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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나야 통일? 그들에게 평화는 죽을죄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4> 조봉암과 진보당, 열두 번째 마당
김덕련 전 기자2015.06.28 12:19:08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조봉암과 진보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평화 통일론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분단 상태임을 생각하면, 평화 통일론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와도 직결돼 있다. 이러한 평화 통일론을 찬찬히 짚었으면 한다. 우선 조봉암은 언제 평화 통일론을 명확하게 제시하나.
 
서중석 : 조봉암이 평화 통일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건 1956년 대통령 선거 시기다. 이때 말 자체도 평화라는 말을 써가면서 제시했다. 평화 통일론은 대선 후 진보당이 결성될 때 진보당의 핵심 내용이 됐다. 진보당 하면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조봉암, 진보당의 중요한 정치적 모토였다.
 
1950년대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평화 통일론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 평화 통일은 당연히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다. 심지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활동한 현대사 연구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돼 있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 시기에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연구도 꽤 있었고 석사 논문도 몇 개 나오고 그랬는데도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평화 통일론이 대단한 것 같지 않다고 여긴 그 시기에 진보적 연구자들이 주목한 건 진보당 통일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이던 김기철이 쓴 '북한 당국의 평화 공세에 대한 진보당의 선언문'이었다. 통일을 위한 선거를 감독할 국제감시위원회 설치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글인데, 이름이 '진보당의 선언문'으로 돼 있어 이걸 진보당의 진짜 정책이라고 잘못 알고 쓴 논문도 여러 개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법원 판결문 같은 걸 쭉 읽어보거나 조봉암, 박기출 같은 사람들이 언급한 걸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진보당 하면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것 같다고 여기고 '이 정도면 대단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연구가 나왔던 것이다. (김기철의 '선언문'은 통일에 관한 진보당의 공식 정책이 아니라 김기철 개인의 방안이었다. '편집자')
 
중요한 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1950년대에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1950년대 상황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북진 통일만을 강변하던 시대, 평화 통일은 두려운 말이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이 1956년 이전에 쓴 글들 등에서도 북진 통일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1956년 대선에 와서야 평화 통일론을 이야기한 것인가.
 
서중석 :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가운데서 쭉 지적했지만 조봉암이 1954년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 과업'이라는 유명한 글에서도,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평화 통일이라는 말을 얼마나 쓰고 싶었겠나. 그러나 끝내 쓰지 못했다. 심지어 1955년 12월 진보당 발기 취지문과 강령 초안을 발표할 때조차도 평화 통일이라는 말을 못 썼다. 그러다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들어오면서야 이 말을 쓴 것이다. 사실 진보당 창당 이후에도 일부 당직자, 당원들은 '참 무서운 말인데 그 말 좀 안 썼으면 좋겠다. 불안하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는데 그건 나중에 사실로 입증이 된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처음에는 조봉암과 같이하던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의견을 달리해 민주혁신당을 만든다.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당이었는데, 그 강령은 이동화라는 분이 만들었다. 이동화는 당시 대단히 탁월했던, 최고의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이 진보당이건 민주혁신당이건 강령을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정책은 민주혁신당의 경우 신도성 등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명확하게는 안 나와 있다. 그런데 민주혁신당은 강령이건 정책이건 평화 통일이라는 말을 싹 빼버렸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 말이 무서웠던 것이고,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요즘 젊은 세대 중 상당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평화 통일이 두렵고 무서운 말로 여겨졌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것 같다. 그 말을 왜 그토록 금기시한 것인가.
 
서중석 : 1950년대 내내 한국 사람들은 북진 통일 운동에 동원됐다.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도 "반공, 방일(防日), 북진, 통일" 이렇게 많이 외치고 다녀야 했다. 그런 북진 통일론을 알아야만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무서운 말이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1949년에 북진 통일을 강하게 주장했다. 전쟁 와중에도 북진 통일을 해야 한다는 걸 여러 차례 강조하고 학생들 등을 동원해서 북진 통일 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북진 통일 운동이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건 아이로니컬하게도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부터다. 휴전 협정 체결 몇 개월 전부터 그야말로 대대적인 휴전 협정 반대 북진 통일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북진 통일 운동은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중립국 감시 위원단 철수 운동으로 벌어지는 때도 있고, 1959년에는 2월부터 10월까지 거의 1년 동안 재일 교포 북송 반대를 내걸고 북진 통일, 반공·반북 운동이 벌어진다. 이처럼 북진 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 시기를 대표하는 동원 운동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이 대대적으로 북진 통일 운동을 전개한 까닭은 무엇인가.
 
