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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성론

 

다중지성론
 
다중지성 혹은 떼지성이란 개념은, 대중은 스스로 본능적으로 가장 창조적이고 훌륭하게 지성에 도달하고 실천한다는 주장이다.
다중지성과 관련하여 대중의 자율, 자주성, 창조성은 고무되어야 하지만, 대중의 자율을 (변혁을 추구하려는 세력의) 목적의식적 노력에 대립시키고 적대시키려는 조정환의 태도는 이택광과의 논쟁에서는 반지성적이라고 비판되었다. 기존 운동권을 비난하고 대중을 예찬하면서 양자를 대립시키려는 이런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가?
 
대중의 자발적인 노력이 창의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공이 많으면(다 중심 혹은 중심없음)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과, 대개는 목적의식적인 집단적 노력이 훨씬 더 창의적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자발성에 맡겨버리는 다중지성론의 한계는 명백하다.
 
중심이 없는 매끄러운 다중 속에 노동계급의 주도적이거나 중심적인 역할을 부정하려다 보니, 다중지성이 발휘되어 반자본과 반세계화를 위한 대탈주나 봉기가 일어날 날을 기다리자는 입장이니, 자연발생적 저항을 예찬할 수 밖에 없겠지만, 투쟁을 준비하고 키워나가려는 중심과 계획이 없는 저항의 한계는 명백하다.
 
당장 용산만 하더라도 여러 투쟁단체들이 범대위를 구성하고 연대하여 목적의식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한계에 부딛치고 있는 판에, 이러한 노력을 하지 말고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기다리자고? 다중지성에 맡기자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
네그리가 주장하듯 규율과 위계적 구조를 갖는 조직인 범대위가 비민주적 조직인가? 대중에게 혹은 소속한 개인 활동가들에게 억압적인가? 그들은 왜 현실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다중지성론이란, 뭉치지도 말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으로 집단적인 투쟁과 계획의 중심도 세우지 말고, 다중의 창조적 자발성에 방치하자는 주장이 된다. 다중지성이 훨씬 창조적이고 훌륭하다면 혁명세력이 앞장서거나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촛불시민 하나 하나가 스스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얘기지만, 만약 민주노총이 오천이나 만명만 앞장서서 밀어부쳤으면 투쟁이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의 자율과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뭉치지 말자는 주장(개인주의)과 규율을 갖는 대중적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집단주의)의 차이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내버려두면 대중은 스스로 알아서 잘 할 수 있다는 수작이 멋진 말처럼 들리고 참으로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민주적인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작년의 촛불항쟁이든 용산투쟁이든 거대한 적과의 투쟁 앞에선 이상한 주장이 되어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국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대중 혹은 개인들의 자율과 자발성에 맡기자는 수작은 목적의식적 투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그 반민주적 성격을 바꿔나가자는 노력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의 궤변이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남미에서 반동권력에게 대중을 맡기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차치하고,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건 맑스가 밝힌 코뮤니즘 사회의 이상이다. 혹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라고도 표현한다. -을 이루는 대중의 자기지배의 이상의 실현방법에 대하여, 국가나 권력을 주관적으로 부정하든지(자율주의) 혹은 즉각적으로 부정하자든지(아나키즘) 그런 주장과 실천이 오히려 정반대의 현실 즉 반동적 결과밖에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은 더 논쟁의 대상도 안되는 사안이다.
 
개개인의 진정한 자유란 대중을 억압하는 계급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들 억압적 계급과 국가는 개인이나 소그룹이나 네트워크로 묶인 공동체의 힘으로 극복되거나 타도될 수 없다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가? 오직 오직 대중의 집단적 힘과 조직적 투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그 조직이 어떻게 민주적인 조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인데-나는 그것을 파리코뮌이나 소비에트에서 보여준 혁명적 민주주의 혹은 평의회 민주주의로 보지만-, 이런 집단적 노력을 부정하는 일체의 주장은 인류의 진정한 해방을 떠들지만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투쟁을 방해하는 주장이 된다.
 
단결하고 투쟁해야 할 때 개인의 자유, 자발성, 자율을 운운하며 뭉치지 말자는-뭉치면 위계제가 발생하고 개인의 억압이 된다는 이상한 소리가 네그리의 핵심주장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결국 소부르조아적 헛소리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투쟁하는 사람들이 네그리와 조정환의 주장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가령 해고는 살인이라며 투쟁하는 쌍차 노동자들에게 기껏해야 자본의 노예가 되려는 투쟁이라고 빈정댄다든지, 촛불들이나 철거민들이 공권력의 방패와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을 때, 혹은 FTA(세계화)로 절망에 빠진 농민들이 맞아 죽거나 자살을 하고 있을 때, 국가권력과 싸우거나 (세계화에 저항하는) 국지적 기획이 무의미하다면서, 투쟁하는 조직(투쟁을 책임지고 앞장서는 결국 혁명적 조직이나 당적 조직)은 죽어도 만들어서는 안되고, 자율공간이나 만들자고 헛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는 판에 국가와의 싸움이 무의미하고 자율공간이나 만들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지만, 반자본의 의식은 자본이나 국가에게 핍박받거나 투쟁할 때 생기는 것이지, 자본으로부터 도주한 혹은 절연된 공동체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다. 기껏해야 공동체에 안주하는 소부르조아나 만들 뿐,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자본과 시장에 적응할 수 밖에 없고, 못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로 결론이 난 사안이다.
 
노동을 거부하고 탈주하자라는 수작이 멋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 속에서 삶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개 같은 수작이다. 투쟁의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을 참다운 실천이나 투쟁이라고 포장하여 요사스러운 말로 전선을 교란시킨다.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서 노동운동을 포함한 모든 생존권투쟁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이고 적의 존재를 인정하는 개량적 투쟁이다. (다만 타협적이냐 비타협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건 투쟁의 ABC이고 한번이라도 싸워본 사람이라면, 한번이라도 생존을 위협당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네그리와 조정환의 말에 구역질이 날 수 밖에 없다.
 
자율주의건 아나키즘이건 처음 들을 땐 혹은 얼핏 들을 땐 참으로 멋진 말로 생각되겠지만, 진정으로 인간과 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아니 현실의 자그마한 투쟁에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상식과 경험에 반한다는 것, 그들의 주장대로 실천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되어버린다는 것,
진정한 인간과 인류해방의 이상이란 집단적 노력을 혐오하는 개인주의적 소부르조아적 발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이 관철되는 집단주의적 노력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 억압적인 계급과 국가의 지배하에 있을 때 개개인들이 주관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자율주의) 혹은 즉각적으로 파괴해버리자는 무책임한 주장(아나키즘)이 오히려 억압세력에게 복무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진실로 억압받고 소외받는 대중과 한 순간이라도 진지하게 함께 투쟁해보면 안다는 것. 누군가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갖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혹은 투쟁과 저항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 자신과 다른 주장에 장점도 있지 않을까 곰곰히 경청할 필요는 있겠지만, 세상에 일리도 없는 주장은 없다는 것과 수많은 나뭇잎 중 어느 하나가 멋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본질적 주장 혹은 그 몸체와 뿌리를 봐야 한다는 것.
 
핵심은집단적단결의노력속에서대중의자주성과창조성그리고집단지성을어떻게보장할것이냐인데, 그렇다면목적의식성과집단적단결을부정하고수평적네트워크를얘기하면서자발성(다중지성)만을찬양할것이아니라, 자발성과목적의식성을대립시키지말고통일시켜야하고, 집단적노력을불가능케하는절대적민주주의가아니라대리주의를극복한직접민주주의를추구하는혁명적민주주의여야한다는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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