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03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3/27
    내 인생의 가시(3)
    풍경
  2. 2010/03/05
    원칙과 마음사이
    풍경
  3. 2010/03/02
    결혼에 대하여(4)
    풍경

내 인생의 가시

내 인생의 가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삶을 혐오하게 되기도 합니다.

 

 

로트렉이라는 화가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차례로 다쳤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고

다리 한쪽이 좀 짧았다고 합니다.

 

다리 때문에 비관한 그는 방탕한 생활 끝에

결국 창녀촌에서 불우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아직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다리 한쪽이 짧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시는 바로

남들보다 약간 짧은 다리 한쪽이었던 것입니다.

 

 

로트렉의 그림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고통받아온 것이

오히려 존재를 들어올리는

힘이 되곤 하는 것을 겪곤 합니다.

 

 

그러니 가시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뺄 수 없는 삶의 가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잔을

얼마나 쉽게 마셔 버렸을 것인가.

 

인생의 소중함과 고통의 깊이를

채 알기도 전에 얼마나 웃자라 버렸을 것인가.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 나희덕의 산문집<빈통의 물> 중에서 -

 

 

 

--------------------------------------------------------------------------------------------

다시 읽어보니 오늘 또 새롭게 다가온다.

그냥 좋은 글이 아니라

내 인생을, 나의 생각과  나의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예전엔 한번 읽으면 다시 들춰보지 않았는데....

요즘 글을 다시 읽는데 꽂혔다고 해야하나?

 

니체가 말한 차이와 생성이 이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같은 글을 읽지만 읽을때 마다 새롭게 다가오는것

반복하는 행위속에 문득 새로움을 깨닫는것.

이것이 인생을 사는 묘미라고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원칙과 마음사이

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다.

정말 말이 안통한다.

소통이 정말 어렵다.

 

운동을 10년을 넘게 했는데

내가 아직까지

교육감 선거의 중요성이나 왜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을 해줘야 하냐? 라는 것이다.

이런 대화에서 항상 문제는 나에게 있고, 후배들한테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

 

반MB전선과 일제고사 반대등 경쟁과 획일화된 교육을 바로세우기 위해 범민주후보를 내세워야 하지 않느냐...? 이번 선거에 사실 학생인권,교사인권과 관련된 내용들이 들어있는거고 거기에 동의하고 너희들 활동해오지 않았느냐....? 라고 하는 말에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교육감 선거에 온 역량을 투여해야지 하는 생각이 안든다. 

당위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는 무엇인지 잘 설명해내지 못하겠다.

 

그런 내 마음을 그래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인지

난 내 마음을 표현할 아무런 논리도 없이

교육감 선거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선배 활동방식과 상근자들 사이에 소통없이 진행되는것 때문에

사실 내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니기 제기한 문제는 문제의 20%고

전체적으로는 너에게 문제가 있는거 아니냐고 그런다.

내가 느끼는 문제를 수치화 할수 있다니....문제가 수치화 될수 있는건가?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느끼는 문제가 부차적인거고

전반적으로 교육감선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건가?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거기에 함께 할 마음이 충만하지 못한 내가 문제인가?

참 중요한 사안인데도 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잘 생기지 않는건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결혼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 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신(神)의 고요한 기억속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의 나라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으로 마시지 말라.

서로의 음식을 주되 한쪽의 음식에 치우치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때로는 홀로 있기도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 처럼,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