서중석 : 그런 데에는 월남한 사람들이 당시 사회 각 계층의 중요한 위치에 적잖게 있었는데, 이 사람들 사이의 공감대가 북진 통일 운동 속에서 형성된 면이 있다. 다는 아니더라도 반공적인 월남 인사들은 북진 통일을 해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 이와 더불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북한하고 전쟁까지 험악하게 치렀는데 평화 통일이 가능하겠나. 있을 수 없다. 통일한다면 북진 통일밖에 방법이 없지 않나', 이런 주장도 실제로 나오는 분위기였다.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북진 통일 운동에 끼친 영향이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다. 북진 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 그리고 남북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깊이 관련돼 있었다. 1946년부터 단정 운동을 펼친 세력이 통일을 주장할 때는, 논리적으로 볼 때 북진 통일 이외의 다른 통일은 주장하기가 힘들게 돼 있지 않나. 그들로서는 북한과 어떤 타협, 교류, 접촉을 한다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북한은 그들에게 괴뢰였기 때문이다. 절대로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되는 세력으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진 통일을 해서 북한 공산주의 세력을 내쫓는 길 빼놓고는 방법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 즉 90퍼센트가 넘는 이들이 당연히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기 아닌가. 이승만 정권도 거기에 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세력이 보기에는 북진 통일밖에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북진 통일 운동을 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 1953년 8월 북진 통일 학생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명심하자 6.25"라고 적힌 대형 그림을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승만 정권이 북진 통일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속내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북진 통일 운동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어떤 효과를 노리고 그렇게 한 것인가.
 
서중석 : 1954∼1955년에 반일 운동이 벌어지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반일 운동의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망할 때까지 반일 운동을 계속 펼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북진 통일 운동에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여러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북진 통일 운동이 전시 체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긴장을 고조하는 역할을 아주 효과적으로 해냈다는 것이다. 그때는 청량리 옆에 있던 성동역이라는 곳에서 춘천 가는 기차가 떠나고 그랬는데, 여기서 북진 통일 궐기 대회가 많이 벌어졌다. 예컨대 수천, 수만 명이 모인 데에서 일부 사람들이 막 혈서를 써가면서 '북진 통일을 하자. 우리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모두 한마음으로 뭉치자.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을 따라 북진 통일을 하자', 이렇게 외쳤다. 그건 당장 전쟁을 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내쫓자는 주장이고, 이런 과정을 거쳐 열띤 전시 체제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혈서를 쓰면 그런 분위기가 더 고조되지 않나. 그러면서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 그분이 강하게 부각되는 면이 있다.
 
그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져온다.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것이다. 윤천주 교수는 초기에 쓴 논문에서 북진 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에 엄청난 힘을 가져다줬다고 지적했다. 1953년 북진 통일 운동이 벌어지면서 국회의원들 상당수가 자유당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것 등을 사례로 들면서, 북진 통일 운동이 이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와 동시에 북진 통일 운동은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반공, 방일, 북진, 통일" 및 중립국 감시 위원단에서 적성국 철퇴(撤退) 요구, 재일 교포 북송 반대 같은 것들은 모두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북진 통일 운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효과가 있었는데,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게 또 하나 있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이전부터 계속 이야기한 것처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던 195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통일이 빨리 돼야 한다. 통일은 곧 되겠지' 하는 통일 염원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분단 세력으로선 분단을 고착화해야 하지 않나. 여기에서 북진 통일론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분단을 고착화하고 분단 체제라고 할 만한 현상을 가져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전시 체제로 연결될 수 있는 '북진 통일을 하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 길밖에 없다', 이런 논리가 엄청난 군중 동원을 통해 위력을 발휘할 때 평화 통일이라든가 다른 통일 방법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북진 통일 말고 이런 방법도 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표현을 쓰면, 북진 통일 방법을 제외한 모든 통일 논의를 금지한다고 할까 금압하는 역할을 이 북진 통일론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면 정권 때부터 '선건설 후통일' 이야기가 나오고, 박정희 정권 들어서는 1960년대 내내 통일 이야기를 상당히 제한했다. 그렇게 한 건 통일 논의가 극우 반공 세력을 혼란에 빠지게 하거나 약화시키고 그와 동시에 진보 세력, 민족주의 세력을 강화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1950년대에는 북진 통일론으로 통일 논의를 막았고 1960년대에는 선건설론으로 통일 논의를 막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염원이 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북진 통일과 3차 대전 외친 극우 반공 세력을 정면 비판한 평화 통일론
 
