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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잃어가는 것들

neoscrum님의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통해 '아니메'를 알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어릴 적 보던 만화들이
(특히 마징가나 그랜다이저 같은 거대 로봇 만화들,
그리고 코난이나 은하철도 999같은 SF도 그랬죠)
당시에는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
최초로 일본 만화라는 인식을 가지고 본 애니메이션은
세운상가에서 복사를 뜬 "천공의 성 라퓨타"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의 복사를 거친 후라 조악한 화질+음질을 자랑하는 데다
요즘 DIVX 같이 자막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게 아니라서
당시 활발했던 PC 통신에서 구한 대본(!!!)을 구해 같이 읽어가며
간신히 내용을 이해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퓨타"를 통해 작품마다 독특한 철학들을 지닌
아니메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모조리 구해가며 보기 시작했는데
오시이 마모루를 만나기 전까지
저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최고의 애니 감독이었죠.

 



제가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는
권력과 과학기술 문명에 저항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아 이 단어는 너무 애매하군요)이지만
가족관과 젠더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이 단어는 명확해서 좋습니다ㅡㅡ;)이라는 것입니다.
"나우시카"나 "라퓨타", "원령공주" 등에서 등장하는 가족들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은 그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라퓨타"와 "원령공주"에서는 여성이 리더를 맡고 있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라퓨타"에는 해적(공적인가???) 집단의 삐삐머리 할머니,
"원령공주"에는 제철마을의 군주인 에보시가 리더인데,
이들은 남성화된 여성 캐릭터로서 중성적이죠.
만약 에보시가 남성이었어도 그의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이 작품들의 주인공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한 모습입니다.
일부 캐릭터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은 드러나죠.
하지만 이 작품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함을 요구받고 여성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주인공급 남성 캐릭터들은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죠.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 자체는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그가 만든 캐릭터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아, "원령공주"의 코다마를 제외하곤 말이죠. :)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 훌륭한 감독이고 작품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붉은 돼지", "마녀배달부 키키" 등 역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무척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붉은 돼지"만큼의 사회성을 지닌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애니에서 사회성이 제거되고 남는 것은
불편한 캐릭터들과 판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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