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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살해당했지요"

 

[6월 민주항쟁 30주년] 1987년 3월 이야기

17.06.08 21:11l최종 업데이트 17.06.08 21:11l

 

올해로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았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오마이뉴스>가 공동기획으로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 1987 우리들의 이야기' 특별 온라인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전시회 내용 가운데, 가상 시민 인터뷰와 시대적 풍경이 기록된 사진 등을 갈무리해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 편집자 말

사리암의 50대 비구니 스님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영가 49재 천도식
▲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영가 49재 천도식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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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군의 49재를 맞아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군의 49재를 맞아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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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3일 어깨동무를 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있는 시민들
▲  1987년 3월 3일 어깨동무를 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있는 시민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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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7년 3월 3일입니다. 경찰 고문에 희생된 박종철 군의 49재 날이에요. 그런데 거리엔 최루탄만 날리네요.

 

조계사에서 범종단적으로 올리기로 했던 박종철 군의 49재가 결국 취소됐다는 소식이에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밀려 조계사 대신 부산 괴정동의 작은 절로 바뀐 거지요. 경찰은 쫓고 시민은 쫓기는 험한 모습이 하루 종일 전국에서 펼쳐졌어요. 전투경찰이 도시를 봉쇄하고 거리를 장악해 버렸거든요. 온 세상이 깊은 슬픔과 매운 최루탄으로 뒤덮인 하루였어요.

지난 2월 7일 거행된 박종철 군 추모식 때에도 정말 서럽고 죄송했어요. 경찰이 절 입구에 진을 치고 있어 박종철 군 친척들도 못 들어왔대요. 스님들도 모두 자리를 슬며시 피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박군의 어머니와 누나가 추모 타종만 겨우 울렸대요. 젊은 생명을 그렇게 보낸 것도 서럽고 억울한데 사람들이 모여서 추모도 하지말라는 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인가요.

부끄러워서 부처님 뵐 낯도 없네요. 사람이 사는 세상에선 사람이 해야할 예의와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젊은 승려들과 시민들이 전국에서 최루탄을 뚫고 49재를 올렸다고 하니 고마움의 작은 빛이 비치는 것만 같아요. 나무 아미타불.

박종철 군의 마지막 길에 부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매운 최루탄 대신 온누리에 평화가 가득 차길... 두 손 모아 염원드려요.

형제복지원 사건의 20대 피해자
 

 1987년 조회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  1987년 조회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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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14일 명동 입구에서 총을 들고 시민을 검문 중인 경찰들
▲  1987년 3월 14일 명동 입구에서 총을 들고 시민을 검문 중인 경찰들
ⓒ 박용수·경향신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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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대한민국의 아우슈비츠였어요. 여기에 잡혀 온 다음부터 내가 본 것은 딱 하나예요. 아수라가 지배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

여기가 처음 생긴 건 1975년이래요. 그러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부랑아 단속을 하면서 수용인원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잡혀 왔대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에서부터 바람 쐬러 나왔던 여성까지.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잡아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짐승 취급을 받았어요. 가격이 매겨진 동물처럼,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가축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꽁보리밥에 소금 뿌린 깍두기와 썩은 전어 젓이 전부였어요. 우리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까지 해야 했어요. 그리고 나선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죠. 차라리 죄수들이 수용된 교도소가 여기보단 나을 거예요.

왜 우리가 매일 맞아야 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많은 원생들이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살해당했지요.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죽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암매장당하거나 해부용으로 팔려 나갔대요. 내가 살아남은 건 정말 천운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매일 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다시는 그런 데로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1987년 3월 3일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하는 경찰
▲  1987년 3월 3일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하는 경찰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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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박용수,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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