프레시안 : 평화 통일론은 당시 사회에서 어떤 효과를 거뒀나.
 
서중석 : 평화 통일론은 북진 통일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고 할까, 아주 무력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조봉암은 이렇게 외쳤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전쟁의 그 참혹함을 겪어야 했나. 전쟁 시기에 얼마나 어려움을 맛봤나. 그런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또 전쟁을 하자고 하는 건가. 평화적으로 남북 관계를 이끌어가야 할 것 아닌가.' 아, 이보다 더 센 말이 어디 있었겠나. 이것보다 가슴에 와 닿을 말이 어디 있었겠느냐, 이 말이다. 특히 자식을 군대에 보낸 사람들로서는 '전쟁이 또 일어나면 자식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봉암은 이런 주장도 했다. '세상에, 북진 통일로 통일을 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북진 통일로는 실제로 전혀 통일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엄청나게 중요한 지적을 하면서 허점을 찔러버렸다. 뭐냐 하면 '우리나라는 지금 총알 한 발, 트럭을 움직일 수 있는 휘발유 한 방울까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미국이 북진 통일을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 이 얘기였다.
 
당시 미국 없는 국방이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의 전적이었다. 그런 미국이 북진 통일을 절대로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건 한미상호방위조약 1조에도 명시돼 있었다. 북진 통일에 대해 미국은 이렇게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미국은 또한 이승만을 제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나. 그와 함께 유엔에서도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조봉암은 이처럼 전 세계가 평화 통일을 주장하지, 누가 북진 통일을 원하느냐고 지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진 통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고 싶어도 전혀 할 수가 없는, 즉 현실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통일을 해야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북진 통일론의 또 하나의, 그야말로 핵심적인 허점을 확 드러낸 지적이었다.
 
프레시안 : 1954년 미국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다. 그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북진 통일론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 3차 세계대전 주장과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논리였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만이 아니라 극우 반공 세력 전반에 퍼진 논리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조봉암은 어떤 태도를 취하나.
 
서중석 : 극우 세력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통일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승만 대통령뿐만 아니라 민국당, 민주당 중진들도 그런 주장을 했다. (예컨대 1956년 조병옥은 "1960년은 3차 대전의 발발 시점으로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신익희도 "미국이 원자탄을 들고 가서 만주니 시베리아니 모스크바니 할 것 없이 모조리 때려 부수면 우리의 통일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북진 통일은 남북 간의 전쟁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도 그랬는데,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자기 힘만으로 남쪽으로 쳐들어오거나 남한이 남쪽 힘만으로 북한으로 쳐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전쟁을 지지할 때에만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미국이 지지하거나 지원할 때에만 북진 통일이 가능한 구조로 돼 있었다. 한국전쟁이 그걸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고, 그 후 한국에서 벌어질 어떤 전쟁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북진 통일을 하자는 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3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하고 바로 연결된다.
 
