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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지난 5월 조정환이, ‘그대는 촛불을 왜 끄셨나요’라는 책의 일부 필자들이 촛불을 비판하는 것은 무능한 좌파들의 불편한 심기 때문이라고 공격하자, 이택광이 조정환의 ‘미네르바의 촛불’이 3류 수필집보다 못하다고 혹평하면서 한달간에 걸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택광은 모두가 부자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처럼, 촛불을 중간계급의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 대통령이나 정치가 비정상적인 것이 고쳐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욕망론은 대중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측면이 있다. 나는 내가 주장하는 소외론이 더 나은 관점으로 보지만 다음으로 미루자.
 
어쨌든 촛불이 중간계급 혹은 소부르조아 운동이고 좌파적 운동이 아닌 것은 명백한데, 좌파운동이 아닌 것을 좌파운동이 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도 문제지만, 좌파운동이 아닌 것을 좌파운동이라고 찬양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택광은 있는 그대로의 촛불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분석평가 하는 것과, 촛불을 비난하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한 것인데, 촛불을 비판하거나 봉기로 평가하지 않으면 운동도 모르는 무능한 좌파라는 조정환의 반론은 불쾌감만 주었다. 조정환이 맑스를 30년간 읽었다느니 네그리를 10년간 읽었다는 소리는 자신의 인격의 수준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결국 논쟁은 촛불이 무엇이었느냐의 규정으로 넘어간건데,
놈현 서거시 촛불의 절대다수가 보여준 추모와 추앙의 감정이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와 같은 담론이나 그에 이은 안중근 추모나 시주모에 쏠리는 것을 보면, 촛불을 반자본, 반체제, 반세계화 투쟁의 담지자인 다중(그것도 빈자의 정체성을 갖는)이라고 찬양하는 조정환은, 이택광에게 뇌내망상증 환자라고 공개적으로 씹히는 수 밖에 없었다.
 
네그리에 의하면 다중은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창조적인 부의 생산자이고, 빈곤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엄격하게 정의한다. 또한 다중지성으로 반자본 반세계화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행할 담지자이기도 한다.
결국 촛불이 다중이라는 주장은, 촛불이 노동자이거나 생산자로서 빈곤의 정체성을 가지고 광장에 나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촛불이 광장에 나온 것은 명박으로 상징되는 통치세력에 대한 분노나 정의감 때문이지, 가난해서(빈자의 정체성 혹은 분배문제) 나온 것이 아님은 명백하지 않은가? 쇠고기나 국가행정의 소비자라면 혹시 몰라도 생산자와 노동자의 정체성이 없었던 것도 명확하지 않은가?
 
(촛불이나 4대강, FTA 세계화, 전쟁반대 등의 의제나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의 문제는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제들이고, 노동자나 생산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혹은 중간계급의 운동으로 현상한다. 착취관계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자본과 국가의 수탈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대중운동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본과 국가의 운동을 분석하는데서 출발해야 하는데, 연초부터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약간의 문제가 남아있다.)
 
더구나 명박보다 관대한 통치자의 상징인 놈현을 추앙하는 것이 부르주아 대리주의의 극단(이것은 결국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에 경도된다)인데-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혹은 자본이나 체제나, 국가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 아님은 최근의 후보단일화운동이나 시주모와 같은 친노세력과의 결합에서도 명백하지 않은가?
 
결국 촛불은 네그리와 조정환이 정의한 반자본, 반체제, 반세계화 투쟁의 담지자이고 빈자의 정체성을 갖는 다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슨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코뮌에의 지향을 내포하는 다수의 촛불이 있었다느니, 촛불이 다중이었다고 주장하고 창조적이었다고 예찬하면서, 평범한 시민들의 운동을 자칭 첨단 좌파운동인 것처럼 혹은 그런 경향이 있는 것처럼 찬양하는 수작은, 마치 김정일이 촛불을 보고 드디어 남조선 인민이 미제의 앞잡이들에게 떨쳐 일어났다고 하는 소리와 비슷하다며 순진한 대학원생들 현혹시키지 마라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택광과의 논쟁을 보면, 조정환이 ‘미네르바의 촛불’이라는 글을 썻다가 3류 수필집이라고 혹평당하자, 비겁한 반론이나 펴다가 완패한건데, 학자들간의 논쟁에서 까마득한 후배에게 정신병자로 공개적으로 규정당하고도 대꾸도 못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것도 감정적 매도가 아니라 학문적 결론으로…
 
