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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부' 나라 대한민국, 비행기 타면 모두 유죄!

[여행의 윤리를 묻다] 박노자가 추천한 '여행자' 윤여일

박노자 오슬로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22 오후 6:25:23

 

아마도 나는 이 책 <여행의 사고>(돌베개 펴냄)를 평가할 자격은 없을 듯하다. 중국, 인도부터 중남미까지 두루 여행해본 윤여일과 대조적으로, 나는 여행을 즐기지 않고, '여행을 위한 여행'을 거의 안(못) 하기 때문이다. 가끔 학회 일정 때문에 '길'에 서게 되지만, 믿거나 말거나 그럴 때에도—현지인들에게 특별히 이끌리지 않는 이상—별로 '구경' 다니지 않는다. 아주 가끔은 내 아이와 함께 다닐 때 아이에게 '유적 안내'를 해주지만, 그때도 솔직히 그다지 즐겁지 않다. 어떤 '교육적 의무'를 하는 기분이지, '여행'하는 기분은 전혀 아니다.

왜 여행에 이토록 무관심한지, 가끔 생각해봤다. 일면으로는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 시대'의 특징과도 유관한 듯하다. 실은 어떤 유적이나 박물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이걸 찾아내는 것은 굳이 비행기 삯을 낭비하지 않아도 순식간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굳이 공항 버스운영하는 업체와 항공사 그리고 해당 유적을 관리하거나 그 주위에서 이런저런 영업을 하는 업자들에게는 나까지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진정한 재미는 유적보다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 사는 모습, 사람 사는 맛…….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규정하는 사회 경제적인 구분법이 작용한다. 세계 체제의 핵심부, 예컨대 유럽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내가 평소에 생활하는 노르웨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노동하는 모습이나 소비 속에서 노동의 고됨을 잊으려 하는 모습, 특히 젊은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가면 갈수록 정규직으로서의 '노동'도 못하게 되는 추세는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실은 나는 바로 그런, 신자유주의의 벽에 부딪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지만, 이걸 단순히 '여행'의 범위 안에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주변부……. 주변부에서 '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저 그냥 '구경'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 <여행의 사고 하나>(윤여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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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만 해도 나는 '여행'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고통들—문을 줄줄이 닫게 되는 공립 병원의 파국부터 빵과 우유를 사기에는 충분해도 고기를 사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쥐꼬리만 한 노년 연금까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옛 건물들과 자연미만을 '구경'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고통을 실감한 뒤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말기 암에 시달려도 이제 공립 응급 병원에 실려가 사망하기 전에 며칠 동안이라도 병원에서 지내며 진통제로 그 고통을 달래는 일도 불가능하게 된 노인 환자들을 많이 보고 나서는, 과연 단순히 러시아의 반자본주의적 정당들에 대한 '원격 지원'만으로 내 분통을 다 풀 수 있을 것인가? 자본화된 러시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며칠 이상 보고 나서 그 느낌을 가지고 과연 노르웨이에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가끔가다가 노모를 뵈러 고향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긴 하지만, 보통 며칠 이상은 묵지 않는다. 며칠 묵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억울함과 분통으로 신경망이 거의 마비되기에 충분하다. 아우슈비츠나 '삼청 교육대'를 '그냥' 여행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면, 인구의 약 7퍼센트는 식량을 배불리 사먹을 돈이 없으며, 약 30퍼센트는 빵과 우유를 어느 정도 배불리 사먹을 수는 있어도 기초 식량 이외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러시아 같은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이 상당히 비도덕적일 수 있음 역시 자명할 것이다. '여행'은커녕 가난해서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없는 다수의 주민들께 약이라도 사드리는 게 차라리 도리가 아닐까?