그러나 조봉암은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건 조봉암,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이기도 한데 '핵이 평화적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현재 국제 정세에서 전쟁 무기로 이걸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이런 논리를 폈다. 소련이 1953년 수소탄 실험에 성공한 데 이어 19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려 우주 궤도에 진입시키지 않나. 또한 이 무렵 ICBM(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미국과 소련이 거의 같은 시기에 개발해냈다. 그런 속에서 핵의 균형이 이뤄졌다고 그 당시 정치학자라든가 핵 과학자들이 많이 이야기했다.
 
이런 속에서 '핵은 평화적으로 이용돼야 한다. 진보 세력이 이걸 이용할 수 있다'는 상당히 강한 믿음을 그 당시에는 갖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생각이었지만 그 시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전쟁 무기로는 이 핵이 쓰일 수 없다. 핵전쟁이 일어날 수 없게 돼 있다. 국제 정세를 볼 때 3차 세계 대전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북진 통일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북진 통일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조봉암은 폈다. 평화 통일론은 이런 점에서도 극우 반공 세력의 또 다른 허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 평화 통일론에는 북진 통일론을 무력화하는 힘이 있었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조봉암이 평화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이유
 
프레시안 :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통일된다고 강변하는 이들 눈에는 평화 통일을 말하는 것이 죽을죄로 비쳤으리라 본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평화 통일론을 제기한 건 커다란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조봉암과 진보당이 제시한 평화 통일론이 구체적인 실행 방안까지 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왜 그랬던 것인가. 당시 평화 통일론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평화 통일에 대한 호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시 그것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할 수도 없었고 북진 통일론과 달리 평화 통일론은 민중 동원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평화 통일 주장에 호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자식을 군대에 안 보냈다고 하더라도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면 그게 최상의 길 아니냐', 이런 생각은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분석 내용을 보면 '평화 통일 지지가 많았다', 이런 게 그 당시 신문 같은 데 나온다. 평화 통일은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평화 통일 주장은 막연하지 않았느냐는 논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조봉암은 '지금은 그 이상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 그걸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그게 뭘 의미하겠나. 우선 평화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김기철 안(案)도 그래서 당에서 심의하다가 그만둔 것이다. 이건 지금 심의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것만도 굉장히 버거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극우 세력을 깨는 데 그것처럼 효과적인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통일된다', 이런 생각을 그 시기 정치인들 중 누가 했겠나. 그런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당시 조봉암은 평화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프레시안 : 평화 통일론이 전쟁을 앞세우는 극우 반공 세력의 기반을 뒤흔드는 주장임은 틀림없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냉전 체제에 정면 도전했다고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시 평화 통일론은 반공(극우 반공 세력처럼 극단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을 밑바탕에 두고 있었고, 그것이 전제처럼 돼 있는 상태에서는 자본주의권과 사회주의권의 진영 대결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1955년에 열린 반둥 회의로 상징되는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흐름과는 그런 점에서도 결이 다른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엄혹한 시기였기에 사상을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매우 컸음을 감안해야 하고, 평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런 면이 분명 있지만,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서중석 : 냉전 체제에 도전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은 것 아니겠나. 사실 냉전 체제에 도전한 정치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조봉암은 역풍(逆風)의 정치인이라고 불렸다. 역풍에서 풍이라는 게 뭐겠나. 냉전 체제 아니겠나. 냉전 체제를 거슬러 그것에 도전한 사람이다.
 
역대 한국 정치에서 조봉암의 주장은 대단히 특이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조봉암은 자주성을 여러 선거에서, 그리고 정책에서 주장했다. 민족의 자주성을 견지하는 것을 아주 강조했다. 아울러 조봉암은 1946년 6월 조선공산당에서 이탈할 때부터 극좌, 극우를 외세 추종 세력, 사대주의자로 비판했다. 1956년 대선에서도 그런 주장을 폈다. 이런 모습은 나중에 노무현에 가서야 약간 비슷한 게 나온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 시절) 자주성 문제를 그래도 좀 언급하지 않았나.
 
