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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분석]2011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아랍 민중들의 항쟁
(이글은 원래 3월초에 토론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으나 최근 변화를 반영하여 수정함.)
1월 이후 반정부 시위 발생국: 알제리, 수단, 오만
2월 시위 발생국: 리비아, 바레인, 예멘, 요르단, 이란, 중국
튀니지와 이집트, 레바논에서는 장기 독재자 퇴진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과 이라크 총리 누리 알 말리키는 재선 포기 발표
3월 카다피의 민중학살과 제국주의의 개입. 바레인 왕정에 대하여 사우디 등이 진압군 원조
1. 배경:
흔히 이번 항쟁의 배경으로 장기에 걸친 독재와 빈곤 특히 최근 세계 경제위기 여파로 식량가격 등 물가고와 실업 등을 꼽고 있다.
그런데 거시적으로 보면, 2008년 세계 경제위기는 2009년과 2010년 재정위기에 직면한 남부 유럽의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야기하였고, 자본의 일자리와 복지축소(연금개악) 등의 공격에 저항하는 프랑스 등의 노동자 계급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 2011년 2월 미국 위스콘신 투쟁도 공공부문 긴축에 반대하는 투쟁이다.(작년의 중국과 방글라데시 등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파업은 이들 국가가 세계경제 속에서 상대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양극화와 물가폭등 등에 기인한 투쟁으로 이들 투쟁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돌리기는 무리이다. 한편 유럽과 비교할 때 중남미 제도좌파 혹은 중도좌파 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저항이 없는 것은 반신자유주의적인 따라서 친민중적인 분배정책 등의 영향일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작금의 위기를 G20등의 회의를 통해 조정 관리하려 하지만, 위기의 근본원인인 세계적인 상대적 과잉자본(투기자본: 실물경제가 뒷받침 되지 않는 가운데 이들은 파생상품 등 금융투기를 위주로 하여 서민과 빈곤국에 대출하고 파탄시켰음.)에 대한 본격적 규제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기를 서로에게 전가하기 위해 무역과 환율전쟁(양적 완화정책도 그 일종임)을 하는 중이고, 이 와중에 경제위기는 기층민중과 후진국에 전가되고 있다.
아랍권의 반동국가들은 이승만이나 전두환과 같은 전형적인 친미부패독재정권으로, 이들 정권은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의 패권주의에 협조하고(친서방, 친이스라엘, 반팔레스타인, 반 알카에다), 석유 등 거대 다국적 기업의 파트너로서 기생하면서, 국부를 빼돌리고 생산적 투자를 게을리 함으로써, 기층민중의 빈곤과 일자리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권위주의적 정권의 억압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유린하였고, 한편으론 유의미한 반대세력의 성장도 억제되었다.(이승만 시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됨)
1970년대 이후 강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나마 조금 있던 민중에 대한 석유이익의 분배를 회수하고 국유기업의 사유화 등을 단행하였고. 이들 국가는 광범위한 실업이 만연한 가운데(도시빈민 또는 도시 하층민으로 나타남) 교육받은 젊은층은 선진국 경제의 위축으로 더욱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불만층을 형성하였다.(4.19가 전망을 찾을 수 없는 학생들이 앞장 선 반란인 점과 비슷. -이들 나라는 유럽 이주노동자들의 공급처이기도 함.) 자국 내에 충분하고 좋은 일자리가 없는 가운데 실업 특히 청년 실업은 심각한 수준이고, 군부 독재의 심각한 수탈은 양극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현단계 아랍민중의 항쟁은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이 2009년과 2010년에는 주로 유럽에서, 그리고 2011년에는 사하라 북부와 중동의 아랍권에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환율전쟁의 영향과 투기자본의 석유와 식량 등의 매점매석 등은 물가폭등을 야기하여 제3세계 민중들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결국 2011년 아랍민중의 항쟁은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인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과 실업 등 일자리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공황을 계기로 부패 무능력한 군부 족벌 독재의 무능력과 횡포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아랍민중들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2. 항쟁의 전개 양상
*튀니지 혁명의 정점이었던 1.14.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파장이 중동의 독재국가들 알제리, 예멘, 수단, 요르단, 모로코, 바레인, 이스라엘 등을 흔들기 시작하고 중국과 이탈리아에도 저항을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를 중심으로 살핀다.
