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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밀’ 수확 날, 콤바인도 부재를 알아차렸다


등록 :2016-06-18 13:39수정 :2016-06-18 14:10

 

백남기의 ‘마지막 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
홀로 자라 야윈 밀알이 국가폭력 증거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농부 백남기(69)씨가 뿌린 ‘마지막 밀’이 수확됐습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에 헌신해온 그가 이 땅에 던진 메시지이자 ‘한국 농업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2500여평의 밀밭에서 1.3t의 알곡이 나왔습니다. 40㎏ 가마니로 32가마입니다. 평소 백남기씨는 그 밭에서 50~60가마를 거뒀습니다. 씨앗을 뿌린 농부가 국가 폭력에 쓰러진 뒤 혼자 자란 밀의 생육이 야윈 수확량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그의 후배들이 이 안쓰러운 밀의 보존·확산을 추진합니다.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에 힘이 돼주시길 권합니다.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지난해 11월12일 남편 백남기(69)씨는 그 밀밭에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이틀 뒤 그는 서울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그가 7개월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동안 그의 밀은 주인 없이 홀로 자라 야위었다. 수확기가 지난 밀밭에서 밀 아닌 것들이 밀을 굽어보는 상황도 7개월 동안 관리되지 못한 밀밭의 처지를 말해준다. 이튿날 오후 콤바인 한 대가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을 수확했다. 밀을 거둘 기운도 의욕도 없던 아내는 “형님의 마지막 밀을 방치할 수 없다”는 남편 후배들의 권유에 힘을 냈다. 그 후배들을 위해 박경숙씨는 밀이 깎여나간 밭을 가로질러 새참을 내왔다. <한겨레> 토요판은 지난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 수확을 취재했다. <한겨레>는 최근 한 달간 백남기씨 가족·대책위원회와 밀 수확 일정 및 판매·보존 방법을 논의해 왔다. 국가 폭력이 꺾어버린 한 농부의 꿈을 기사로써 지원한다. 전날 비를 뿌리던 하늘이 수확 당일엔 해를 내보냈다. 보성/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콤바인이 밀밭 한가운데서 멈췄다.

 

 

“아따 풀이 많아 부러요.”

 

 

콤바인을 몰던 남편 후배가 바퀴 사이에 걸린 초록색 식물을 빼내며 말했다. 밀보다 웃자란 사료작물이 콤바인 기계에 끼어 바퀴를 세웠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 때문에 그래요.”

 

 

박경숙(63)씨가 밀밭에 주저앉아 포대 자루의 입을 벌렸다. 콤바인에서 쏟아지는 밀알들을 손으로 긁어 자루 안에 밀어 넣었다. 남편이 남긴 밀을 한 알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쇠붙이인 콤바인도 남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밀 아닌 것들이 콤바인을 세울 만큼 밀밭에 끼어들진 못했을 것이다.

 

 

쿠르르르릉, 엔진이 다시 끓었다. 푸드드드덕, 새들이 날아올랐다.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69)의 ‘마지막 밀’이 콤바인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남편의 손길”이 밀밭 전체에 묻어 있었다. 그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기 이틀 앞서 파종(2015년 11월12일)한 밀밭이었다. 214일 전 백남기는 2500여평의 밭을 오가며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평소 기계로 파종하던 그가 지난해엔 유독 손 파종을 고집했다. “힘들게 그러지 말고 기계로 하라”는 말에도 남편은 “운동도 되고 좋다”고 했다. 자신의 온기를 땅에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는 생각했다.

 

 

쾌재쟁 쾌재쟁 쾌재재재쟁….

 

 

아내의 귀에서 꽹과리가 울었다.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가 걱정될 때마다 남편은 꽹과리를 치며 밀밭을 돌았다. 새벽에도, 해 질 녘에도, 잠에서 깬 직후에도 꽹과리를 들고 밀을 지켰다. 고구마를 파먹던 멧돼지가 자신을 피해 밀밭으로 질주했다며 남편은 꽹과리를 치고 돌아와 이야기했다. ‘그날’(지난해 11월14일) 이후 꽹과리는 입을 다문 채 집 툇마루에 엎드려 소리를 잃었다.

