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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된 변호사, 그는 죄가 없다

[주장] '경찰폭행' 혐의 민변 변호사, 24일 1심 재판부 무죄 판결 내리길

15.07.22 21:23l최종 업데이트 15.07.22 21:59l

 

 

지난 7월 6일 서울중앙지법 법정. 피고석에 낯익은 이들이 대거 서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모두 변호사. 평소 같으면 당연히 법정 우측 변호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그 자리가 아니었다. 피고인석에 나란히 선 이들 중 유난히 흰 머리가 눈에 들어오는 변호사가 있었다. 바로 이덕우 변호사였다.

이덕우 변호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94년 12월 24일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날, 당시 나는 재야단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부장이었고 그는 인권 위원이었다. 그렇게 처음 그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이어진 지난 21년간의 인연은 참으로 깊고 진했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것처럼 이덕우 변호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권 변호사 중 한 명'이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1987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주요 시국사건에 늘 '이덕우' 석자를 올렸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시국 사건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그중 나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는 1998년 판문점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이었다.

집요한 사람, '인권 변호사' 이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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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5년간 '인권 변호사'로 일해온 이덕우. 그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주요 시국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일이 없다. 특히 용산참사는 그에게 잊지 못한 아픔이었다. 참사 5주기를 맞아 추모위원에 참여해 달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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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어느 날,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서울 명동의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실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바로 그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 중 하나로 언급되는 '판문점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이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만 17년째, 이덕우 변호사는 이 사건에서 한 번도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세월동안 이 변호사는 아들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싸우는 '김훈 중위 아버지의 전쟁'에 든든한 전우였다.

이덕우 변호사와 관련하여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2002년 12월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제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하다가 업무가 종료된 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덕우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뜬금없이 "요즘 뭐하냐"고 묻더니 "나하고 같이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세상 없이 바쁜 분이 난데없는 여행을 제안하니 뭔가 이상했다. 알고보니 역시나였다. 2002년 12월 그해, 경남 창원의 한진중공업에서 배달호 노동자가 사측의 부당한 탄압에 항거하고자 분신 자결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변호사는 나에게 그 사건 진상 조사를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함께한 진상 조사단 방문 길에서 나는 이덕우 변호사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늘 합리적이고 상냥한 성품, 누구에게 모진 말을 잘 못하는 사람. 그러다 술 한잔 마시면 늘 허허실실 웃는 착한 사람. 그런 이미지의 이덕우 변호사가 한진중공업의 관리자 건물 앞에서 보인 분노는 나에게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이 변호사는 배달호 노동자가 분신하게 된 경위를 조사하면서 사측의 입장도 듣고자 했다. 이에 사전에 면담 요청을 마친 후 약속한 시각에 한진중공업 관리자 건물을 방문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측 관리자가 아니라 굳게 닫힌 철문이었다. 그들은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 황량한 벌판에서 이덕우 변호사는 여러차례 문을 두드리며 면담 요청을 거듭했다. 하지만 닫은 철문은 끝내 침묵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이덕우 변호사의 눈물 섞인 괴성이 내 귀에 들려왔다. 굳게 닫힌 그 철문을 향해 분노의 발길질을 하며 분신한 배달호 대신 외치는 눈물이었다.

"이 놈들아. 사람이 죽었다. 너희를 위해 일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말이라도 좀 해달라는데 이것조차 못하겠다는 것이 사람이냐. 어서 문을 열란 말이다. 문을..."

그날, 이덕우 변호사의 외침은 그 넓디넓은 100만평 한진중공업 벌판 위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덕우 변호사의 진심을 봤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나에게 이덕우 변호사는 그런 사람으로 남았다. 

고시 공부중 갑자기 돗자리 챙기며 나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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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에서 개최된 촛불 집회에 참석한 이덕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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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우 변호사는 성균관대 법대 77학번 출신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법조인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잘 나가는 금융 투자회사에 취직하여 안정적인 직장인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가 1984년. 그러나 그러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채 1년이 되지 않은 1985년, 이덕우는 아내와 아버지에게 "회사를 그만 두고 사법고시에 도전하여 판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밝힌다.