2-1. <튀니지>
인구 1038만명, 87년 이후 장기집권 중인 벤 알리는 튀니지를 자신의 사유재산처럼 강탈하고(약 5억 파운드(약 6조2000억 원) 축재) 온갖 사치를 부렸다. 튀니지 민중들은 분노는 부정부패한 정권과 낮은 임금, 높은 실업률, 높은 물가인상률이 결합돼 강력한 혁명의 분출로 터져 나왔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2010년)이지만 청년층 및 지방의 실업률은 40%를 웃돈다. 올 들어 과일 채소 등 식품값이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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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학 졸업 후 일자리가 없던 청과물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당시26세)가 경찰 단속 이후 생계가 막막하자 분신자살을 시도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벤 알리 정권은 폭력으로 진압하여 시민 60명이 사망하였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자 정권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거리에 탱크와 무장 군인들이 배치되고 시위대와 청년 등에게 경찰과 군대가 폭력을 자행하였다.
1/6. 수천명의 노동자들은 분신한 보우아치치의 1.05. 장례 후 확산된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대중파업을 벌이고 연대하였고, 튀니지 노동연맹 UGTT의 시디 보우치드 지역본부는 그날부터 사회적 봉기에 몰두하였다. UGTT는 여러 방법으로 시위들을 조직. 이들은 총파업으로 헌법 개정과 노동조합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였다.
1/14 항쟁의 정점에서 중무장한 군인들은 정부 청사 앞에 모인 5천여명에 군중을 향해 총을 쏘라는 벤 알리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벤알리는 도주하고 여야통합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1/17 모하메드 간누치 총리는 23인의 새내각 구성안을 발표하였는데, 벤 알리 아래 구정부에 있던 6명의 장관이 과도정부에 포함되었고, 이에 내각에 들어간 UGTT 소속 3명의 장관은 헌법개정, 집권당(RCD) 해체 등을 요구하며 과도내각에 반발해 사퇴하였다. (행정구역 중 6개에서 총파업이 진행. 5일 동안 주로 가난한 지역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청사 앞에서 옛 독재자 벤 알리와 연결돼 있는 최근 정부에 맞서 시위하기 위해 농성. 최대의 요구는 낡은 정권의 모든 잔재 청산)
2/7. 집권여당이던 RCD의 활동 정지와 해산이 발표되었고, 2.20. 수천명의 시위자들이 튀니지에서 다시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들은 수도 튀니스 정부청사 방향으로 행진했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고사격하였다.
2-2. <이집트>중동의 선진국에서의 혁명
* 이집트, 거대 공업에 집중되고 대규모인, 중동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
* 무바라크는 1981년 대통령 직에 오른 뒤 30년을 집권했던 장기 독재자
* 이집트 정부의 ‘신자유주의’와 저항운동의 출발
- 2000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전을 수용하여 전력공급회사 15%를 사유화하고 석유회사 40%를 사유화
- 2003년 이집트는 극심한 물가고. 화폐가치가 급락한 탓. 몇몇 부문에서는 물가가 40%나 급등.
- 2003년 새로운 노동법이 통과되어 노동자들의 권리가 향상되기는커녕 고용주들이 피고용자를 마음대로 해고하고 임시계약을 하거나 직장폐쇄를 일삼았으며 모권과 어린이 케어도 포기
- 2004년 이집트 변화를 위한 운동(케파야), 샤밥이라 불리는 청년 운동. 그 해 9월 샤밥의 회원들인 35 명의 젊은 남녀들이 무바라크 재선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대통령 선거를 보이콧.
