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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후보’라는 영광.. 그리고 ‘농업을 살리는 정치’



 

[인플러스] 정영이 전국농민회총연맹 구례군농민회장

“강원도부터 제주까지, 온 농촌 지역을 다니며 갈 곳 없는 농민들의 표를 모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죠….”

지난 총선, 더불어민주연합에서 시민사회 몫인 국민후보 4인 중 여성2번으로 추천됐던 정영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구례군농민회장.

그는 “여당의 치졸한 정치공세에 종북몰이의 빌미로 쓰여 윤석열 정권의 폭정을 감추는 핑곗거리가 되지 않겠다”며 후보에서 사퇴했다. 단 한 명의 농민 국회의원을 바라왔던 농민들의 아쉬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쉬워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농사는 때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

본지가 구례를 방문한 날에도, 그는 종이상자에 정성스레 나물을 포장하며 “언니네 텃밭(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운영하는 온라인 장터)에서 들어온 주문이에요. 전여농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죠”라며 택배 발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 남편과 함께 매실 농사를 짓고 있는 정영이 구례군농민회장. ⓒ본인제공

부모 농사를 돕던 아이

정영이 회장은 전남 구례에서 농사를 지은 지 28년 차에 접어든 여성농민이다. 1만 5천 평의 산에서 고사리, 취나물, 쑥부쟁이, 두릅, 엉게 등 나물 농사를 짓는다. 나물이 한창인 4~5월이 지나면 7월까지 매실 농사로 바쁘다. 가을엔 밤농사를 지어야 한다.

전남 영광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사일들 도운 그였다. 부모님은 누에를 키웠고, 딸기 농사, 양파 농사에, 오이 하우스까지…. 어린 시절이었지만 정 회장은 경험해 보지 않은 농사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 농민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광주에 나와 살았어요. 대학도 광주에서 다녔고. 그러면서 ‘내 남은 인생은 계속 광주에서 살게 되겠지’라고 생각했었죠.”

결혼 후에도 쭉 광주에 살던 그는 1996년, 남편의 고향인 구례에 내려왔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기 전 다시 광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는 지금 구례군 농민회장을 하고 있다.

 

여성농민과 어린이날

그를 농민의 삶으로 접어들게 한 첫 시작은 ‘영농 발대식 포스터’였다. 당시 5살, 3살 아이들이 다닐 유치원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포스터. 농민회에서 주관하고 농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 그곳에서 자신의 조직이 될 농민회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여성농민회를 조직했다.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보고 자라면서도 ‘농사가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나는 농사는 안 지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만 원망스러움이 있었다고 할까요… 엄마가 그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에 힘쓰던 어머니를 보며 여성농민의 고된 삶을 느꼈던 때였다. 그 역시 농민으로 살면서 여성농민의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열악한 교육환경에, 돌봄 기능이 전혀 없던 시절, 농촌의 어린이날은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달랐다.

“한창 바쁜 농번기 5월, 부모들은 동트기 전부터 들판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어린이들을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날이에요. 농민 회원들이 의기투합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어요. 단골 가게들을 찾아가 후원을 받고, 옆 마을 청년회를 찾아가 텐트를 빌리고, 목수 일을 할 수 있는 농민 회원들은 행사 무대를 쌓고….” 농촌의 아이들을 위한 맞춤 행사에 구례군내 600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구례에 여성농민회를 조직하자’는 결의가 모였다.

방학이 되면 갈 곳 없는 농촌의 아이들을 전남지역 대학생들과 연계해 ‘참교육 배움터’를 열고, 도내 대학을 탐방하는 ‘미리 가본 대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여성농민들은 농사일을 병행하며, 밤잠을 줄여가며 농촌지역의 양육 문제, 교육 문제 해결에 힘썼다. 그러면서 1999년 구례군 여성농민회가 출범했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농촌에서 자란 정 회장의 딸 역시 강원도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청년 여성농민이다.

▲ 정영이 회장은 현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도 맡고 있다.

죽정마을 첫 여성 이장

그가 산나물 농사, 밤농사를 짓고 있는 산은 시부모님이 평생 남의 산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 넷을 키운 터전이었다. 구례로 이사 오며 형제들이 어깨보증(신원보증)을 서줘 산을 매입했다. 그곳에서 여느 농민과 다를 바 없는 바쁜 일상을 보내는 정 회장이다.

