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 2009, Commentary No. 252

 

과들루프: 위기를 푸는 감춰진 열쇠

("Guadeloupe: Obscure Key to World Crisis")

 

 

 

과들루프는 캐리비안 제도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으로, 런던보다 좀더 큰 규모다. 인구 수는 대략 40만 명이다. 전 세계 언론에서 이 섬에 대한 언급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지난 1월 20일 이후 그곳에서는 총파업이 진행중이다. 용케도 그곳 인구의 10%가 파업에 호응하며 거리로 나섰는데, 이는 분명 세계기록감이다. 파업을 선포한 건 (프랑스어)크레올로 LKP라는 조직으로, 번역하면 ‘이윤화(또는 잔혹한 이윤)에 반대하는 연합’이란 뜻이다.

 

LKP는 노동조합 31곳과 정당들, 문화협회들이 결성한 연합체로서, 시민 결사의 거의 모든 영역을 대표한다. LKP를 이끄는 건 UGTG라고, (프랑스에서는 공식적으로 élections prud'hommales이라고 하는) 최근의 노조 선거를 통해 다수표를 얻은 독립 지역노조다.

 

이 LKP는 네 집단, 즉 프랑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 해외영토담당 부처, 고용주들을 상대로 126개의 요구 항목이 담긴 문서를 공포했다. 이들 요구는 대부분 경제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해외영토담장 국무장관 이브 제고는, 그곳에 경제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사회 전반”의 위기가 있다고 했다. 총파업이 그저 빵과 버터에 관한 것뿐이 아님을 점잖게 표현한 셈이다. 이 파업은 또한 근본적으로 반反식민주의 운동이기도 하다. 이 자그맣고 눈에 안 띄는 지역에서 진행중인 상황을 현존 세계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우리 모두 스스로 찾고 있는 하나의 열쇠(혹은 해법으)로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같은 상황의 복합성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눈에 안 띌지 몰라도, 과들루프는 콜롬버스가 첫 발을 들인 1493년 이후 한동안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과들루프는 세계 사탕수수 생산의 주요 중심지로서, 아이티 섬과 더불어 프랑스의 부를 창출하는 원천 중 하나가 됐다. 물론, 사탕수수 농장(플랜테이션)들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노예 노동이 투입됐고, 이 와중에 선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살던 곳에서 쫒겨났다.

 

프랑스와 영국이 7년 전쟁 끝에 파리 조약 체결차 협상중이던 1763년, 주요 안건이 된 건 당시 프랑스령인 캐나다와 과들로프의 운명이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두 곳을 모두 접수했지만, 어느 쪽을 선호하든 간에 둘 중 하나만을 차지하기로 프랑스와 합의했다. 당시엔 양국 모두 쬐그마한 과들로프를 경제적 노다지이자 세계 부의 주요 원천으로 여겼다. 반면, 캐나다는 볼테르가 “눈덮인 땅뙤기”라고 깍아내릴 정도로 홀대를 받았다.

 

영국이 캐나다를 차지하기로 했던 건, 다름 아닌 과들루프가 그만큼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도 제도에 거점을 둔 영국의 설탕 농장주들은 과들루프와 경쟁하길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 정부는 캐나다에 주둔한 병력을 줄이고 싶어했는데, 여기에는 프랑스가 더는 발판으로 삼을 만한 곳이 없는 이상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덕에 캐리비안 제도에 대해 프랑스가 보유하던 소유권은 크게 요동치게 되는데, 특히 아이티와 과들루프가 그랬다. 이 두 프랑스령 섬에서 노예들은 봉기했다. 특히 프랑스가 1794년 노예제 폐지를 시행하자, 그곳의 농장 소유주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농장 소유주들은 자신들을 지키고자 영국에 기댔다. 프랑스는 이곳에서 영국을 쫒아냈고 반란자들을 제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예제가 재도입됐다. 그러나 아이티와 달리, 과들루프는 프랑스령 식민지로 계속 남았다. 비지니스는 종전대로 굴러갔다.