- 2005년 5월 7일 노동자들이 많은 정당과 우파 지지 세력과 협력한 형태였긴 하지만 처음으로 정치적인 몸짓을 조직하기 시작. 지식인들과 중산층들 중심의 케파야 운동이 선거에 관여.
- 2006년 12월과 2007년 9월 엘-마할라 파업에 72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이집트에 노동자 계급 투쟁이 귀환하기 시작.
- 2008년 4월 6일 재택파업으로 이어졌다. 이 때 페이스 북이 등장.(‘April 6 Youth’운동)
- 2000년대 중반 이집트 노동자들의 공공부문 일자리는 110만 개에서 40만 개로 줄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산업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변하면서 산업지대가 새로운 도시로 옮기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노동자 운동은 그 이전의 성공과 실패 혹은 한계를 넘어 공공부문 노동자, 농민, 자유 직업 등 노동자 계층이 넓어지고 새로운 조직 형태가 출현하는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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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튀지지 혁명의 영향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29년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고, 1.18. 세사람이 분신하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April 6 Youth’ 운동은 “경찰의 날”인 1월 25일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호소하였고, (네가지 요구. 첫째, 비상계엄령(1981년)의 해제와 사법부의 독립, 둘째, 고문과 인권탄압으로 악명높은 내무부 장관의 해임, 셋째, 대통령 임기의 제한을 비롯한 정치개혁, 넷째, 지난해 11월 대규모 부정선거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 며칠새 9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지지를 표명하고 이집트 전국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1/25, 이집트에서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무바라크 정권에 맞서 시위하였다. 카이로에서만 1만5천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고 알렉산드리아, 아수안, 만수라 그리고 이스마일리아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자들이 함께 거리를 점거하고 행진하였고, 다시 이슬람 교도들이 합동예배를 드리는 안식일인 금요일(1/27)에 ‘진노의 날’을 갖자고 요청하였다. 최대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을 포함한 모든 야당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시위에 참가한 즉시 수백명의 지도자들은 체포 구금되었다. 1/27-28 시위로 62명 사망하였고, 1/30. 이집트 독립노동조합연맹(FETU) 건설하고 전국 총파업 호소하였으며, 2/1. 이미 총 300명 이상 사망하였고, 이집트 군부는 시위대에 무력사용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2/2 최대 반정부 시위인 100만명 행진에서 친정부시위대와의 충돌로 카이로 15명, 알렉산드리아 52명, 수에즈 13명 살해되었다. 2/4. 수십만이 시위하였고, 이날 5,000명이 부상하였다. 2/5. 이집트 총리는 강제해산 않겠다고 발표하였고, 2/6-2/7. 야권은 정권교체협의 25인 위원회 구성하고 개헌위원회 등 설치에 합의했지만 시위주도단체는 정부와 협상을 거부하고 혁명방어위원회를 발의하였다. 2/8. 두번째 100만인 행진과 수에즈운하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무바라크는 2/11. 군에 권력이양을 발표하고 2/12. 사임하였다. 2/18. 승리의 행진이 있었고, 군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립노동조합연맹은 파업을 계속하였다. 군부는 양원을 해산하고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월 내에 선거와 정권이양을 발표하였다.
3/9 이집트 전체 인구 8000만명 가운데 10%를 차지하는 기독교 분파인 콥트교도는 무슬림들의 교회 방화에 항의하고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콥트교도인 수천명이 카이로 모카탐 지역에서 집회를 벌이다가 총과 곤봉, 칼 등을 든 무슬림들과 충돌하였다.
3/15 이집트 군사 과도정부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고문 등으로 악명높았던 국가보안청을 해체한다고 15일 발표. 대신 국가보안대라는 이름의 새 정보기구를 창설.
