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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33명 전원 구조'

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칠레 광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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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진정한 재난의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다.

라우렌세 골보르네는 2010년 8월 칠레 산호세 광산이 붕괴했을 때 광업부 장관이었다. 지하 700m 속 광부 33명이 갇히는 전무후무한 재난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원 구조’라는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이뤄낸 인물이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팀을 빠르게 구성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그 결과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69일 만에 광부 전원을 구조했다.

탁월한 위기관리 리더십 덕분에 라우렌세 골보르네는 2013년 칠레 대선 때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의 위기관리 능력이 주요 외신에 소개돼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등에서 리더십 특강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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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칠레 광업부 장관


라우렌세 골보르네의 가장 훌륭한 점은 기존에 강조되던 팀워크가 아닌 ‘즉각적 팀 구성과 협동성’을 최대한 발휘한 리더였다는 사실이다. 칠레 광산 붕괴는 전무후무한 사고였으며 벤치마킹할 만한 참고 사례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자신과 기존에 함께 일하던 사람뿐 아니라 미국, 호주, 오스트리아의 시추 전문가 등 외부 인력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상황에 최적이라고 판단되는 방식으로 즉석에서 팀을 꾸린 것이다. 팀은 구조를 위해 드릴로 구멍만 뚫는 팀, 구출 방법과 전략을 짜는 팀, 광부들이 구조된 후 이들의 생명을 유지시킬 팀, 광부들의 가족문제만을 담당하는 팀 등으로 나뉘었다.

명확한 목표를 갖고 최적화된 팀을 꾸린 골보르네 팀도 중간중간 시행착오를 겪었고, 위기의 순간도 맞이했지만 이를 빠르게 분석해 방해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원 구조의 목표를 달성했다.

칠레광산 사고 4주년, 세월호 참사 6개월을 맞이해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15일 라우렌세 골보르네(Laurence Golborne) 전 칠레 광업부 장관을 독점 인터뷰 했다. 매경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에 들른 그는 재난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한 전무후무한 사례로 손꼽히는 칠레광산 사고의 노하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또 그는 한국의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이런 큰 슬픔을 통해서 잘못한 것을 인정해야 하고 예방 할 방안을 찾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죽은 사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출구를 가로 막은 70만톤의 바위, 90%의 습도, 섭씨 32도의 온도, 광부 10명의 이틀치 식량, 기름이 떠다니는 산업 용수, 700미터 아래속 33명의 광부. 사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2010년 8월 5일, 광산이 붕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정은 어땠나.

=당시에 비행기를 타고 긴 여행을 가고 있었는데 대통령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칠레 산호세 광산이 무너졌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4군데 도시를 거쳐 겨우 새벽 2시에 현장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갖힌 광부를 빼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광산에는 이들을 빼낼 만한 시설이 없었다. '아 이거 엄청 늦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부 가족들과 친지들은 이미 사고현장에 있었지만, 매우 절망한 상태였다. 우리는 광산 사고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무기력한(impotence) 상태였다.

-현장 상황은 어땠나.

=많은 루머와 혼란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정보가 없었다. 뭘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절망했다. ‘광부들이 전부 다 죽었다’ ‘일부는 빼서 딴 데로 옮겼다’ 등의 루머들이 떠돌았다. 가족들의 불안감이 증대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이 일을 주관하겠다고 했다. 2시간 마다 가족들이 있는 ‘희망의 캠프’를 찾아갔다. 수색의 진전이 있든 없든 2시간 마다 지금 상황을 꼭 설명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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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칠레 광업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들이 당시 뜨거웠던 현장의 열기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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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을 구출할 캡슐에서 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장관이 내리고 있다.