 

 

하루와 하루가 쌓여 7개월을 채웠다는 사실이 박경숙씨는 현실로 감각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병원으로 실려간 남편(외상성 경막하 출혈)은 계절이 세 번 바뀔 때까지 죽음의 곁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술한 두개골은 아직 열려 있었고, 췌장 기능 약화로 인슐린을 투약받고 있으며, 5월초엔 감염수치가 치솟아 고비를 맞기도 했다. 패혈증을 우려해 자제하던 항생제도 의료진이 최고 단계로 처방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가 밀 수확을 위해 내려와 있었다. 백수를 누린 친정 큰어머니의 장례에도 다녀왔다. “그렇게 수명대로 살다 가시는 게 순리”였다. “감기약 한 알 안 먹을 만큼 건강했던 양반이 생죽음을 맞고 있는” 상황을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을 버텨오며 그는 혼자서 밀을 거둘 자신이 없었다. 1989년 밀 농사를 시작한 이래 남편 없는 수확은 처음이었다. “형님의 마지막 밀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후배들의 말을 따라 어렵게 날을 골랐다. 남부 지방에서 밀은 10월말~11월 중순 파종해 이듬해 6월 중순께 거뒀다. 한 주 뒤 장마가 예고되고 있었다. 콤바인을 빌릴 수 있는 날짜는 13일뿐이었다. 국가 권력이 칠순을 앞둔 농부를 때린 지 만 7개월에서 하루가 빠지는 날이었다.

 

 

낮 12시50분 콤바인이 밀밭에 진입했다. “빗물과 이슬이 말라 밀이 고슬고슬해질 때”를 기다려 수확은 시작됐다. 콤바인이 밀밭 가장자리를 돌며 크게 원을 그렸다.

 

 

밀밭으로 오르는 길마다 “백남기를 살려내라”는 펼침막(지난달 14일에 진행된 ‘밀밭 걷기’ 때 부착)이 출렁였다. 수십 년 전 보성읍내에서 생필품을 짊어지고 활성산(보성읍·웅치면·회천면을 잇는 해발 465m의 산)을 넘던 보부상들은 그 길을 지나 회천면 녹차밭에 닿았다.

 

 

밀밭은 본래 산이었다. 부부가 마을에 정착(1982년)하고 1년 뒤 밭(5천여평)으로 일궜다. 그해 솔껍질깍지벌레가 창궐했다. 군청은 농가마다 공문을 보내 소나무 벌목을 요구했다.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냈다. 베어내지 않은 몇 그루의 소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밭(2500여평)과 밭(2500여평)을 나누는 ‘운치 있는 경계’가 됐다.

 

 

물대포 맞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거무스름해지도록 수확 시기 넘겨
밀밭 전체에 묻은 백남기의 손길
살아도 산 것 아닌 시간 버틴 아내
후배들 도움 받아 ‘마지막 밀’ 거둬

 

1989년부터 우리밀 재배에 헌신
전국 돌아다니며 종자 구해 전파
‘보성 1호 농민’ 돼 주민들 설득
자택 공간 열어 수매까지 도맡아
광주·전남 우리밀살리기운동 개척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지붕이 날아가 위가 뚫린 느낌”

 

 