그와 함께 조봉암은 1956년 대선 때 중요 정책 중 하나로 "집단 안전 보장 체제의 확립에 의하여 국방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주장은 15년 후에야 다시 나온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에 의해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나오지 않나. 1950년대에 이런 주장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을 굉장히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있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에서 조봉암과 진보당은 대체로 반둥 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로 상징되는 비동맹 운동을 연상케 하는 호혜 평등에 입각한 선린 정책을 내세웠다. 북진 통일론자와는 다르게 제3세계의 탈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과 독립을 지지했다. 모든 강대국이 무엇보다도 약소국에 대해 먼저 식민지적 지배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인도, 이라크, 이집트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데 이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3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도 만시지탄의 일이긴 하지만 민주 진영 강화를 위해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라크 혁명도 문제를 삼았고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에 대해서는 큰 의구심을 가지고 봤다. 이와 달리 진보당은 창당 대회에서 헝가리 민중의 자유 투쟁 지지 결의안, 이집트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반대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았나. 그걸 비판한 것이다. 이것도 당시 수구 반공 세력이 볼 때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라크 혁명은 1958년 이라크에서 군부를 중심으로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 문제는 1956년에 발발한 제2차 중동전쟁을 가리킨다. 그해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집트인을 위한 수에즈 운하'를 주장하며 이를 국유화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됐다. 군사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압도했지만 미국이 영국을 압박하고 소련도 이집트를 편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이듬해 점령지를 돌려주고 철군했고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의 주요 지도자로 떠올랐다. '편집자')
 
"피해 대중의 당"을 자임한 조봉암과 진보당
 
프레시안 :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은 평화 통일론과 더불어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 평화 통일론과 피해 대중론은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둔 조봉암만의 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피해 대중론은 조봉암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간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피해 대중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조봉암은 왜 진보당을 "피해 대중의 당"으로 규정한 것인가.
 
서중석 : 조봉암은 1955년 12월 22일에 발표한 진보당 발기 취지문에서 이미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56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을 때 "피압박 대중의 승리가 박두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은 모든 피압박 대중의 대표다",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전부 노농 계급투쟁을 강조한 것이라는 식으로 걸려든다.
 
진보당은 '피압박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 세력의 전위'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진보당이 발당식을 했을 때도 피해 대중의 당이라는 걸 명시했다. 이건 공산주의하고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례를 봐도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없다. 진보 세력의 정강 등에는 대개 '노동자, 농민, 진보적 소시민 또는 당하고 있는 여러 소수 세력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조봉암은 피해 대중이라는 걸 명시했다.
 
그러나 피해 대중에 대해 조봉암이 '이건 뭐다',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한 게 그렇게 많지는 않다. 다만 1957년에 한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피해 대중이라는 것은 공산 침략군에 의해서 민족의 다수가 생명,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과 함께 특권층 때문에", 이건 극우 반공 세력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국민 대중이 사실상으로 대중적인 수탈을 당하는 엄연한 현실에 입각해서 그 대중적인 수탈을 당하는 국민 대중이 피해 대중이다."
 
여러 문건을 가지고 볼 때 피해 대중은 피해 민중 또는 피해 인민(people)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봉암은 일제 때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피해 대중이 무지하게 많았지만 해방 직후부터, 특히 전쟁을 치르면서 대중이 아주 심각하게 피해를 봤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이런 걸 볼 때 조봉암은 극우 반공 독재 아래에서 억압당하고 빨갱이로 몰리고 수탈당하는 일반 대중을 피해 대중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1954년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 과업'에서도 조봉암은 학살당한 사람들, 국민보도연맹 관계자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이들을 피해자로 제시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주민 집단 학살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그런데 1950년대는 물론이고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조봉암을 제외한 다른 주요 야당 지도자들은 주민 집단 학살 문제를 명확히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게 볼 때 조봉암이 정말 목숨을 걸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서 평화 통일론, 피해 대중론과 더불어 수탈 없는 경제를 내세웠다. 수탈 없는 경제라는 구상이 1956년이라는 특정 시점에만 유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1950년대와 2010년대의 한국 경제는 그 상황이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2012년 대선 당시 주요 화두였던 경제 민주화도 수탈 없는 경제라는 구상과 이어지는 면이 많아 보인다.
 