-칠레 광산사고 광부 구출 작전은 기존 팀의 팀워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합한 최고의 팀을 즉각적으로 구성해 협동성을 끌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출작전을 실행하는 팀을 비롯해, 응급처치 담당팀, 실종자 가족 전담팀, 언론대응팀 등이 모두 당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장관이 되기 전에 기업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많이 도움이 됐다. 나는 한 기업에서는 재무담당최고책임자(CFO)로서, 또 다른 회사에서는 최고경영자(CEO)로 일했다. 조직을 운영하고 하부조직의 라인을 관리하는 것을 잘 할 줄 알기 때문에 팀을 조성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전력 회사에서 CFO로 일한 뒤, 소비자 제품 회사에서 CEO를 역임했다. 골보르네 장관에 따르면 소비자 제품 회사 CEO 시절, 2000년 당시 매출 1조 원, 직원 9000명의 회사를 2008년 퇴직 당시 매출 10조원 직원 10만명의 회사로 키워냈다.) 광부 가족들을 재우고 애들을 학교로 보내기 위해 가족들을 돌보는 팀이 필요했고, 구출된 광부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팀, 그리고 구조 자체를 하는 테크니컬 팀 등 필요한 팀들을 즉각 구성했다.

-지상과 광부를 잇는 구멍 세개가 뚫리고 구멍에 들어가는 지름 10cm의 튜브에는 비둘기를 뜻하는 팔로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팔로마를 통해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카메라였다. 상황을 보여줘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는.

=이런 비극적 상황에 사실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무척 예외적인 상황이다. 별에 별일이 다 있을 수 있으니까. 더구나 라이브로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일정 부분 위험 부담을 가지고도 감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중계를 한 이유는 사람들의 목숨이 중요했기 때문에 중계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필요했다.

-처음부터 작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탄광 길을 따라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터널을 통해서 사람을 내려 보냈다. 그러나 너무 위험해서 포기했다. 탄광 안에서 구출을 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구멍을 뚫기로 결정했다. 사람이 캡슐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구멍들을 뚫어야 했기에 (10평 만한 인터뷰 룸을 가르키며) 크게 구멍을 뚫었다.

-그러다 매몰 17일째가 되던, 8월22일 매몰된 광부들을 찾았다.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행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멍을 뚫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루에 50~70미터 밖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일이나 걸렸다. 드릴을 700m를 뚫었다가 올리는 것만 해도 6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드릴 끝에 스프레이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옆에 물어봤다. “이거 원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나?” “아니요" 원래는 페인트가 없었다. 그럼 이건 사람들이 있는 거다. 너무 흥분해서 또 살펴보니 드릴 끝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우리들 33명이 모두 살아 있다” 모두 다 흥분했다. 그 전에는 (내 장관 자리에) 아무도 있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이 자리에 있고 싶어했다.(웃음) 그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나머지 날들은 그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기계와 자금 문제였다. 그날부터는 판 구멍을 통해 식량과 의료를 지원했다. 또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심리적인 지원과 통신장비를 내려보냈다. 영상 통화도 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10월 12일~13일 마지막 이틀 동안은 잠도 안자고 총력을 기울여 광부 33인과 구출인원 6명 등 총 39명을 모두 구출했다. 달 착륙 다음으로 전세계 15억 명의 인구가 이번 구출 영상을 봤다고 들었다. 48시간 잠도 못자고 기뻤지만, 끝나고서는 졸음이 몰려와 자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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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출된 광부 한명이 자신의 가족과 뜨겁게 포옹을 하고 있다. 뒤에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있는 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장관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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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칠레 광업부 장관 뒤로 칠레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수색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17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 와중에 기계가 부러지기도 했고 우리가 찾는 방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다. 겨우 내려가보니 그 사람들이 있는 방이 아닌 다른 방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잘 찾아서 가는 것이었다. 구조의 키는 엔지니어였다. 계산을 하고 했는데도 비켜가고 다른 곳으로 가기 일쑤였다. 축구에서 바나나킥 하듯 추를 꺽어가며 땅을 파들어갔다. 17일째 되니 가족들이 짜증도 냈다. 초조해졌다.

-구조팀과 지질학자들은 700m의 암반을 뚫는데는 3~4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빠른 시간에 구조했다. 시간을 단축하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나.

=재앙상황을 다룰 때는 기대감을 감안해서 말해야 된다. 처음에 구멍을 뚫기 전에는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날짜를 보수적으로 이야기했다.

-현장으로 달려간 당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부 가족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모든 책임을 감수하기로 하고 대통령을 설득해 가족들의 믿음을 얻어냈다고 들었다. 광부 가족들에게 당신은 어떤 말을 했나.