3/19 군부가 마련한 헌법개정안 국민투표 41.2% 참가 77% 찬성으로 통과-대통령 4년 중임제와 60일 이내 새 의회구성-옛 여당이던 국민민주당과 이집트 최대 야권그룹인 무슬림형제단에게만 유리
2-3. 리비아, ‘내전’과 ‘제국주의의 개입’
* 카다피는 한 때 반미의 선봉처럼 행세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래 아프리카에서 알카에다 세력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전폭 협조하겠다며 제국주의와 유착하기 시작. 그 때부터 서방의 다국적기업들이 리비아 석유자원에 진출하여 이권을 획득했고, 카다피 정권도 IMF 지침을 받아들여 국유기업 민영화와 식량 보조금을 비롯한 공공지출 대폭 삭감을 단행하는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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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16 제2도시 벵가지와 인근 알바이다에서 반정부 시위 시작
2/17 벵가지와 알바이다에서 시위대 8명 사망(카다피 정권에 대한 분노의 날 선언). 수도 트리폴리 남서쪽 145km 떨어진 젠텐에서 시위 발생, 시위대 수명 체포, 경찰서 관공서 등 방화
2/18 시위 사망자 40명 돌파 추정. 시위대 벵가지에서 라디오 방송국 방화. 정부, 수도 트리폴리의 페이스북 봉쇄
2/19 시위 사망자 80명 돌파. 벵가지서 보안군 발포로 장례식 참석자 최소 15명 사망
2/20 사망자 최소 수백명 추산. 카다피 둘째 아들 사실상 내전 경고, 강경진압 선언. 군대 차량과 무기를 들고 있는 시위대가 장악한 벵가지는 사실상 전시 상태. 군대의 일부가 시위자들의 편에 합류. 트리폴리에서 반정부 시위 시작, 보안군 발포. 미스라타에서 아프리카 용병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
2/21 벵가지와 트리폴리 등에서 보안군과 시위대 충돌 계속. 헬리콥터와 전투기를 통해 시위대 공격. 내전으로 비화
2/23 카다피가 국영 TV를 통해서 정권을 지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호소
3/1 리비아 국가원수의 친위군이 수도 인근의 2개 도시를 반정부 세력으로부터 탈환
3/5 반정부 세력 벵가지에서 국가위원회 설립
3/12 아랍연맹은 이날 이집트 카이로에서 22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이 참가하는 비상회의를 열어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요구했다.
3/16 정부군 벵가지 인근까지 진격
3/17 유엔 안보리 군사적 개입승인(1973호)
3/19 미영프 등 5개국 미사일 공격과 전투기 공습. 아프리카연합 AU(52개국과 서사하라)는 공중폭격의 “즉각적 중지”를 요청하고, “(리비아에 대한) 어떠한 외국군의 군사개입”도 거부한다고 성명
3/20 아랍연맹(AL) 아므르 무사 AL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22개 회원국을 긴급 소집하고 많은 수의 리비아 시민들의 희생을 이끌 수 있는 연합군의 폭격 중단을 요청. 이집트도 이날 국제사회의 군사공격에 반대 입장을 밝힘. 카타르는 군사작전에 참여하겠다고 선언. 무사 사무총장은 이날 "이번 공격은 시민들에 대한 폭격"이라며 "현재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당초 비행금지구역 설정 목표와는 다르다"고 비난
2-4 기타 국가들-에멘, 시리아, 바레인
예멘-1인당 GNP 2600달러 인구 45%가 빈곤선. 철권 독재자 살레는 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90년부터 통일 예멘 대통령. 미국과 함께 반 알카에다 전투, 사우디 군대와 함께 이란이 지지하는 북서부 시아파 반군과 교전 중
3/16 수도 사나에서 반정부 시위. 군경 및 친정부 세력과 충돌해서 120명 부상-최류탄 고무총탄, 실탄, 단검, 신경가스 사용설까지 나옴
3/18 금요기도회 마친 후 시위대 수천명이 살레 대통령 즉각퇴진 외치며 시위중 살레 지지자와 경찰의 총격으로 52명 사망 270명 부상. 정부내 인권장관 등 이탈
3/20 수만명이 장례식에 운집. 정부는 탱크 동원 대통령 궁 방어. 군지도부 5명 반 살레 진영에 가담
3/22 살레 연내 사임에 동의
시리아-시리아는 1963년 이래 계엄법 지속. 1978년부터 하페즈가 철권통치 후 사망으로 2000년부터 아들인 바샤르가 부자승계를 통해 일당 독재를 유지해 옮
3/18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에서,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된 학생 15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보안군 발포로 5명 사망
3/19 사망자 장례식에 수천명이 참석 ‘혁명 일어나라’ 등을 외치며 시위-경찰은 다라의 통신을 끊고 봉쇄하고 삼엄한 경계태세
바레인
3/13 수천명의 시아파 강경파 시위대가 도로들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탄 등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지만 결국 시위대 강제 해산에 실패. 부상자 수백명 발생. 이들 시위대는 14일에도 도로들을 점거한 채 왕정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
