 있던 DJP 연합에 비하면 문재인과 안철수의 결합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국제 분야는 물론이고 남북관계에서까지 강력한 개혁과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127석의 국회 의석을 가진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다고 가정할 경우, 정당조직이 전혀 없는 ‘개인 정치인’ 안철수와 어떤 방식으로 공동정부를 구성할 것인가이다. 그 답은 두 사람이 지난 11월 18일에 발표한 ‘새정치공동선언’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정치부터 바꿔야 합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낡은 정권을 교체하고, 과감한 정치혁신으로 새로운 정치를 창조하겠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 앞에 책임지는 정치를 해내겠습니다. (·····) 대통령의 리더십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국정운영 방식도 이제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군림과 통치의 시대를 마감하고, 상생과 협력, 소통과 협치(協治)의 시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새정치공동선언’에는 “새정치와 정권교체를 위한 국민연대를 이루어 함께 대한민국의 새시대를 열겠습니다”라는 두 사람의 약속이 들어 있다. 문재인은 민주통합당의 조직과 힘만으로는 대선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안철수는 ‘사퇴 선언’에서 “제게 주어진 시대의 역사와 소명을 결코 잊지 않고 어떤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온몸을 던져 계속 그 길을 가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길은 ‘국민연대’에서 합류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지자들 말고는 그 어떤 정치세력이나 조직의 제약도 받지 않는 안철수가 국민연대의 선두에 서는 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열망하는 정권교체를 이루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5일에 후보 등록을 마친 문재인은 기자회견에서 “안철수 후보가 갈망한 새정치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 됐다”며 “그 힘으로 정권교체와 새 시대를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 후보를 지지했던 모든 세력, 후보 단일화를 염원했던 모든 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는 국민연대를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안철수는 지금 마음과 몸이 모두 피곤할 것이다. 지난 9월 19일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이래 사퇴하기까지 66일 동안 그는 선거대책본부를 이끌면서 문재인과의 단일화에 열중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재인 후보에게 성원을 보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한 것으로 정권교체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끝냈다고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정동에 전격 회동해 단일화 협상 재개를 합의했던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나는 안철수가 마음과 몸의 피로를 얼마쯤 덜어낸 뒤 국민연대의 선두에 서기를 간곡히 바란다. 어차피 대통령선거는 부동층을 어느 후보가 더 불러들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므로 열성적인 운동원들이 신명나게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안철수가 선거법의 테두리 안에서 ‘국민연대’ 유세단을 이끌고 문재인과 함께 전국을 순회한다면 그의 ‘아름다운 사퇴’는 ‘감동적인 재발진’으로 승화할 것이다.

국민연대가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안철수가 새 정부에서 어떤 직책을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제까지 그가 보인 언동에 비추어 보면 명확한 일이다. 정권교체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뜻이 이루어져서 공동정부가 구성될 경우 안철수가 자기를 지지하는 시민세력이나 정치인들과 민주통합당 사이에서 협치와 화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은 안철수의 후보 사퇴 발표가 나오자 즉각 자신의 선대위 집행부를 해체하고 국민연대 중심의 캠프를 꾸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비록 몇 달 동안이지만 두 후보 진영 사이에서는 단일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래서 쌍방이 느꼈을 서운한 감정은 국민연대 안에서 자연스럽게 누그러질 것이라고 믿는다.

‘돌아갈 다리를 불사르고’ 정치 외길을 걷겠다고 국민에게 공약한 안철수가 국민연대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의 귀환을 뜨거운 박수로 맞이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