기실 ‘미네르바의 촛불’의 머리말에는 조정환이 글을 쓴 입장과 목적이 밝혀져 있다.
‘보수세력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가 신성동맹을 맺어, (위대하고 영원한) 촛불을 광기나 유령이나 중간계급운동으로 공격하면서 관에 넣고 못질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말은 조정환이 ‘피라미드와 촛불’이란 글에서 ‘사노준 사노련까지 대의주의 세력이고 대다수 촛불은 자신과 같은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적 감수성을 가졌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작년 여름 광화문에는 촛불의 깃발만이 아니라 온갖 좌파와 운동권의 깃발이 함께했다. 이후에도 기륭이든 용산이든 쌍차에서든 좌파들이 촛불을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들을 촛불과 대립시키면서, 촛불이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을 때 국가권력과의 싸움이 무의미하다면서 구경이나 하던 자들이 얼렁뚱땅 자신들만이 촛불의 벗인 냥 나선다. 좌파와 운동권은 촛불의 적이고 자신만이 촛불의 동지라는 이런 수작만큼 뻔뻔한 모략질과 이간질이 있을까? 조정환은 인생을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 사실 조정환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하기 그지없는 과장과 왜곡 그리고 소부르조아적 선동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3류 수필집보다 못하다고 소리를 듣는거고…
 
네그리와 조정환의 주된 주장은 좌파나 운동권이나 사회주의 세력들의 주장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을 건설하자고 할 때 투쟁이 무의미하다면서 도주 탈주 혹은 자율공간이나 얘기한다든지, 좌파들이 진정한 개개인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 우리들이 맺어야 되는 사회적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탐구하고 투쟁할 때, 절대적 민주주의나 차이에 대한 존중 운운하면서 결국 속박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이런게 소부르조아적 가치이다)를 선동하면서 단결하지 말고 투쟁하지 말자고 한다.
 
우리 모두의 사회를 우리 모두가 단결해서 바꾸자는 집단주의 혹은 집단적 민주주의(그속에서 관철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한사람 한사람의 소중한 개인의 존중!-맑스가 말하듯 개개인의 자유로운 연합이란 이상이나,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성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적 관계의 극복을 위한 집단주의적 실천-혁명적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개인주의적인 소부르조아지의 삐뚤어진 심성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신도가 아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대중을 위해서 투쟁한다. 투쟁과 실천 속에서 반성하고 검증받고 고쳐나간다는 게 맑스주의의 기본인 실천의 변증법이다.
결국 잘못된 이론에 기반했다는 맑스주의자는 항상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실천하고 반성하면서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측면을 고쳐가지만, 아나키스트와 스탈린주의자도 실천하면서 자기 과오를 고쳐가지만, 실천의 철학이 아닌 자발성주의(결국 회피주의)인 네그리주의자는 실천이 무의미하므로 좌파와 자신들의 대립점(즉 좌파나 맑스의 부정적 측면)을 밝히는 것이 존재이유가 된다. 여기에서 그들이 촛불에 아첨하면서 좌파를 모략질하고 대중이나 촛불과 이간질시켜야만 하는 슬픈 운명이 밝혀지는 것이다.
 
결국 용산과 쌍차 혹은 촛불에서 보듯, 좌파는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하면서 투쟁하고 있을 때, 단결해서는 안되고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자칭 첨단 좌파인 조정환은 소부르조아적 가치나 선동하면서 좌파를 씹는 일이 자기 운명일 수 밖에 없다.
 
고전은 차치하고 허다 못해 스탈린 시절의 철학교정에도 (경제나 토대가 아닌!)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반작용을 언급하고 있고, 그람씨도 시민사회론과 헤게모니론(이 두 이론은 경제결정론의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맑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생산력우선주의(이것은 경제가 발전되야 잘 살수 있다는 박정희의 경제성장론과 동일한 통치선전용이다)를 주장한 것 역시 경제결정론과는 맥락이 다르다. 맑스주의가 국가주의라는 비난이나, 국가에 대한 사회의 즉자적 대립과 독립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는, 국가가 사회로부터 태어나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켜간다는 국가의 폐지와 사멸에 관한 엥겔스와 레닌의 통찰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네그리와 조정환은 물론 그의 제자들까지도 맑스주의를 비난하는 글을 발견하면 기쁜 마음이 되어 날뛴다. 고전 한번 읽어보지 않은 채로 그 주장의 실천적 함의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뉴라이트 게시판 수준의 모략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한심한 소부르조아적 이상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즐거워한다.
 
현실과 실천을 보는 눈 그리고 반성과 비판의 방법론은 혼자 힘으로 얻어지기 어렵다. 인류의 이상을 위한 이론과 실천은 탁상머리 지식의 범주가 아니다. 지식의 다과에 달린 문제도 아니고 고전을 읽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판적 지성을 얻고 싶다면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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