부춘(富春)은 농민들의 ‘가난한 꿈’이었다. 보성 선씨와 수원 백씨가 그 꿈을 붙들고 부락을 이뤄 살았다. 춘궁기에도 넉넉하고 싶은 소망을 마을 이름에 담아 불렀다. 결혼(1981년 11월) 3개월 뒤 백남기 부부는 부춘마을(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 신혼살림을 풀었다. 할아버지 작고 이후 10여년간 비어 있던 낡은 집이었다. 도시로 나가기 위해 공부하던 시대였다. 도시에서 공부한 아들이 비만 오면 지붕이 새는 집으로 들어간 ‘사태’를 아들의 부모(당시 광주광역시 거주)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소 1700년대부터 9대가 그 집에서 삶을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부부는 그 집을 생명으로 가득 채웠다. 분홍빛 낮달맞이꽃과 보랏빛 솔잎국화가 마당을 채색했고, 촘촘히 솟은 대나무숲이 집의 등을 받치며 울타리가 돼줬다.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듬직하고 우뚝했으며, 소나무·감나무·동백나무가 어울려 마당의 풍경을 구성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온갖 새들이 제 소리를 터뜨리며 날아다녔다. 낯선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오이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날짜로 이름 지은 개)과 ‘팔일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은 열심히 짖었다.

 

 

각자의 기운대로 힘써 살아온 그 집의 일상에서 백남기만 빠져 있었다. 집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데 제비는 올봄에도 찾아와 새끼를 까서 데리고 나갔다. 처마에 붙은 빈 제비집 하나가 제비의 자리를 기억하며 다음 봄을 기다렸고, 아내가 깨끗하게 씻어둔 하얀 고무신이 마루 밑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남편과 33년을 함께한 집에서 홀로 남을 때마다 아내는 “지붕이 확 날아가 위가 뚫려버린 듯” 황망했다.

 

 

콤바인이 밀을 삼키며 지나갔다. 기계엔 감정이 없었다. 백남기의 마지막 밀을 콤바인은 예년과 다름없이 빨아들였다. 기계는 탈곡된 밀알만 머금고 밀알을 잃은 지푸라기들은 뱉어냈다.

 

 

그 밭에서 부부는 1989년(당시 백남기는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연합회장)부터 우리밀을 재배했다. 백남기에게 우리밀은 ‘그저 여러 작물’ 중 하나가 아니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수매를 중단한 뒤 우리밀(자급률 0.2%)은 문자 그대로 씨가 말랐다. 농민들은 밀 재배를 포기했고 토종밀은 밭에서 사라졌다. 수입 밀이 우리밀을 멸종시킨 뒤 벌어질 일을 그는 우려했다.

 

 

그는 후배들과 우리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차도 안 다니는 시골길을 걸어다니며 촌로들이 약으로 남겨둔 씨앗들을 한 줌씩 얻었다. 2년 동안 모은 이름 모를 종자 24㎏을 다시 각 지역으로 내보냈다. 벼와 보리를 이모작하던 농가를 설득해 보리 대신 밀을 심게 했다. 백남기도 보성군의 ‘우리밀 1호 농민’이 됐다. 초기엔 그의 집 마당에 밀 가마니를 쌓으며 수매 일까지 도맡았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밀을 심어보셨냐고 물었더니 당신들 부모가 심은 것은 봤지만 나는 안 심어봤다고 하세요. 그분들 연세가 70~80대셨는데도요. 그러면 기억을 더듬어보자 해서 밭에 쟁기질을 해서 퇴비를 놓고 골을 팠어요. 거기에 밀을 뿌리고 기다려봤어요. 그랬더니 나오더라고요.”(2013년 <광주평화방송> 대담)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 때 그는 공동의장이 됐다. 광주·전남은 현재 전국 우리밀 생산량(올해 경작지 3만평·수확량 3만5천t·자급률 2% 목표)의 50%를 차지한다. 백남기는 맨 앞에서 운동을 개척했다.(최강은 광주·전남본부장)

 

 

콤바인이 운동장에 트랙을 만들듯이 밀밭을 깎아나갔다. 콤바인이 밭을 따라 돌수록 길은 넓어지고 밀은 줄어들었다. 밀알을 잃은 밀짚이 퇴비가 되기 좋게 절단돼 길 위로 뿌려졌다.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백남기의 책장은 농기구 창고 안에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들이 삽, 낫, 톱, 망치 옆에서 그가 공부한 역사와, 갈등한 사회와, 고민한 농촌을 끌어안았다. <한국민중사> <영국노동운동사>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농업·농민 문제 연구> 등이 <갈멜의 산길>(가톨릭 영성에 관한 책)과 이웃하며 치열했던 한 농부의 시간을 요약했다.