그러나 위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점들은 있어도, 여행을 통한 타자와의 만남은 당연히 필요할 수 있다. 사람이 직접, 되도록이면 자본이나 매체라는 매개 없이 서로 만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즉 좋은 의미의 세계화의 시초일 수도 있고, 또 그런 여행, 그런 만남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상업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 찬 타자들에 대한 '주류' 언론들의 묘사뿐이다. "신비의 인도 오지", "한류 열풍이 불타는 태국", "운남성의 오지, 순박하면서 자연과 가까운 그들의 삶" 등등.
 

ⓒ프레시안(손문상)


이제 각종 '신비한 오지'들을 '재미'로 소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대한민국에서는 그래도 오리엔탈리즘의 색안경을 벗어서 타자의 맨얼굴을 친근하게, 경제적인 우위에 기반을 둔 우월감 없이 응시할 여행가들이 분명 필요하다. 내가 여태까지 본 '나리킨(벼락 부자)'의 나라 대한민국 출신 여행자들의 여러 기행문 가운데, 가난한 지역들을 상징적으로나마 정복해보려는 2차, 3차적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의 최초의 책이 바로 이번 윤여일의 책이다.

윤여일은 무엇보다 먼저 '여행' 그 자체의 문제성을 충분히 의식한다. 그는 '소비하는 여행', 그리고 그 소비 과정에서 우월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오지 여행'을 처음부터 하려 하지 않으며(제1권, 28~40쪽), '맥락의 전환', 남의 사회, 개인들과의 '접촉',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앎, 자신의 내면에 의문을 던지는(제1권, 40~45쪽) '바깥 여행과 병행되는 안으로의 여행'을 지향한다. 아마도 '윤리적인 여행'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이와 같은 여행일 것이다.

그리고 타자를 상업적으로 이국화하지 않고 타자와의 평등한 생각과 느낌의 교환을 지향하는 만큼, 윤여일은 타자 이해의 차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예컨대 그는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못하면서도 한국에서의 멕시코 사파티스타들에 대한 독법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현지 연구를 통해 밝혀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도 좌파 민족주의도 동반 위기에 빠진 1990년대 말의 한국에서는 다소 아나키스트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사파티스타 운동을 일각에서는 '진보 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보려고 했다.

'진부'해 보이는 계급 이야기 대신에 마야족 문화에 대한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칠해진 사파티스타 운동 못지않게, 가면으로 가려진 마르코스 부대장의 얼굴이 그 신비의 카리스마로 수많은 '포스트모던 진보주의자'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나 윤여일이—옳게도—밝혀준 바로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바로 그 한국 '소개자'들이 진부하다고 여겼던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운동과 소수 민족(원주민) 해방 운동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고, 다른 지역이 무비판적으로 '따르기'에는 멕시코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너무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제1권, 99~129쪽). 신비화, 이국화된 타자들은 이렇게 해서 그 본래 얼굴들을 되찾았다. 여행다운 여행이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닌가?

내가 윤여일의 언어에서 매우 좋아하는 것은 정답의 부재, 그리고 답이 유보된 상태에서 끝없이 던져지는 의문들이 주는 풍부한 시사다. 아마도 내가 이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 스타일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받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훈련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일단 어떤 현상을 관찰한 뒤로는 그 현상이 커다란 세계사적인 도식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확답'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 <여행의 사고 둘>(윤여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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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일의 태도는 오히려 선불교적이라고나 할까? 그는 끝없이 묻고 또 물어본다. 이와 같은 태도의 장점은 실로 크다. 무엇보다 먼저 '확답'을 내주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 독자를 오도(誤導)할 위험성부터 훨씬 작아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라이 라마의 설법을 상당히 좋아한 듯한 윤여일은, 그러면서도 티베트에 대한 많은 서구인들의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며, 티베트 독립 문제에 꽤나 유보적이다(제2권, 278~324쪽).