서중석 : 일제 때 항일 독립 운동, 민족 해방 운동을 하던 모든 세력은 '한국인들이 일제한테 수탈당하고 있다. 독점 자본한테 수탈당하고 있다', 이런 말을 썼다. '다시는 수탈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 균등한 경제, 대중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경제를 계획성 있게 발전시키자'는 이야기를 조봉암이 했는데, 이건 일제 이래 한국의 독립 운동 세력, 진보 세력이 계속 강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래 몇 년 동안 갑을 관계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거기서 을은 수탈당한다고 할까, 당하는 사람으로 많이 규정되지 않나. 수탈 없는 경제와 그런 을에 속하는 사람들을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또 비정규직이라든가 많은 여성 노동자들처럼, 똑같은 노동을 하는데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도 이 수탈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노동을 해도 차별 대우를 받은 건 일제 때부터 아주 심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려오는 현상이지 않나.
 

▲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서 평화 통일론, 피해 대중론, 수탈 없는 경제를 내세웠다. 사진은 2013년 7월 31일, 망우리 묘지공원(서울 중랑구)에서 열린 조봉암 54주기 추모제 모습. ⓒ연합뉴스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단핵 원심 정당, 진보당
 
프레시안 : 대선을 치르고 반년이 지난 1956년 11월 진보당이 만들어진다. 진보당의 평당원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주요 지지층은 어디였나. 그리고 진보당 당원 수를 대개 '수천 명'으로 표현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다고 봐야 하나. 대중 조직들과 함께할 길이 사실상 막힌 상태에서 '수천 명'이 어떻게 구성됐을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진보당의 당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명부 같은 건 없다. 그런 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자유당도 어떤 때는 '100만 자유당' 혹은 '200만 자유당'이라고 내세웠고 박정희 집권기 민주공화당도 300만이라고까지 하는 경우도 나온다. 최근의 진보 정당 몇 개를 빼면 진성 당원이라는 게 있는 정당이 과거에 몇 개나 있었겠나. 물론 진성 당원이라는 말 자체도 한국적 현상이긴 하다.
 
그런 것 때문에 당원이 얼마였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사실 1950년대 후반에는 민주당원 노릇을 하기도 아주 어려웠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야당 당원이라고 하면 박해를 굉장히 많이 당했다. 민주당원이라고 하면 관공리 같은 게 되기가 아주 어려웠다. 형식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민주당원으로 활동한 사람도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진보당원이라고 하면 정말 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진보당원이라고 밝히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당을 지지한 사람 가운데 직접 당원이 돼서 당비도 내고 활동한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 되느냐, 이건 밝혀내기가 아주 힘들 것이라고 본다.
 
주요 지지층은 농민, 도시 소시민들이라고 볼 수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그 당시 큰 영향력이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 주민이 많았다. 그러나 이 경우도 사실 지식인이라든가 도시에 있던 불만 세력 같은 사람들이 진보당, 조봉암을 많이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진보당의 주요 간부들을 살펴보면 그 이력이 매우 다양하다. 그처럼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하나의 당으로 뭉치는 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서중석 : 진보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다. 예컨대 재정위원장 신창균처럼 독립 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남북 협상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총무위원장 장지필처럼 1920년대 중반부터 백정 해방 운동인 형평 운동을 오랫동안 펼친 사회 운동가도 있었다. 장지필 이 양반은 자신이 백정 출신이었다. 부간사장이던 이명하처럼 해방 후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
 
부위원장이던 박기출도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 사람은 의사 출신이었다. 그런데 박기출과 함께 또 한 명의 부위원장이던 김달호는 일제 때 판사였다. 1940년에 판사를 사임한 후 신사 참배를 안 한다는 이유로 변호사 인가도 못 받았고, 그래서 광산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조봉암과 제일 가까운 사람은 윤길중이었다. 그래서 간사장이라는 핵심 위치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일제 때 군수였다. '잘해보려 했다', 말하자면 '좋은 군수였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어쨌건 친일파 관료 출신이었다. 조봉암을 강력하게 떠받치며 '함경도 5인방'으로 불린 사람들(이명하, 김기철, 전세룡, 안준표, 조규희)도 사실은 다 제각각이었다. 그 5명이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1951년 대남 간첩단 사건에 걸려든 사람들을 봐도 다양하지 않나.
 