 

 

‘농자’는 한 번도 ‘천하지대본’이었던 적이 없었다. ‘부춘’은 바라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쌀값 인상(80㎏ 21만원) 공약이라도 그는 지켜지길 바랐다.

 

 

“언제는 정치가 농민을 대접했답니까. 재벌은 부채 탕감도 잘 해주고 보조도 잘 해주면서 농민은 생계유지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농민이 아무리 숨죽이고 산다고 어떻게 20년 동안 쌀값이 제자리걸음(15만원 안팎)일 수 있답니까.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남편이 왜 서울까지 올라갔겠어요.”(박경숙)

 

 

후배 농민 최영추(64·전 보성군농민회장)가 콤바인이 흘린 밀 한 가닥을 주워 들었다. “낫으로 직접 벨 땐 까시락(보리나 밀의 깔끄러운 수염·전라도 방언)이 모가지와 겨드랑이를 찔러서 고생 많았제.”

 

 

지난해 11월14일 백남기는 보성 주암호에서 열리는 ‘자연지킴이 걷기대회’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전날 그를 만난 최영추가 서울 ‘민중총궐기’에 가자고 권했다. 당일 웅치면에선 백남기만 버스를 탔다. 경찰이 물대포를 쏠 때 보성군 버스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형님을 찾을 수 없었던 최영추가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아침 박경숙씨는 남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휴대전화가 없는 남편에게 최영추와 첫째 딸의 번호를 적어주며 일행과 떨어지면 공중전화를 찾아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럴 일 없을 것이네.” 남편은 말했었다.

 

 

최영추의 두 번째 전화는 남편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형님을 찾아 헤매던 그는 구급차로 옮겨지는 한 남자를 봤다. 남자의 가슴에 형님이 달고 다니던 가톨릭농민회 배지가 있었다. 형님이 예정대로 주암호로 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최영추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콤바인이 탈곡한 밀알을 모아 곡물적재 트럭에 쏟아부었다.

 

 

밀이 잘려나간 밭을 가로질러 박경숙씨가 새참을 내왔다. 권용식(52·현 보성군농민회장)이 트럭을 몰고 가 머리에 인 새참을 받아 실었다. 사건 당일 그는 백남기를 태운 구급차에 올라 서울대병원까지 동승했다.

 

 

삶은 감자와 고구마, 달걀, 고추, 막걸리, 수박을 담은 빨간 고무대야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지난해 일 터지지 전에 수확한” 고구마와 앞집 밭에서 얻어온 감자가 더위 속에서 따뜻했다. “내가 뭔 정신으로 감자를 심고 있겄소.” 박경숙씨가 새참을 차릴 때 말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일상의 농사는 중단됐다. 밭에선 잡초가 채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랐다.

 

 

남편과 형님이 좋아했던 멸치젓을 삶은 달걀에 올려 먹으며 아내와 후배들은 굳이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날로 뛰는 농약값을 이야기했고, 헐값에 넘긴 매실을 이야기했으며, 우렁이를 활용한 친환경농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떨칠 수 없는 그의 부재가 텅 비어가는 밀밭처럼 휑했다. 콤바인이 밀밭 중앙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감정 없이 알곡 빨아들이는 콤바인
밀 이삭 아래 뾰족이 돋은 잡초들
밀밭에 끼어들어 웃자란 사료작물
돌봄 못 받고 자란 안쓰러운 곡식
기계 멈춰 세우며 밭주인 부재 증거

 

7개월 키워 3시간 못돼 텅 빈 밀밭
평소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소출량
‘백남기 밀’ 종자 보존·보급 추진
판매 수익금은 기념사업회 종잣돈
“그의 뜻 많은 분께 가닿길 소망”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의 부재가 텅 빈 밀밭처럼

 

 

콤바인이 다시 멈췄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가 콤바인의 진격을 방해했다. 라이그래스는 바람을 타고 씨앗으로도 번졌지만, 퇴비로 뿌려진 소똥에서도 싹을 틔웠다.