그리고 이어진 3년간의 고시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다. 1차 시험 합격후 2차 시험을 연거푸 낙방. 결국 처음부터 다시 1차 시험을 봐야 했는데 다행히 1987년 실시된 1차와 2차 시험을 모두 합격했다고 한다. 2차 시험을 두 번이나 실패한 후 다시 처음부터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느낀 좌절감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힘든 고시 준비 때도 이덕우 변호사의 일상은 남달랐다. 이덕우 변호사의 부인이 어느 땐가 나에게 들려준 그때의 특별한 일화가 있다. 고시 준비를 할 당시 이덕우 변호사가 살던 곳은 서울 돈암동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3년이나 고시에 매달리는 남편을 내조하며 기약없는 내일을 애타하던 그때, 갑자기 공부하던 남편이 법전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내에게 "돗자리를 챙겨 따라오라"며 앞장서더라는 것. 매일 법전만 파고 있으니 자기도 답답해서 어디 물 좋은 곳에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고 내심 부인은 반가웠다고 한다. 

그래서 앞장 서는 남편을 따라 무작정 쫓아가니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자신이 사는 옆 동네 철거촌. 1987년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심 재개발 사업이 확장되던 그때, 서울 돈암동에서는 철거민들의 싸움이 치열했다. 당시 고시생이었던 이덕우 변호사의 부인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웃었다. 고시 공부하다가 뜬금없이 찾아간 곳이 전혀 상관없는 남의 동네 철거민 농성장이라니. 

그 후 고시생 이덕우는 공부를 하다가 자주 철거민들의 농성장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가져간 돗자리를 깔고 부부가 앉아 철거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민중가요를 불렀다고 한다. 이덕우 변호사의 부인은 "덕분에 그곳에서 민중가요를 배웠다"며 웃었다. 그런 사람이 마침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연수원에 들어간 때는 1987년.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가는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인권 변호사로서 들어선 첫 계기는 그곳 연수원에서 '인권학회'라는 서클을 만들면서였다고 한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연수생들과 함께 인권 운동가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그는 인권 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훗날 '인권운동 사랑방'을 만든 인권운동가 서준식 선생에게 받은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덕우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큰 획을 긋는 인권변호사로 일해 왔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연대를 하면서 늘 수임료를 받지 못해  '돈 못 버는' 변호사로 유명하다. 돈 많은 사람이 소위 변호사를 '산다고' 하는데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은 변호사 한 명 만나는 것이 대통령 만나는 것보다 힘든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덕우 변호사는 인권단체를 통해 함께해왔다.

그런 이덕우 변호사가 지금,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할 큰 위기에 처해 있다. 그 계기가 된 사건 역시 이덕우 변호사가 해오던 '사회적 약자와 함께한 연대'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그 사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서울 대한문에서 집회를 할 때 일어난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불법 행위에 이 변호사가 항의하던 중 발생한 일을 검찰이 문제 삼고 나서면서였다.

이덕우 최후진술 '나는 다시 거리로 나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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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우 변호사는 진보정당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민주노동당 때부터 진보신당, 그리고 지금의 노동당까지. 보편적 복지를 촉구하는 1인 시위중인 모습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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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과 8월.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위한 집회가 연일 개최되고 있었다. 쌍용자동차에서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되고 이 과정에서 절망에 빠진 해고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우 변호사는 이러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해고자의 복직을 촉구하고자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법적으로 신고된 집회에 불청객이 있었다. 경찰이었다. 문제가 발생한 날에도 경찰은 신고된 집회 장소의 1/3을 차지하면서 사실상 합법 집회를 방해하고 있었다. 경찰의 집회 방해 행위를 놓고 당연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검찰은 이덕우 변호사를 비롯한 민변 소속 변호사 4명이 경찰의 팔을 잡아 끄는 등의 행위를 했다며 형사 기소했다.

