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1)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1)
 
(After the Fall :20 Years Later In The Former Soviet States)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기사입력: 2012/12/23 [04:3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이 글은 전국노동자정치협회(http://lmagit.jinbo.net)에서 발간하는 '노동자정치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외부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_ 편집자 주]


출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의 정기간행물 <공산주의자(THE communist)> 2012년 겨울호
http://www.plp.org

 

편집자 주: 이 글은 미국 진보노동당(PLP)에서 쏘련 및 동유럽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이후 20년 동안의 인민들의 삶이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우리는 이 글을 번역해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것이다.
 


2009년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일은 유럽과 미국 자본가들의 자축이라는 향연의 시작으로 기념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쏘비에트 연합의 붕괴는 “역사의 종말1)”인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승리2)로 새겨졌다. 뉴욕타임즈는 “공산주의 체계의 공허함이 폭로되었다.”고 선언했다. “권력과 정치적 계산”은 “자유라고 불리는 한결같은 열망에 의해 압도3)”당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성대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거대한 도미노가 한 줄로 설치되었고, 전직 폴란드 대통령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첫 번째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동안, 미국 밴드 본 조비는 “우리는 복종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4)라는 노래를 불렀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쏘련 붕괴는 엄청난 후퇴로 기록된다. 노동자들이 한탄해하는 동안 서구 자본가들은 스스로를 축하였다. 동독의 한 금속 노동자는 “나에게 미래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공산주의 시절에 내가 더 잘 살았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붕괴 직후, 모스크바 병원의 한 의사는 “2년 전과 삶이 달라졌다 - 나는 한 인간이었다.”라고 했고, 새로운 “자유”가 감사한지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무엇을 위한 자유? 포르노 잡지를 살 자유?”라고 답했다. 심지어 열렬한 반공주의 학자인 앙겔라 스텐트(Angela Stent)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황이 공산주의 때보다 악화되었다”라고 인정해야 했다.5)

진보노동당(The Progressive Labor Party)은 쏘련(그리고 공산주의 중국)이 자본주의로 복귀할 운명에 처하도록 만든 정치적 약점에 대해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6) 하지만 쏘련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성과들은 그 패배를 비통한 것으로 만들었다. 맨 처음 노동자 국가의 창조는 모든 사회의 정치, 경제적 기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선구자들이 그러하듯, 쏘련 공산주의에는 많은 실수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는다.7) 그러나 사람들은 쏘련의 거대한 성과, 여성권리의 신장, 쏘련 내외부에서의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사회안전망 형성, 세계 최고의 무상교육과 건강 보호 체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찌를 물리친 거대한 노력과 희생 때문에 쏘련을 기억한다.

쏘련이 붕괴되었을 때 그것은 1956년 쏘비에트 공산주의를 처음 공격했던 흐루쇼프 이래로 변화되어 왔던 경제, 사회적 관계의 질적인 변동을 나타냈다.8) 1980년대 쏘비에트 지도력은 완전히 부패했고, 수정주의적이었으며, 많은 관료들(특히 옐친이나 푸틴 같은)이 쏘비에트 이후 러시아 자본가 계급을 형성해 왔다는 점이 증명된다.

1930년대에 세워진 기관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분명히 타락한 상태에 있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1년까지 진행된 쏘련의 붕괴는 구 쏘비에트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했고 자본주의 자유 시장으로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과거 쏘비에트 블록의 인민들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켰다. 기대 수명이 줄어들었고, 실업은 급상승했으며,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대다수 노동자 계급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억압이 진행되었다. 쏘련 붕괴 20년 후, 한 때는 세계 최고의 노동자의 국가였던 쏘련에서의 자본주의의 영향을 평가해 여기 담아보았다.


쏘비에트 경제의 붕괴

서구 선전에서는 자본주의가 동유럽 시장을 자유롭게 해주며 침체되고 불필요한 관료적 쏘비에트 경제에 활력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에서는 쏘련의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가 결핍을 끝내 주고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수십 년 동안 CIA의 통제를 받는 ‘자유 유럽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들을 이용해 왔다. 진실은 완전히 그 반대에 있었다.