 

 

주인의 부재는 밭에 정확히 새겨졌다. 수확 시기를 넘긴 밀은 불에 그슬린 것처럼 거무스름했다. 누렇게 익은 단계를 지나 거뭇해진 밀 이삭 아래로 초록의 잡초들이 뾰족했다. 빛깔도 때를 알아야 생육과 결실을 반영했다. 때를 모르는 초록은 싱그러움이기보다 누군가의 심장에 박힌 푸른 멍울 같았다.

 

 

작황이 좋지 않았다. 매년 2월 중순마다 치르던 ‘밀밭 밟기’도 올해는 건너뛰었다. 날씨가 풀려 들뜬 땅을 늦지 않게 밟아줘야 뿌리가 잘 붙고 수확량이 늘었다. 퇴비를 먹지 못한 밀알은 끼니를 거른 아이처럼 말랐고, 뽑아주지 못한 잡풀이 땅의 부족한 양분을 빼앗았다.

 

 

마을 후배 문영제(64)는 형님의 밀밭 밑에서 고구마를 키웠다. 가끔 형님 밭에 올라가 밀을 살피면 주인 잃은 밭의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어서 오소” 하며 그의 귀농을 독촉하던 형님이 정작 귀농 뒤엔 “저래 돼버렸”다. 문영제는 “혼자 자란 밀밭”을 볼 때마다 울화를 삼켰다. 그의 밭과 밀밭 사이에서 형님 부모와 조부모의 산소가 들꽃과 잡초로 무성했다.

 

 

“시신경을 다쳐 생존해도 앞을 볼 수 없대요. 호흡도, 체온도, 혈압도 스스로 조절을 못해요. 다시 일어나 돌아올 거라 생각 안 해요. 손이라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내는 “수도 없이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농사지을 기운도 재미도 바닥”이 났다. 박경숙씨가 짓는 밀농사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논은 가을에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동네 주민에게 경작하도록 내줬다.

 

 

우리밀 농사가 돈을 벌어다 준 적은 없었다. 40㎏ 한 가마당 3만3천~3만5천원을 받았다. 종자값과 퇴비값, 기계값 등을 제하면 수익이 빠지지 않았다. 돈벌이를 생각해선 계산이 안 서는 밀 농사를 백남기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남편과 밀을 수확하고 나면 아내는 그 자리에 콩을 심었다. 남편은 “도덕성은 100점이었지만 경제력은 0점”이었다. 콩을 거둬 담근 유기농 된장으로 아내는 부족한 생활비를 벌었다. 1984년 ‘소값 파동’(전두환 정권 당시 무분별한 소 수입으로 소값 폭락) 때 진 빚을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 빚의 정확한 액수도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털어내며 아내는 ‘남편 없는 삶’을 맞고 있었다.

 

 

콤바인이 남은 한 줄을 밀고 있었다. “형님이 지켜온 밀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할 거인디.” 최영추가 말했다. “오늘 수확한 밀을 가져다가 ‘백남기 밀’(상자기사)로 만들 거예요. 이 밭을 계속 일궈서 형님 이름의 밀로 보존하고요.” 최강은이 설명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권용식이 반겼다.

 

 

고령이 되면서 백남기는 밭의 절반 면적에만 밀을 뿌렸다. 그는 그루밀(국수용), 은파밀(국수용), 백중밀(국수용), 금강밀(빵용) 등을 재배하며 종자별 특성과 수확량을 검증해왔다. 그가 지난해 마지막으로 파종한 씨앗은 백중밀이었다. ‘백남기 밀 보존사업’도 그 백중밀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오후 3시30분 콤바인이 밀 수확을 끝냈다. 7개월을 자란 밀을 거두는 데 2시간40분이면 족했다. 백남기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흔적은 그렇게 정리됐다. 밀밭에 더는 밀이 없었다.