 

1848년이 되자 프랑스에선 또다른 혁명이 일어났다. 노예제는 다시 폐지되는데, 이는 당시 지역정부 장관 빅터 쉘쩌가 앞장섰던 덕분이었다. 1863년에 링컨이 그랬듯이 쉘쩌는 포고 방식으로 노예제를 폐지했는데, 의회 입법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의 법률적 폐지는 이제 설사 쉘쩌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인사가 후임이 되더라도 번복되진 않았다.

 

과들루프(와 여타 지역)에서 노예제는 불법이 됐지만, 그후 거의 1백 년 가까이 되도록 경제적으로 바뀐 건 사실상 없다시피했다. 농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사탕수수를 생산했고, 백인 소유주들은 전과 다름없이 이윤을 축적했으며, 노예 출신인 노동자들은 전과 다름없이 벌이가 아주 열악했다. 설상가상으로, 농장 소유주들에겐 그렇게 열악한 임금조차 너무 비쌌던 나머지 그들 중 일부는 아시아 지역에서 새롭게 유입된 노동자들로 물갈이됐다. 대량 실업이 만성화하는데,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지속돼왔다.

 

1945년 이후 반식민(주의) 운동의 물결이 도처에서 일자, 프랑스 정부는 과들루프를 해외영토영토부의 관할권으로 통합했다. 본토가 관할인 여타 부처들과 명목상 동등한 위상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본토에서 베푸는 떡밥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종속됐다. 사탕수수 생산으로 인해 지력이 소진되면서 관광업이 그곳의 경제적 근간으로 새로이 자리잡았다. 과들루프 사람들의 수입은 프랑스 본토에서보다 훨씬 더 못 미치는 수준인데도 생활비는 훨씬 더 높았다. 백인소유의 몇몇 독점업체들이 이들한테 필요한 생활용품의 수출입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의 폭발이 일어난 이유, 그러니까 “이윤화”에 대해, 그리고 ‘사실상’ 노예제나 다름없는 현 상황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폭발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들루프 사람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요구항목 중 첫 번째로는 최저임금선에 있는 이들과 노령인 연금수령자들에게 매달 200유로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파업이 발휘하는 힘으로 보건대, 이 요구안은 설령 고용주들 대부분이 격렬히 반대하더라도 이뤄지잖겠나 싶다. 고용주들한테 부과된 몫은 총 200유로 중 50유로에 해당하는데, 그들이 제시한 건 10유로였다. 프랑스 정부에선 나머지 요구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요구안을 받아들이라며 고용주들한테 압박을 가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위기에 대해선 어떨까? 이제껏 (피억압 인민들의) 존엄함을 되찾고자 이뤄져온 반식민(주의)적인 요구들은 외형상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양식화돼왔다. 과들루프에서 펼쳐진 대중운동들 가운데, 이런 요구를 하는 모습은 좀체 찾아볼 수 없다. 세계 도처에서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근 지역에서, 이들 운동 주체들은 독립 국가들한테 실질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하나 같이 얼마나 제한돼 있는지 익히 보아왔다. 아이티가 독립 국가로서 보여온 궤적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과들루프의 운동 주체들은 사회 변혁이 근본적으로 이뤄지기를 원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얼마 되지도 않는 백인 소수층이 휘두르는 사회경제적 권력을 종식시킴으로써 평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이다.

 

세계경제 공황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경제적 요구들을 “사회 전반”에 관한 요구들과 연계한다면, 이는 강력한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몇몇 부유한 국가들에서 은행 몇 군데에 대해 실시하는 국유화 조치들로는 도저히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까지, 과들루프(와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저항 움직임은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돼왔다. 하지만 이들 저항이 훨씬 더 거세지자면,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원문보기 http://fbc.binghamton.edu/252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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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04:02 2009/03/22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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