헝가리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개방된 처음 몇 달 동안 생필품의 가격은 30%가 치솟았고 순식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으로 추락했다. 생활수준에서의 이러한 극적인 추락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헝가리 공산당이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장 개혁의 추구(이른바 “굴라쉬 공산주의(편집자 주-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며 헝가리에서 자유시장 요소를 도입하던 것을 말함)”)라는 경향의 한 부분이다. 1980년대의 시장 경제로의 변화 이후에 두 가지 일을 같이 하는 노동자는 70%가 증가했고,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8.5 시간에서 14.5 시간으로 뛰었다. 20%의 빈곤선 이하의 생계인구와 더불어 1990년대까지 증가한 것은 오직 가난한 사람의 수였다.9)


사진: 쏘비에트 노동자들의 새로운 광경, 모스크바에서 실업자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자유 시장 천국”으로 들어선 처음 2년 동안 러시아에서 실업자 수는 1백만에서 8-9백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1993년까지 숫자는 1500만 명에 달했다.10) 1996년도까지 러시아에서의 생활수준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쏘련에서 4:1 수준의 빈부격차는 13.5:1로 늘어났으며, 남성의 기대 수명은 57세 까지 줄어들었다. 농업의 사유화는 생산의 하락으로 이끌었고 1995년 러시아는 30년 만의 최악의 작황을 거두었다11). 러시아에서 버려진 어린이는 과거에 거의 없던 수준에서 1998년까지 2백만 이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정신과의사협회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증가하고 있는 집 없는 아이들 중 자살률은 놀랍게도 10%에 달한다!12) 모스크바 경제 분석 기구의 대표는 자본주의가 성숙해 온 6년 동안의 일반 민중들의 느낌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악화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안정성도 없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13) 라고 정리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의 “패배”의 상징이 된 동독에서는 한 달에 25-50달러씩 하던 임대료가 솟구치자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1945년 이전 동독 지역의 여러 부동산을 소유했던 서독인들이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보상청구를 하여 수많은 동독의 가정이 위협 받았다. 제기된 청구의 상당수는 나찌이거나 나찌의 상속인이었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청구를 제기했을 때에는 청구 기간이 이미 지나버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동독에 대해서는 2백2십만 건의 청구가 제기된 반면 서독에 대한 청구는 한 건도 수락되지 않았다.14)

사람들은 서독을 통해 여행하면서 엄청난 가난과 노숙 상태가 단지 쏘비에트의 선전 속에서 창작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점점 불안함을 느끼게 되었다.15) 2009년 독일의 스피겔(der spiegel) 주간지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기 이전까지는 생존, 가난과 거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독일민주공화국(GDR-동독)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신에게 감사”한다고 했던 한 동독 노동자의 말을 인용했다.16)



서독의 합병 직후 동독의 사회학자들은 불안한 경향에 주목하였다. 자유 시장 천국에 들어서게 된 “즐거움”은 1989년 동독의 천 명 당 12명이던 조출생률(편집자 주-1년간의 출생수를 그해의 중앙인구 1,000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인구 출생률)을 1993년에는 천 명 당 5.1명으로 감소하도록 했다. 이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가장 큰 감소율이며, 2차 대전에서 패배 이후 나찌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서 보다 높은 것이다. 한 연구자는 오직 “대파국의 시기, 절망적 궁핍과 사망이 만연한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출산 감소라고 말했다.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은 출산율의 감소라는 경향의 한 측면이다. 동독에서 낙태가 합법적이고 서독에 비해 덜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갑작스런 낙태의 증가가 “자유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동독 여성들 사이에 냉소적 태도가 확대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7)

쏘련 붕괴 10년 후 과거 쏘비에트 국가들에서 빈곤층의 숫자는 천4백만 명에서 1억6천8백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90년에 비해 12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들 빈곤층중에 어린이들이 5천만을 차지한다. 2000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88%의 인구가 빈곤선 이하에 있었으며,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몰도바에서는 60에서 66%가 빈곤선 아래에 있었다.18)

동유럽 경제의 파괴는 단지 이행 기간 동안에 국가 상태에서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건설하고 소유한 쏘비에트 산업을 빼앗으려는 동구 자본가(대부분 과거 공산당의 당 관료들)와 제국주의 시장을 찾으려는 서구 자본가들의 의식적인 계획의 결과이다.