 

 

지난해 11월17일 가족과 대책위원회는 강신명 경찰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한 달 뒤 고발인 조사를 한 검찰은 사실상 수사를 중단했다. 백남기의 씨앗이 싹을 얻고,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이 될 때까지, 국가 폭력의 책임자 중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야당은 ‘백남기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상시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셨다지.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티는 게 이상할 지경이에요.”

 

 

40㎏짜리 32가마

 

 

탈곡된 밀이 마을의 곡물 건조기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밀알은 수분 함량 12%(정부 기준)에 맞춰 말라갔다. “착잡하고 서운해요.” 건조 과정을 지켜보던 박경숙씨가 말했다. 밀의 수분이 마르더라도 그와 가족이 흘린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건조된 밀은 이튿날 주식회사 우리밀식품(대표 최강은)으로 운반돼 가공에 들어갔다. 수확 물량은 1.3t이었다. 40㎏짜리 32.5가마에 그쳤다. 백남기가 쓰러지기 전 소출량은 50~60가마였다. 밀은 몸무게를 크게 줄여 그의 빈자리를 증거했다.

 

 

남편의 마지막 밀을 거둔 아내는 다시 서울행 채비를 했다. 마당에서 하얀 나비가 너풀너풀 날았다.

 

 

 

보성/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의 밀’을 지켜주세요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그의 아내 박경숙(63)씨와 후배 농민들은 13일 1.3t 분량의 밀을 수확했다. 지난해 11월14일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기 이틀 전 백남기(69)씨가 파종한 밀밭 2500여평에서 얻었다.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결실이며 흔적이다.

 

“우리밀을 지켜온 형님의 사명감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쪽으로 판매·보존하려고 합니다.”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설명했다.

 

우리밀은 정부가 수매하지 않는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국산밀산업협회,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이 수매해 생활협동조합이나 제분·가공업체 등에 유통한다. 그동안 백남기씨가 수확한 밀은 보성농협과 우리밀농업협동조합에서 수매했다.

 

그의 마지막 밀은 수매 절차를 밟지 않고 최강은 본부장이 전량 인수했다. 그는 광주·전남본부가 주주로 참여하는 ‘우리밀식품’(제분·면류 가공업체)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정선된 씨앗은 오는 가을 백남기씨의 밭에 다시 뿌려진다. 보성군농민회가 주축이 돼 경작·재배한 뒤 ‘백남기 밀’이란 이름으로 종자를 보존·보급할 방침이다. 혼자 밀 농사를 이어가기 힘든 아내 박경숙씨는 사료작물 재배 농민에게 밀밭을 임대할 계획이었다.

 

알곡은 제분·가공해 밀가루와 국수·냉면으로도 판매한다. 제품엔 “백남기 농민이 파종했던 우리밀을 수확해” 만들었으며 “수익금은 백남기 농민 관련 기금(기념사업회 종잣돈 등)으로 사용된다”는 문구가 붙는다. 매년 수확되는 백남기 밀을 지속적으로 제품화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쓰러진 지 6개월째 되는 날(5월14일) 채취한 밀 이삭은 푸른빛을 유지한 상태로 보존처리했다.

 

박경숙씨는 남편의 이름을 딴 밀을 통해 그의 뜻이 전해지길 희망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않고 우리 땅과 농촌, 먹거리를 살리는 데 헌신하신 분이에요. 그의 마음이 많은 분들께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백남기씨는 2013년 우리밀을 아껴달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6월이 돼 비가 (많이) 오면 풀이 밀을 덮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밀을) 수확을 해서 세상에 내놓으니까 믿고 드셔주신다면 우린 더욱 힘을 얻을 겁니다. 유기농이다 친환경이다 뭐다 하지 않고 진짜 그대로 우리밀을 생산할 테니까, 소비자 여러분들이 우리 것을 많이 이용해주시면, (저희는) 신나는 우리밀 농사를 짓겠습니다.”(가톨릭농민회 광주대교구연합회 창립 40주년 기념 대담)

 

‘백남기 밀’ 주문: 우리밀식품 1588-6208, woorimil@hanmail.net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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