그리고 이어 검찰 측은 대한변호사협회에 자신들이 기소한 변호사들을 징계해 달라고 청구한다. 이번 기회에 각종 공안사건에서 눈엣가시처럼 활동해온 인권 변호사들을 억압하겠다는 과도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검찰로부터 이들 변호사들의 징계 청구를 받은 대한변호사협회는 징계 결정을 형사재판 결과 후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난 7월 6일. 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지난 10월 불구속 기소된 이덕우 변호사 등 민변 소속 변호사 4명에 대해 검찰이 1심 구형을 내렸다. 이 날 검찰은 이덕우 변호사에게 징역 2년을, 김유정(35), 송영섭(43) 변호사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1년 6월을, 그리고 김태욱(39) 변호사에 대해서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검찰 측은 이들 변호사들이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며 유죄를 주장했다. 반면 민변 측은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 헌법상 기본권과 법치주의 수호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면서 "검찰이 이들 변호사들을 처벌할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집회 장소의 1/3을 차지하면서 집회를 방해한 경찰을 기소해야 마땅하다"며 강력 비판했다.

그리고 이날, 1987년 사법고시 합격 후 지금까지 누군가의 억울함을 변호하고자 25년간 섰던 변호인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이덕우는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덕우 변호사는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 

"변호사 등록 취소가 될 수 있는 피고인이 되자 지금까지 맡았던 사건, 그리고 일부라도 보았던 여러 사람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최선을 다했는지, 정성이 모자라지 않았는지 성찰하였습니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만났던 이들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입니다. 이 사건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저는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이날 이덕우 변호사의 최후 진술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검찰이 처음 자신을 형사 기소한 날, 이덕우 변호사의 첫 마디는 "고맙습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였다. 그러면서 이어진 그의 말. "그동안 세월호 참사와 쌍용차 해고, 광우병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그리고 이라크 파병 등을 반대하고자 촛불을 들었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민들이 기소되고 처벌 받았다"며 "그러한 수많은 촛불 중 하나로 우리 변호사도 인정해 줬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인권 변호사' 이덕우, 그는 무죄다

이덕우 변호사의 말에서 나는 잊었던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박정희 유신 독재하에서 조작한 '민청학련' 구속자 김병곤씨의 최후 진술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병곤씨는 이철, 유인태, 황인성 등 같은 구속자들과 함께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유신 독재하에서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는데 누구들 두렵지 않을까.

그때 민청학련 구속자 중 가장 어린 사람이 서울대 상대 출신의 71학번 김병곤씨였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 진술을 위해 피고인석에서 일어선 김병곤씨의 첫마디는 눈물속에 공판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김병곤의 첫마디, "영광입니다"였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김병곤씨가 사형을 구형받은 유신독재시대로부터 무려 40여 년이 흘렀지만 민주주의 현실은 또 다시 역류하고 있다. 그 엄혹했다던 유신 독재하에서도 다행히 김병곤은 사형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검찰은 '변호사 신분에 있어서는' 사형과 다르지 않은 징역 2년을 이덕우 변호사에게 구형했다. 만약 이 재판에서 실형이 선고된다면 우리는 '인권 변호사' 이덕우를 잃게 될 것이다. 변호사가 금고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자격이 박탈된다.  

이덕우 등 민변 소속 변호사 4인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오는 24일 오후 1시 50분. 이날 서울 중앙지방법원 합의 28부 재판부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나는 주장한다. 

이덕우 무죄! 김유정, 송영섭, 김태욱 각 무죄!

이덕우 변호사 등 민변 소속 변호사 4인의 무죄를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기도해달라. 우리의 염원과 기도가 이 나라, 메말라 버린 민주주의의 땅에 단비로 내릴 때까지 함께해 달라. 나는 정의와 진실이 바로 잡히는 그날까지 '인권을 위해 끝까지 싸운' 이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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