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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7/31
    화씨 911, 마이클 무어
    레니
  2. 2004/07/31
    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레니

화씨 911, 마이클 무어

 

주중에 "화씨 911"을 보고 또 한 번 느껴버렸다.

 

"화씨 911"은 마이클 무어의 전작인 "볼링 포 컬럼바인"보다 "웃기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 하나 바보 만들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무어가

이번에는 그 대상을 (잘 알려진 대로) 원수 지간인 부시로 잡았으니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잡은 反부시 정서에 근거하여 보면 매우 "웃기다".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무어의 다큐는 좀 산만하다.

주제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데,

"화씨 911"도 역시나 가뜩이나 자막이 많아 정신이 없는데다

주제가 계속해서 필사적인 도약을 해 대니

영화관을 나올 때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좀 나은 게

이미 반전이라는 주제를 알고 영화를 봤었고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나레이션까지 나와줘서

마이클 무어가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지 좀 알 것 같다.

("볼링 포 컬럼바인"의 경우에는 마이클 무어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뭐 "화씨 911"의 주제야 잘 아는 내용이라 그다지 생각을 더 해 볼만한 것은 없지만

또 다시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자본주의와 저항 간의 관계이다.

 

"화씨 911"은 상업 영화다.

물론 할리우드 거대 자본이 개입하진 않았지만

제작과 배급을 거치려면 상업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을 거쳐야만 한다.

지지리도 못사는 플린트 시 출신인 마이클 무어라고 해도

자본주의적 착취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저항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근데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RATM을 생각하면 좀 얘기가 다르다.

이들 노래는 자본들의 입장에서 신경쓰일 만하지 않나?

그럼 좀 경계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너무나 당연하게 소니-컬럼비아와 RATM은 이들 노래를 상품화하고 잘 팔아먹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저항을 상품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항이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것인지.

난 전자에 100만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

(그리고 사실 후자는 좀 말이 안된다.)

 

제니스 조플린의 "Mercedes Benz".

자본주의 물신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벤츠는 이 노래는 자사의 CM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저항한들 자본은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상품화한다.

역시 자본에 독립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대안인가? 난 잘 모르겠다.

 

"화씨 911"을 보고 난 후 가장 안 좋았던 것은

잘 만든 저항 상품을 구입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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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neoscrum님의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통해 '아니메'를 알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어릴 적 보던 만화들이
(특히 마징가나 그랜다이저 같은 거대 로봇 만화들,
그리고 코난이나 은하철도 999같은 SF도 그랬죠)
당시에는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
최초로 일본 만화라는 인식을 가지고 본 애니메이션은
세운상가에서 복사를 뜬 "천공의 성 라퓨타"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의 복사를 거친 후라 조악한 화질+음질을 자랑하는 데다
요즘 DIVX 같이 자막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게 아니라서
당시 활발했던 PC 통신에서 구한 대본(!!!)을 구해 같이 읽어가며
간신히 내용을 이해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퓨타"를 통해 작품마다 독특한 철학들을 지닌
아니메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모조리 구해가며 보기 시작했는데
오시이 마모루를 만나기 전까지
저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최고의 애니 감독이었죠.

 



제가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는
권력과 과학기술 문명에 저항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아 이 단어는 너무 애매하군요)이지만
가족관과 젠더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이 단어는 명확해서 좋습니다ㅡㅡ;)이라는 것입니다.
"나우시카"나 "라퓨타", "원령공주" 등에서 등장하는 가족들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은 그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라퓨타"와 "원령공주"에서는 여성이 리더를 맡고 있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라퓨타"에는 해적(공적인가???) 집단의 삐삐머리 할머니,
"원령공주"에는 제철마을의 군주인 에보시가 리더인데,
이들은 남성화된 여성 캐릭터로서 중성적이죠.
만약 에보시가 남성이었어도 그의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이 작품들의 주인공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한 모습입니다.
일부 캐릭터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은 드러나죠.
하지만 이 작품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함을 요구받고 여성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주인공급 남성 캐릭터들은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죠.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 자체는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그가 만든 캐릭터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아, "원령공주"의 코다마를 제외하곤 말이죠. :)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 훌륭한 감독이고 작품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붉은 돼지", "마녀배달부 키키" 등 역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무척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붉은 돼지"만큼의 사회성을 지닌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애니에서 사회성이 제거되고 남는 것은
불편한 캐릭터들과 판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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