3/14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걸프협력협의회(GCC)의 연합군이 바레인 민주화시위에 개입.-(사우디의 수니파 왕가는 동쪽 인접국인 바레인에서 시아파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그 여파가 사우디 내 시아파의 반정부 시위를 악화시킬 것을 우려해 왔다. 사우디는 1994년에도 시아파의 반정부시위 때도 바레인에 군사 개입한 적이 있다. 협의회는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바레인 및 오만으로 구성돼 있고, 지난 10일에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소국인 바레인과 오만에 모두 200억달러의 재정지원을 약속하는 등 바레인 왕정 등에 대한 확고한 지지 입장을 밝혀왔다.)
3/15 3개월 기한의 비상사태 선포. (바레인은 전체 인구 75만명의 70%가 시아파임에도 수니파인 알칼리파 가문이 200년 가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현재의 민주화 시위도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불만이 터져나온 종파적 성격도 강하다. 사우디도 바레인처럼 수니파가 지배하고 있지만, 바레인 인근의 동부지역에서 시아파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3/16 12시간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시작. 수니파 정부는 3개월 시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하루 만인 16일 수도 마나마의 진주광장에 탱크와 헬리콥터를 앞세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시위대를 강제해산. 일부에선 실탄 발포 주장도 나왔다. 이날 충돌로 양쪽에서 6명이 숨졌고, 상당수 야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도 잇따랐다.
3/18 장례식에 시위대 5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시트라 지역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시위대는 반정부 구호와 더불어, 사우디가 병력을 보내 간섭하는 것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3. 항쟁의 양상 정리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튀니지의 경우 교육받은 청년실업자의 분신이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과 군부의 폭력에 맞서 민중들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군부의 이탈을 부르고 벤 알리는 도망갔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은 간누치로 상징되는 구세력이 선거일정을 제시하며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고, 여기에 타협적인 노조 상층부를 제치고 투쟁적인 지역노조가 구세력의 청산을 이끌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 세력을 앞세운 구세력 연합인 과도정부와 지역노조가 선도하는 민중간의 세력다툼의 양상이다. 튀니지에서의 시위들은 대부분 노동조합 건물 앞에서 시작됐고, 지역에서의 총파업 물결이 결국 벤 알리의 실각으로 이끌어냈다는 점과 현재도 과도정부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조직노동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임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경우는 민중의 거센 항쟁에 군부가 등을 돌림으로써 무바라크가 퇴진하고, 군사위원회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고, 무바라크 체제의 핵심적인 수혜 집단이자 수호 세력이라는 약점 때문에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 퇴진을 통해 드러난 민심을 전부 수용할 수 없는 처지다. 따라서 시위대에게는 '자제'를 요구하면서 파업 사태에 대해서는 단속 의지를 내보이면서 노동계급을 배제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번 시위 과정을 통해 거리에서 가장 많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보안경찰과 친무바라크 깡패들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이들 노동자들이다. 이번에 무바라크를 퇴진시킨 것은 지난 18일간 이어져 온, 연속적이면서 거대한 대중시위이지만, 실상 2월 초부터 무바라크가 퇴진한 2월 11일 사이의 팽팽한 대립 관계를 시위대 측에 유리하게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파업 동참이었다.