하루에 두 번 이상 산을 오르내린다. “오늘 고사리를 뜯지 않으면 피어버리니까 제 때에 하려고 하니 늘 몸이 바쁘죠. 비가 오면 산에 갈 수 없으니, 다음 날은 더 정신없는 하루가 흘러가요. 회의에 가야 하는 날이면 일정을 먼저 확인하고, 그 전날 두 배로 일을 몰아쳐 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그가 농사일만큼이나 혼신을 다하는 게 있다. 바로 농민조직 일이다. 2009년, 그는 구례 용방면 죽정마을에서 첫 여성 마을 이장이 되었다.

“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남편의 추천이 있었어요. 이장 선출하는 자리에 갔는데 거기서 엄마들을 보는 순간 또 마음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그가 마을 이장을 하는 동안 90% 이상 매실 농사를 짓던 죽정마을 전체가 ‘친환경 매실 마을’이 되었다. 모든 매실 농가가 친환경 인증을 받은 것. 직거래 장터를 열어 하루에 버스 10대가 마을을 들락날락하는 등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 ‘여성농민 8대 요구’를 내걸고 열었던 ‘2018 전국여성농민대회’에서 정영이 당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총장.

농민운동의 기쁨과 분노

마을 이장부터 구례군 여성농민회 회장, 전국단체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사무총장까지 거치면서 농민운동의 희로애락을 겪기도 했다.

가장 기뻤던 일은 ‘박근혜 탄핵’이다. ‘탄핵’ 자체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여성농민들의 힘으로 ‘변화’를 만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여농 사무총장이 되기 전이었어요. 백남기 농민 투쟁본부를 꾸리고, 구례에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촛불을 들었죠. 그리곤 박근혜 퇴진 구례운동본부를 조직했어요. 탄핵이 인용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잖아요? 농식품부 안에 ‘여성농민 전담 부서’ 설치를 요구했어요. 30년 동안 여성농민들의 요구였는데, 그걸 쟁취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현재 구례군 농민회장 회장이다. 여성이 농민회장을 한 사례는 거의 없다. 1990년대 중반, 당시 농민회는 모든 농촌 지역에서 시민사회를 아우르는 대표 조직이었다. 농촌지역인 구례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라고 했다. 코로나 시국을 전후해 농민회를 더 튼튼히 꾸려야 할 요구가 높을 때 맡은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있을 때 국민후보 출마 제안을 받았다. 역시 막중한 책임감으로 후보를 결심했다. 그 후 농민운동을 하면서 가장 분노스러운 일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는 국민후보 사퇴 과정을 떠올리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폄훼당할 때, 민중들의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되려 운동 조직을 폄훼할 때 화가 난다”고 했다.

 

‘국민후보’라는 영광

“진보정당 분당 과정을 지켜보면서 ‘진보대통합’, 그게 저의 주장이었고 지향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윤석열 정권 심판을 위해, 연합정치를 위해 시민사회진영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걸 쭉 지켜봤어요.”

그러나 한 켠에 아쉬움이 자리했다. 농민을 대표하는 비례후보 한 명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제안이 나에게 올 것이라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전여농 사무총장 당시의 마음을 떠올렸다. “민중총궐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백남기 농민 투쟁, 박근혜 퇴진 운동을 하면서 ‘전선운동’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연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구나’, ‘연대의 힘이 승리를 만드는 힘이구나’를 느꼈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농민운동만 해왔던 제가 중앙단체 사무총장을 하면서 빈민, 장애, 여성, 청년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아요.”

당시 전선운동을 이끄는 ‘한국진보연대’의 힘이 무엇인지도 느꼈다는 정 회장. 사무총장을 하면서 느낀 전선운동의 힘, 연대운동의 힘을 알고 있기에 국민후보에 나설 결심을 했다.

“진보연대에 더해 시국회의, 촛불행동 등 윤석열을 심판하는 단체들이 연대해서 국민후보를 선출한다는데, 거기에 제가 제안되었다니 제 평생에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제안이 있을까”라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의 옆에서 국민오디션을 준비했던 동지, 현재 암 투병 중인 박미정 전여농 사무총장과 약속했다. “농민 국회의원이 되어 우리 농민들의 한을 풀어주자”고.