이 시기에 진보 정당 운동, 혁신계 활동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을 하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이념적으로 통일하기가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우선 같이하면서 그 속에서 취합하고 통일해나가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실 진보당 간부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됐겠는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대부분이 잘 모른 것으로 돼 있다. 1951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대해서도 이동화, 조봉암을 비롯한 몇 사람은 깊이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속에서 자유당, 민주당과는 선을 긋는 사람들이 조봉암 쪽으로, 진보당에 모였다고 볼 수 있다.
 
진보당은 조봉암 중심으로 돼 있었다. 한국 정치사를 보면, 한 개인 중심으로 돼 있던 당은 진보당 말고도 많다. '김대중당', '김영삼당'으로 세간에서 불린 여러 당이 있지 않았나. 진보당의 경우 조봉암 개인의 인기와 정치력에 더해 정치 이념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작용해 조봉암을 중심으로 규합됐다. 다른 이야기로 하면, 예컨대 부위원장이던 김달호와 박기출은 조봉암이 아니었으면 진보당에 올 턱이 없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사람은 당에 돈도 많이 낸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조봉암의 개성, 포용력, 정치력, 정치 이념 같은 것들이 진보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정태영(이 시기에 진보당원이었고 훗날 진보당에 대한 책을 쓰는 인물)은 진보당이 단핵 원심 정당, 즉 조봉암이라는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원처럼 돼 있는 정당이었다고 쓰기도 했다. 4월혁명 후 이 세력들이 다 흩어진다. 그런 면에서도 조봉암 때문에 하나가 된 당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진보당의 핵심은 비밀 조직? 극우의 극심한 탄압의 산물
 

ⓒ오월의봄

프레시안 : 진보당이 공개 조직만이 아니라 비밀 조직을 운영했다며 이를 주목한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90년대 초에 일부 진보적 연구자들이 진보당에 여명회, 7인 서클 같은 이상한 서클이 있고 그에 더해 특수 조직, 비밀 당원이 존재한 것에 주목했다. 1980년대에 권대복이 엮은 <진보당>이라는 책이 진보당 연구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일부 진보적 연구자들이 '여명회 등의 서클, 특수 조직, 비밀 당원 같은 건 참 대단한 것 아니냐'고 여기고 주목했다.
 
이처럼 진보 세력은 이런 조직 등을 눈여겨보면서 진보당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이와 반대로 이승만 정권이나 극우 반공 세력은 바로 이것들 때문에 조봉암을 색깔 있는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알고 보면 이것들은 그렇게 특별한 것, 진보 세력이 굉장하다고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수 조직이나 특별 당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진보당의 조직 준칙에 명시돼 있었다. 비밀 당원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극우 세력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보당 조직에 대한 집단적·개별적 파괴, 노출된 간부와 일반 당원에 대한 협박과 테러 및 직장 추방, 사업 방해 같은 파괴 공작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진보당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자유당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민주당은 진보당에 대한 테러에 침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평화 통일론 등을 문제 삼아 진보당을 강하게 공격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진보당 사람들은 노출된 당 조직에서 변성명(變姓名)을 사용해야 했고, 직장과 직업을 은폐해야 했고, 가능하면 당사에 접근하는 걸 피했다.
 
수사 당국이 비밀 당원이라고 표현한 당원은 바로 비노출 당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중 조직이라고 수사 당국에서 얘기한 것도 있는데, 그것도 사실은 당원끼리 학습 활동을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진보당의 특수 조직으로 주목받은 여명회와 7인 서클도 다 그런 것들이다. 여명회는 본래 그런 이름의 모임이 있긴 했지만 독서회에 지나지 않았고, 7인 서클의 경우 7명이 모였다고 해서 수사 과정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실제로는 이런 것이었는데도 수사 당국, 이승만 정권이나 진보 세력이 서로 다른 이유에서 이걸 상당히 중시했던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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