리비아의 경우 반제 반미 민족주의를 앞세우고 정권을 잡은 카다피가 석유로 얻은 부의 재분배 등 진보적인 정책을 펴다가, 9.11을 배경으로 경제봉쇄를 풀고 친서방, 반 알카에다의 입장으로 선회하고 각 부족을 분할통치하면서 반민중적이고 약탈적인 족벌독재로 변질되었다. 현재 친정부 군대와 반정부 세력 간의 다툼은 내전의 양상을 띠고 있는 바, 과도정부의 헤게모니는 카다피로부터 이탈한 부패세력(친서방 친미적)이 주도하고 있고 여기에 진보적 중산층과 기층민중이 이들의 친서방 행보(군사개입 요청)에 반발하면서 내부동력을 구성하고 있다. 반정부군이 궤멸위기에 처하자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이 석유와 이권을 노리고 제국주의 간섭전쟁으로 비화하였다.
4. 항쟁의 분석과 평가
이상으로 보는 바와 같이,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특히 제3세계 민중의 삶을 유린하면서 반민중적인 장기부패독재정권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아랍민중의 폭발로 나타났다.
<출연자들-제 세력들>
항쟁의 주역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보듯 빈곤과 실업에 시달리는 기층민중이고 교육받은 젊은 층이 촉발한 측면이 있지만 결정적 힘은 조직노동자들이었다는 점과 이들이 도시하층민과 함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을 넘어 섬으로써 독재자의 퇴진을 가져왔다는 점과 항쟁을 전진시키는 힘 역시 조직노동자들이 결정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한편 구지배세력은 얼굴마담을 해고했지만 여전히 총체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 노동자계급을 배제하면서 선거일정 등의 제시로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형식적 민주주의로 수렴하려는 중이고,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와 부합한다.
아랍민중은 반독재의 과제만이 아니라 반제와 반자본(반신자유주의)의 과제가 있음에도, 친미 친서방 친자본(친기업)의 군부와 (체제의 하위 파트너였던) 자유주의세력을 아직 척결하지 못하고 있고, 무슬림형제단으로 표현되는 소부르주아 운동세력은 반미적 감정은 있을지라도 터키형(친서방 신자유주의정권)을 추구하고 있는 바, 결국 항쟁은 군부와 친서방 자유주의세력과 불철저한 소부르주아 세력 그리고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들의 헤게모니의 다툼이고 현재 진행 중이다.(그러나 군부주도의 헌법개정안의 통과와 형식적 민주화 일정에서 보듯 노동계급과 민중의 헤게모니가 관철되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걸림돌은 각종 원조와 형식적 민주주의로 수렴하려는 중동 패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과 유럽이다. 한편 알카에다는 이번 항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못하였다. 결국 알카에다는 대중적 기반이 없고 대중노선에 기반하지 않은 감상적 반미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정학적, 정치적, 군사적 함의>
제국주의 세력 특히 미국은 석유패권만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등 지정학적 군사적인 이유로도 중동을 통제해왔다. 반미적인 이란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앞세워 긴장을 조성하고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며,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집트 군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무바라크는 매년 13억불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뒷문을 지켜주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도록 방조하였다. 따라서 만약 이집트에 반미 반제적인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패권정책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기생적인 친미군부 주도하의 헌법개정은 노태우와 같은 형식적 민주화로 수렴되고 있다. 투쟁을 전진시켜야 할 이집트 노동계급은 아직 약하다.
또한 튀니지와 이집트에 친민중적인 정권이 들어선다면, 미국의 비호 하에 수십년간 왕정과 독재를 행사해온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친미정권도 대중의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나라의 지배계급은 강경한 진압과 함께 민생과 시민적 자유부문에서 점진적인 양보를 모색하겠지만, 계급투쟁은 점차 격화될 것이다.
