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농사를 돕던 아이
정영이 회장은 전남 구례에서 농사를 지은 지 28년 차에 접어든 여성농민이다. 1만 5천 평의 산에서 고사리, 취나물, 쑥부쟁이, 두릅, 엉게 등 나물 농사를 짓는다. 나물이 한창인 4~5월이 지나면 7월까지 매실 농사로 바쁘다. 가을엔 밤농사를 지어야 한다.
전남 영광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사일들 도운 그였다. 부모님은 누에를 키웠고, 딸기 농사, 양파 농사에, 오이 하우스까지…. 어린 시절이었지만 정 회장은 경험해 보지 않은 농사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 농민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광주에 나와 살았어요. 대학도 광주에서 다녔고. 그러면서 ‘내 남은 인생은 계속 광주에서 살게 되겠지’라고 생각했었죠.”
결혼 후에도 쭉 광주에 살던 그는 1996년, 남편의 고향인 구례에 내려왔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기 전 다시 광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는 지금 구례군 농민회장을 하고 있다.
여성농민과 어린이날
그를 농민의 삶으로 접어들게 한 첫 시작은 ‘영농 발대식 포스터’였다. 당시 5살, 3살 아이들이 다닐 유치원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포스터. 농민회에서 주관하고 농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 그곳에서 자신의 조직이 될 농민회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여성농민회를 조직했다.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보고 자라면서도 ‘농사가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나는 농사는 안 지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만 원망스러움이 있었다고 할까요… 엄마가 그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에 힘쓰던 어머니를 보며 여성농민의 고된 삶을 느꼈던 때였다. 그 역시 농민으로 살면서 여성농민의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열악한 교육환경에, 돌봄 기능이 전혀 없던 시절, 농촌의 어린이날은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달랐다.
“한창 바쁜 농번기 5월, 부모들은 동트기 전부터 들판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어린이들을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날이에요. 농민 회원들이 의기투합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어요. 단골 가게들을 찾아가 후원을 받고, 옆 마을 청년회를 찾아가 텐트를 빌리고, 목수 일을 할 수 있는 농민 회원들은 행사 무대를 쌓고….” 농촌의 아이들을 위한 맞춤 행사에 구례군내 600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구례에 여성농민회를 조직하자’는 결의가 모였다.
방학이 되면 갈 곳 없는 농촌의 아이들을 전남지역 대학생들과 연계해 ‘참교육 배움터’를 열고, 도내 대학을 탐방하는 ‘미리 가본 대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여성농민들은 농사일을 병행하며, 밤잠을 줄여가며 농촌지역의 양육 문제, 교육 문제 해결에 힘썼다. 그러면서 1999년 구례군 여성농민회가 출범했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농촌에서 자란 정 회장의 딸 역시 강원도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청년 여성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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