=전체적으로 정책을 투명하게 집행한 것이 컸다. (이 대목에서 골보르네 장관은 '투명성'(transparency)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광산 붕괴 이틀 째 날, 산이 흔들리면서 구조대원들이 뛰쳐나왔다. 먼지 투성이로 나오더니 “장관님”하고 내 손을 붙잡았다. “저희 작업 더 하면 죽습니다”라고 말하며 울었다. 광부 가족들과 2시간 마다 이야기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숨김 없이 말했다. 그 가운데 한 광부의 딸 두명이 나를 올려다 봤다. 눈물을 계속 흘렸다. 나도 그 순간에 눈물이 났다. 마음이 벅차서 이야기를 못했다. 쉬었다 이야기 하기를 반복했다. 아마도 그 순간에 장관도 그 사람들만큼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믿은 것 같다. 그런 마음까지도 투명하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이 꾸린 팀이 처음부터 잘 된 건 아니었다. 돌발변수가 생기면 현장 전문가들 의견을 반영해 즉각 수정해나갔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모든 상황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을 믿어야 한다. 광산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 역할을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그들을 믿고 기회를 줌으로써 유연성을 유지했다. 재앙이 있을 때는 여러 부류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일을 잘 헤쳐나가려면 코디네이션, 즉 조정 능력 그리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협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광부들 구출 이후 한 광부의 기록지를 놓고 출판 전쟁이 벌어지고 했고, 생존한 광부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리얼리티쇼가 됐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들이 가진 휴대폰 MP3, 시계들은 실시간 광고판으로 전락했다는 말도 나왔는데.

=이런 일에는 경제적인 면이 꼭 연결되는 것 같다. 요즘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이미 책도 나왔고, 올해 말에 할리우드 영화도 나온다. 정부에서는 되도록 이러한 이익이 광부들에게 조금이라도 갈 수 있도록 했다. 배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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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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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세 골보르네 전 칠레 광업부 장관

-이번 한국의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한국의 세월호 구조에 있어서는 칠레 광산사고 때와 달리 '콘트롤 타워'가 없었다는 점이 많이 지적됐다.

=큰 재앙이었다. 내부적인 사항들은 세세히 알 수 없지만, 이런 큰 슬픔을 통해서 잘못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잘못한 게 무엇인지 인지하고 다시 되짚는 과정을 통해 예방 할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지난 것은 돌아올 수 없다. 다만 과거를 통한 배움이 있어야 한다. 죽은 사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초기 대응이 너무나도 미숙했다. 단원고 학생이 전원 구조됐다는 오보가 알려졌다. 재난대책본부가 꾸려졌지만 실종자 집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혼선을 빚었다. 투입되지도 않은 잠수부가 300명이라고 보도되거나, 생존자들이 숨 쉴 수 있는 에어포켓이 존재한다며 공기를 투입하는 일도 벌어졌다.

=도덕적인 차원은 물론이고 합리적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미디어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는 스마트폰도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숨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있는 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간혹 테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상황에서는 일부러 말을 안할 수는 있으나 그런 상황 외에는 모든 상황을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

-당신은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노스웨스턴과 스탠포드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것으로 안다. 민간 기업의 엔지니어 출신으로 정치 경력이 전무했는데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대통령이 내각을 구성할 때 모든 장관들을 전문가들로 꾸렸다. 집권 중후반에는 정치인과 전문가를 반반으로 했지만, 초기에는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전문가로 했다. 당시에는 대통령과 잘 맞아서 했다. 처음에 정치를 시작해서 쉽지는 않았다. 익숙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광산 사고를 통해 정치적 자산이 생겨 그 이전보다는 장관 업무를 수행하는데 훨씬 수월해지긴 했다.

-팬 사이트가 생겨났고 당신의 사진을 넣은 셔츠도 판매되기도 했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이번 광산 붕괴사고 대처능력에 대해 91%가 지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 지난 대선에는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다시 대통령에 도전할 생각이 있는가.

=원래 나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장관 시절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기여를 했지만 정치는 내 영역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은 사외이사 활동을 여러 군데 하고 있고, 사업도 고려하고 있다. 제일 기대하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내 딸이 한달 후면 애기를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조만간 할아버지가 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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