한편 그동안 독재정권을 양육하여 패권을 행사해 온 미국은 반미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시위대를 지지하는 언사를 보이면서 허구적 민주화로 수렴하려고 하지만 리비아의 경우 이러한 레토릭이 친미독재권력인 사우디 등의 불만을 사기 때문에 노골적인 개입을 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또한 미국은 카다피에게 큰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알제리 정권의 용병지원 등 친 카다피 행동을 묵인하면서도 민중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 개입을 운운하는 등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프랑스 등이 선도하여 유엔결의안을 이끌어내고 간섭전쟁을 시작하였지만, 제국주의내의 갈등과 아랍권의 반제정서와 제국주의의 노골적 개입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은 결국 내전의 장기화로 이어지고, 이는 중동정치와 석유가격의 불안정으로 이어져 제국주의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이번 군사작전은 카다피에게 단기간에 걸친 최대한 타격 후 휴전으로 정리될 공산이 크다. 결국 제국주의의 통제로 수렴되느냐 아니면 민중세력이 카다피와 카다피와 비슷한 친서방 과도정부를 넘고 반제를 분명히 하는 민중적인 권력을 수립할 것인가가 관건이나 민중세력은 미약하다.
5. 나가며
아랍민중들의 시위는 튀니지의 경우 청년실업자의 분신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경찰력의 구타와 발포 등 무차별적인 진압에 직면하여 시위대의 사망이 발생하고 분노한 대중이 공권력을 넘어서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때에 군부가 대중의 편에 선 튀니지에서는 독재자가 하야할 수밖에 없었고, 이집트는 군부가 낡은 독재자를 버렸다. 한편 지배계급이 견고한 이란과 사우디 등(중국도 마찬가지임)은 (선제적인) 무력진압과 양보조치로 투쟁을 억제하고 있고, 리비아의 경우는 과도정부의 모호한 성격과 친위세력의 충성에 힘입어 내전으로 발전하였고 제국주의 간섭전쟁으로까지 비화하였다.
문제는 투쟁을 밀어부쳤을 때, 독재자의 축출 이후 기존 군부와 기생자본 등 기존 지배세력의 헤게모니 하에서 형식적 민주화로 수렴되느냐 아니면 친민중적 권력이 수립되느냐의 문제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등 제국주의 세력은 군부 또는 친미자유주의 세력을 옹호하면서 노태우와 같은 점진적 민주화 코스를 밟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점에서 튀니지는 기존부패 지배세력의 청산을 요구하는 힘이 매우 커서 유동적인 상황이고,
이집트에서는 자유주의 세력을 앞세운 지배계급(군부와 기생자본)과 민중(노동자계급과 도시 하층민)간의 투쟁이, 군부의 주도하에 자유주의 세력과 중간계급을 포섭하고 노동계급을 배제하면서 헌법 개정 등 형식적 민주화로 귀결되고 있다.
독재자를 몰아냈어도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는 계속되고 있고 노동계급의 파업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아랍민중항쟁은 기회주의적인 자유주의 세력과 소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을 제압하고 제국주의와 낡은 지배계급(군부와 관료와 기생자본)과의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 투쟁은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이 강요하는 패권적 질서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자본의 위기인 세계적인 경제공황기에 전세계적인 반제 반자본(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선거혁명이 아닌 대중의 봉기로서 민중의 권력을 창출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2011년 아랍민중의 항쟁은 조직노동자의 힘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과 유능한 변혁세력의 존재여부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한편 중동의 불안과 석유가격의 폭등은 투기자본의 극성과 맞물려 전세계 민중의 삶을 유린함으로써, 한국 민중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은 경제위기 하에서 혹은 내수가 극도로 위축되는 상황에서 거듭되는 자본의 공격으로 대중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반MB, 반민주연합(거리의 투쟁과 같은 대중의 직접행동이 아닌 대리주의적 선거운동)을 들먹이는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세력의 착란으로 기층민중이 냉소적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고용 철폐투쟁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권과 총체적인 계급투쟁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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