실은 그럴 만도 하다. 티베트가 중국의 내부 식민지임에 틀림없는 만큼, 오늘날과 같은 상황, 즉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점차적인 포위 작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티베트에 (불가피하게 친서방적인) 독립 국가가 들어설 경우에는 그 국가가 대한민국 이상의 미국의 충견(忠犬)이 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 제국주의적인 세계 질서 속에서 약소국의 '주권'이 상대화되고, 미군 기지들이 63개국에나 존재해 아직도 미국의 속국이 되지 않은 중국과 북조선 등 몇 안 되는 국가들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상황에서는, 과연 '민족 자결 원칙'의 당위만으로 티베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가?

윤여일은 끝내 답을 유보하고 말지만, 실은 자위(自衛) 차원에서 구 청나라의 일부 조공 국가(티베트 등)까지도 영토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국의 '자기 보위' 논리와 서방 세력들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거의 존립이 불가능한 해외에서의 티베트 망명 정부 활동 사이의 틈에서 티베트 민중들의 탈(脫)식민적 욕구들이 실현될 여지는 실로 좁아도 너무나 좁다. 아마도 중국 민중들과의 연대 속에서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아직도 논하기 어렵다.

나는 윤여일의 책을 읽어가면서 윤여일의 섬세함에 상당히 반했다. 그는 낯선 사회들의 내부를 응시하면서, 잘못하면 그 대상들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거대 서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 독자로 하여금 여행가가 지나간 곳곳에 대한 애정을 키우게끔 하자면 대체로 바로 이렇게 써야 한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애정 있게. 내 스타일과 다른 만큼 나는 이 스타일을 좋아한다.
 

▲ <여행의 사고 셋>(윤여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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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끔가다가 이 부드럽고 착한(?)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어떤 의문을 참아내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예컨대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년)를 대단히 좋아하는 윤여일은, 그러면서도 다케우치와 같은 방식으로 더 이상 중국을 효율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제3권, 118~119쪽). 다케우치가 긍정적으로 본 중국은 바로 혁명을 통해서—일본과 달리—어떤 민중의 힘에 의거한, 진보적인 근대성을 급진적으로 쟁취한 국가였는데, 오늘날의 중국은 차라리 반동적이기 끝이 없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혁명의 전위 정당이 자본주의적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선도하게 된 셈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케우치의 텍스트들도 윤여일의 텍스트도 그 어떤 시사도 던져주지 않는다. 분명히 윤여일에게도 수수께끼가 됐을, 이 커다란 역사적 아이러니(?)를 이해하자면, 윤여일이 애써 꺼리는 한 가지 전문 용어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바로 '계급'이라는 용어다.

노동 계급이 어느 정도 성장되고, 또 혁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온 초기 소련이나 동구 사회에서도 결국 관료화된 전위 정당은 그 계급을 관료 체제 밑으로 복속시킬 수 있었다. 초기 소련의 역사 같으면 그 과정은 바로 '좌파 반대파'와 스탈린파의 피 말리는 투쟁으로 점철된 1920년대에 이루어졌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과정마저도 없었고 당의 주요 복속 대상으로 노동자들도 아닌 반우파 투쟁(1956~1957년) 시절의 지식인들이 떠오른 만큼 노동 계급의 주체적 역량은 취약했다.

이와 같은 계급적 역학 관계 속에서 과연 자본주의와 성장 모델, 국가주의로의 전면적 회귀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윤여일에게도 분명히 중국의 자본화는 일대 수수께끼겠지만, 그는 '계급'의 언어동원하여 이를 분석하려는 자세를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또 일면으로는 극도로 보수화된 요즘의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책을 쓰자면 '계급' 같은 금칙어들을 아예 피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검열이 아닌 검열, 공식 검열보다 더 심한 비공식 검열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여행에 대한 태도나 생각이 다른 만큼, 나는 윤여일의 책을 매우 즐겼다. 타자를 접하면서 부단한 의문의 시선으로 남들과 함께 자기 자신의 내면을 계속 들여다보려는 동료를 만나는 일이 즐겁다. 나는 아마도 이제 남은 일생 동안 여행을 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한국에서 윤여일과 같은 윤리적이고 자성적인 여행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박노자 오슬로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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