1990년에 통화연맹은 통화 교환비율을 4.5:1(동독의 4.5 마르크가 서독의 1 마르크와 같은 비율이다)에서 1:1로 바꾸어 하룻밤 만에 동독에서 450%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상품가격 상승은 동독에서 39%를 차지하던 수출 시장을 파괴했고, 그 결과 전반적인 경제 침체를 가져왔다. 동독에서 공적소유로 되어있던 사회기반 시설을 경영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신탁통치는 재산을 가능한 싸고 빠르게 처분했고, 일부 공장은 1마르크 수준의 헐 값으로 팔았다. 동독의 모든 산업과 기반시설은 노동자 계급의 소유였으나 신탁통치에서의 떨이 판매로 그 중 85%가 서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고, 10%는 잡다한 외국 자본의 소유, 5%는 동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다.19)


사진: 리가 지역 기계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휴식(1976). 쏘비에트 블록에서의 작업장은 공동체와 사회의 중심이었다.

총 3400개의 공장, 520개의 거대 건설 회사, 465개 협동조합, 수 천 개의 소기업이 모두 사유화되었다.20) 동독 산업과의 경쟁에 지친 서독 자본가들은 그들이 구매했던 사업과 공장 문을 닫았다. 문을 닫지 않은 곳에서는 현저하게 노동자 수가 감소되었다. 예나 지방 차이스(Zeis) 광학렌즈 공장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20,000명의 노동자를 2,000명으로 줄였다. 720,000명의 농업 노동자(전체의 80%는 동독에 있다)가 집단농장이 붕괴 되고 사유화되면서 해고 되었다.20) 동독 산업에 대한 이러한 공격의 결과로, 세계 10번째로 큰 산업 국가였던 동독은 고작 40번째 규모의 산업 지역이 돼버렸다.21) 합병 15년 후 동독의 실업률은 18%로 남아있고 이는 서독의 두 배가 된다.22)

이와 비슷한 정책들이 동유럽 전체에 시행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보호주의의 잣대로 더 경쟁력 있는 상품(철강, 농산물, 섬유)은 봉쇄하고 서구 상품이 경쟁력 있는 이익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구 쏘비에트 연합에 대한 시장 문을 개방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그 첫 해에 개발 계획에 투자하기보다 화려한 사무실이나 가구에 더 많은 돈을 썼다. 이후 유럽부흥개발은행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동유럽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동-서 합작 사업에만 투자를 하였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유럽의 Phare(폴란드-헝가리 경제구조지원)프로그램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서유럽 회사에만 재정 지원을 하였다. 서구 지원의 90%는 서방 기업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9년에는 동유럽에서 10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보던 것이 1993년에는 80억 달러의 적자로 뒤바뀌었다.23)

동유럽의 자본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적절하게 착취하는 법을 서구에서 배웠다. AFL-CIO(미국노동총연맹산별노조회의)의 자유무역조합기구(FTUI- CIA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구 쏘비에트 국가들에 여러 지부를 개설하였다. 그 곳에서 노동자 운동을 분쇄하는 적절한 방법들을 고용주에게 가르쳐 주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전복되고, 해체되었고, 패배했으며 체포되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1990년 미국문화정보국(USIA) 수장인 브루스 겔브(Bruce Gelb)는 구 쏘련에 제공하던 전문가 훈련에 대해 언급했다. “독사, 흡혈귀, 중개인- 쏘련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나라가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다.”24)