▲ 지난해 8월 경북 성주 소성리에서 열린 ‘전국민중행동 2기 통일선봉대 전체 결의대회’에 참석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통일선봉대 ⓒ한국농정신문

“온 구례가 정영이를 응원했다”

“온 구례가 정영이를 응원했다. 구례를 대표하는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라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국민오디션을 치른 결과, 여성2번으로 추천되었지만, 그는 뜻하지 않게 후보를 사퇴해야 했다.

보수세력들은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문제 삼았다. “성주 소성리엔 임순분 회장님이라고 전여농 전직 중앙회장님이 살고 계세요. 마을의 끝 지점, 가장 평화로운 마을을 전쟁터로 만드는 상황인데, 농촌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상황을 어떻게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나요?” 그는 당시 전여농 사무총장이자 자주통일위원장이기도 했다.

반평생 여성농민과 더불어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고, 국민의 40%가 공감한 ‘사드 배치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종북몰이의 희생양이 되는 현실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사드 투쟁을 꼬투리 잡는 건 가벼운 것이었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지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시민사회 후보가 되는 건 당연하지’라며 “그런 사람으로 언급되는 것조차 영광”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다음은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 ‘트럼프 방한 반대’ 기자회견에 참가한 걸 걸고넘어졌다. 저들은 “종북 세력을 국회에 입성시키려고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진보정당과 시민사회가 ‘윤석열 심판’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목표로 힘을 모았는데, ‘종북 프레임’에 의해 이 연합정치가 훼손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결국 사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농업을 살리는 정치

“윤석열 정부의 농업 정책은 천박하기 그지없어요. 독불장군에, 안하무인이죠.” 그래서 농민 국회의원이 필요했다.

“농민 수는 줄어가고, 농업 생산량도 줄어들어 먹거리가 위협받고, 농촌은 고령화되고 소멸해 가는데, 농업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대책 하나 없어요. 농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농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농민이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죠. 죽어가는 한국 농업에 인공호흡기를 댈 수 있는 건 농민밖에 없습니다.”

우리 농업을 살리는 게 나라를 살리고 국민을 살리는 길임을 정 회장은 확신한다. 그는 후보에 나서며 ▲주요농산물 공공수급제 법제화 ▲농민 3법(양곡관리법·농민기본법·필수농자재지원법) 제정 ▲수입중심 먹거리 정책 폐기 등을 공약하며 ‘식량주권 지키는 국회의원’,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다.

“양곡관리법을 비롯해 농업 관련 법안들이 수없이 발의됐어요. 10개, 100개를 발휘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5월이 되면 폐기되는 것들이 많잖아요. 꼭 필요한 법안을 발의하고, 법 제정을 관철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했을지 모른다. “강원도부터 제주까지, 온 농촌 지역을 다니면서 갈 곳 없는 농민들의 표를 모을 수 있었는데…. 제가 비례 17번을 받았더라도 농민들이 ‘당선’ 혁명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윤석열 퇴진을 위한 전봉준 트랙터까지 몰았던 농민들이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남은 과제 역시 우리 농민의 몫, 활동가들의 몫”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 지난 4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여성농민 관련 법 개정 요구 기자회견에 참여한 정영이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여성농민 운동가의 꿈

그는 국민후보 출마의 시간이 “농민운동가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다 누린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 그 이상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이제 단 한 순간도 더 허투루 살면 안 될 것 같아요. 또 다른 큰 소명을 얻었다고 할까요? 내 역할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어디든 가야죠. 아니, 저 스스로 먼저 역할을 찾아나갈 것 같아요.”

온몸의 촉수를 뻗쳐 더 일사분란하게 살아갈 참이다. 심을 때 심고, 거둘 때 거둬야 하는 농사일뿐만 아니라 생산자 교육에, 농민조직 회의에, 언니네 텃밭 활성화에, 그는 매일 매일이 농번기다.

그는 “통일농업을 실현하는 농민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개성의 봉동마을과 연계한 통일쌀 공동경작단 사업을 하고 있는 구례군농민회. 그는 “먹거리 문제는 민족의 문제”라며 “남과 북의 농민들이 통일된 세상에서 함께 머리 맞대고 농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날”을 꿈꾼다.

농민운동만이 아니다. 구례군농민회장이면서 구례민주단체연합 대표인 그는 구례군 민주 진보 단체들과 전선운동, 연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윤석열 퇴진 투쟁을 이끄는 전국민중행동을 더 유심하게 보고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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