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과 기억투쟁

2007/04/20 05:01

트랙팩님의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20주년] 에 관련된 글.

우리 손으로 만들었지만 그 앞에 섰을 때 낯설고도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 '역사' 만한 것이 있을까? 이를테면 1987년이 정확히는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 기억하는 듯한데 그것을 '신화'로 기억하는 한, 현실로 재연시키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다시 재연하는 것도, 그걸 넘어서는 것도 힘든 역사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을까?

 

출처 : 노동역사관 1987 / http://remember1987.net

 

이를테면 ‘남목고개를 넘던 그 거대한 노동자의 행렬’, 그보다 더 우렁찬 행진을 한국 노동사에서 발견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많은 노동자 대중의 행진 대오를 찍은 사진이더라도 이 사진 속 장면이 지닌 상징적 무게를 넘어서기는 당분간 힘들 것이다. (물론 이 사진, 더 정확히는 이 1987년의 7, 8, 9월의 한계는 무수히 많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1987년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현재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내겐 남목고개를 넘던 이 사진이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짓눌림으로 강박으로 혹은 갑갑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익히 봐온 사진임에도 낯설다는 느낌이 드는 슬픔 같은 사진.

 

지난 4월 7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미FTA 무효 및 허세욱 동지 쾌유 기원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렸다. 시청 앞까지 행진을 하고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촛불집회 참석 전에 인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던 <르네 마그리트 전>을 보러 갔다.

 

대화의 기술 / De schilderijen van / Art of Conversation, 1950
캔버스에 유채
65 x 81 cm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 -1967) 

 

<대화의 기술> 앞에 섰을 때 난 남목고개를 넘던 노동자들의 행렬 사진을 떠올렸다. 그 사진은 그 자체로 거대하다. 그리고 그 사진 앞에서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그림의 제목은 E.H.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 법한 상황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조형물의 아래쪽에는 '꿈'(REVE)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는데, 마그리트에게 그 꿈이 그래도 추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인지, 혹은 화석화된 그리하여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는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우리에게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역사가 꿈과 무관하지 않다면, (신화로서의 '꿈'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으로서의 '꿈') 그리하여 역사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으로 늘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라면,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현재' 아니 나아가 '미래의 우위' 속에 불러일으킬 어떤 것이라면 이 거대한 폐허(廢墟) 같은 그림은 어떻게 전유되어야 할까?

 

20주년이라는 말 앞에 87년이, 즉 그해 6월과 789와 12월의 간극과 골과 연속성과 대립성이 온전히 드러나고 다시 이야기되고 전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87년과 20주년이라면 우리에게 폐허 이상은 아닐 것이고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거대한 폐허'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방적 압도!

 

웅장하고 화려한 20주년 기념사업은 여러 주체들에 의해서 준비중에 있고 각 주체의 실력에 따라 치러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념사업은 그 규모와 세련된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끊임없이 사막으로 만들어가는, 그래서 미래의 역사가 펼쳐질 지평을 축소시키는 사업이 될 것이다. 역사의 사막화. 또 어떤 기념사업은 현재의 특정 세력의 관점에 그것도 대통령선거라는 '왕 뽑기'의 관점에 맞춰서 87년 6월만을 특권화시키고 그것을 올해 12월에 복속시킬 것이다. 기억의 사유화. 48년 4.3과 60년 4.19를, 80년 5.18을 찍고 87년 6월로 이어질 그러한 시나리오를 7, 8, 9로 뒤엎을 수는 없을까? 또 우리의 2007이 7, 8, 9조차 뒤엎고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그것이 우리가 7, 8, 9월을 떠올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1987년을 둘러싼 해석투쟁과 기억투쟁의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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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0 05:01 2007/04/20 05:01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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