서구 자본가들의 지원 속에서 러시아 고용주들은 쏘련 붕괴 직후 5년 동안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을 30%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1996년까지 미지불된 임금은 40조 루블(7.5조 달러. 편집자 주 : 현재 40조 루블이 환율로는 1조 2천억 달러 가량이라 원문에 나온 7.5조 달러 수치는 96년 환율이라 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은 수치일 수 있다.)가 넘었고 러시아의 모든 노동자들의 평균 한 달의 임금을 받지 못하는 양에 달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질(Zil) 공장에서 일하는 한 자동차 노동자는 “나는 노동자들을 돌봐주는 국가에서 성장했었다.”라며 한탄스러워했다. 한 섬유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그들은 그 누구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존엄성을 빼앗아 갔다.”라고 말했다.25)




-다음호에 계속 -
(CCL: '저작권자표시', '비영리 사용', '동일조건변경허락')


----------------------------------------------------------------------------------------------------------
1. “역사의 종말”은 지배계급과 한패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발간된 후 유명한 승리의 외침이 되었다. 책에서 후쿠야마는 인간은 사회-문화 진화의 끝에 도달했고 자본주의는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 또는 전쟁 후 역사의 특정 기간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 그 자체,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며 인류 통치 형태의 마지막인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보편화이다.”

2. 가짜 좌파에게 쏘련의 붕괴는 환영할 일로 기록된다. 영국 뜨로츠키 그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맑시즘 2009 행사에서 상당한 부분을 쏘비에트 공산주의의 사망을 기념하는데 할애했다. 붕괴를 거대한 “발전”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에게 가져다 준 압도적 가난과 격렬한 인종주의와 성차별, 너무도 많은 수백만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어 보였다. 물론 1928년 이래로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의 파괴를 목표해 왔기 때문에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3. NYT, “A Fateful Day, and the East Tasted Freedom,”11/8/09.

4. Der Spiegel, “Berlin Celebrates the Day the Wall Fell,”11/9/09.

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7), p 116-117; NYT, “reacherous Transition,”12/20/93.

6. See PLP, “Road to Revolution III,”available on the website, www.plp.org

7. 당은 쏘련의 역사와 교훈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해 왔다.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8. 경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던 흐루쇼프의 시장개혁 정책은 실제로 쏘비에트 경제의 침체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점차 하나씩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연속이었으며 이는 쏘비에트 경제를 내부에서부터 악화시켰다.

9. NYT, “Many Living on the Edge from Hungary’s Inflation,” 2/27/90.

10. NYT, “Soaring Unemployment is Spreading Fear in Russia,” 5/8/94; Vladmir Bilenkin, “ussian Workers Under the Yeltsin Regime: Notes on a Class Defeat,”Monthly Review, Vol. 48 No. 6, January 1996.

11.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ß 6/16/96.

12. People’ Weekly World, “People Before Profits: Capitalist ‘emocracy’–Life in the Former Soviet Union; Wages, Pensions, Public Health, Education are all Devastated,”12/23/05.

13.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 6/16/96.

14.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ß Paradise: Socialism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What Can We Learn From It? (London: Artery Publications, 2009), p 41.

15. Patty Lee Parmalee, “Learning to Live With Capitalism in East Berlin,”Z Magazine, Vol. 5 No. 7-8, July/August 1992.

16.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7/3/09.

17. Nicholas Eberstadt, “Demographic Shocks After Communism: Eastern Germany 1989-1993,”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 20 No.1, March 1994.

18. BBC, “Child Poverty Soars in Eastern Europe,”0/11/00.

19.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 Paradise, p 38-40.

20. 같은 책, p 39-41.

21. People’s Weekly World, “Another View of ‘Lives of Others,’3”6/1/07.

22. Der Spiegel, “The Price of a Failed Reunification,” 9/5/05.

23. The Guardian, “When the East’ Dreams Evaporate,”11/19/94.

24.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5.

25.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출처 : 노동자정치신문
http://lmagit.jinbo.net
http://twitter.com/labor04 (@labor0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