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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장시복

마르크스주의 연구

일반 논문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1)

-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을 중심으로 -



장시복**1)


이 논문은 하트(M. Hardt)와 네그리(A. Negri)가 『제국』과 『다중』에서 제기한 ‘다중’의 실체,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대안세계를 구축하는 핵심동력인 다중의 실체는 비물질노동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2절에서는 다중의 물질적 기초를 이루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절의 핵심 주장은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한 비물질노동이 애매한 개념이며 다중의 논의에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3절은 비물질노동의 물질적 기초를 통해 형성된 다중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들의 ‘정치적 기획’이 무엇인지를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 절의 핵심 주장은 비록 하트와 네그리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그들의 논의가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기획으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통해 이 논문이 내린 결론은 비록 그들이 제시한 다중이 현실 운동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여론을 환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현실 운동에서는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용어: 비물질노동, 다중, 대안세계화운동



1 들어가는 말


하트(M. Hardt)와 네그리(A. Negri)의 『제국(Empire)』과 『다중(Multitude)』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기의 세계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자본주의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문제작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스피노자(B. Spinoza), 헤겔(G. W. F. Hegel), 홉스(T. Hobbes), 칸트(I. Kant), 마르크스(K. Marx), 푸코(M. Foucault),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와 같은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다루며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등을 통합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 제국, 1953년 베를린 반란, 베트남 전쟁, 미국의 헌법, 걸프전, 시애틀 전투 등 인류 역사의 흔적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들의 단일한 이론체계 내에서 재해석했다.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은 장엄하고 변화가 풍부하며 패배주의와 방어주의에 빠진 운동에 환희를 전달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대한 분량의 두 저작은 한 편의 웅대한 교향곡이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에 새로운 활력, 환희와 낙관을 제공해 주는 한 편의 서사시로 불린다. 이런 이유로 두 저작은 “21세기의 『공산당 선언』”이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Zizeck, 2001).

그러나 비록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의 저작은 그 만큼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은 “골동품 수집 양식의 역사적 의식성”, “권력, 화폐, 유동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사변적으로 희화화 한 것” 등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패니치와 긴딘(Panitch and Gindin, 2002)은 하트와 네그리가 묘사한 세계가 “가상 제국과 가상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어진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가 수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저작들이 “은유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Arrighi, 2003: 73)하고 있으며 “어떤 체계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관념들을 맥락적 공명(contextual resonance)을 가정하지 않은 상태로 빌려”옴으로써 만들어진 혼합물이 일관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Brennan, 2003: 199). 이러한 이유로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은 읽기가 무척 난해하고 주장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또한 글 전체에서는 반전과 역설이 끝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다중(multitude)’이다. 그들에 따르면 다중은 제국에 대항하는 정치적 주체성이자 대항권력이며 제국을 끝장내는 구성권력이다. 또한 다중은 수많은 내적 차이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제국에 저항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다중의 실체,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의 타당성을 따져 보는 것이다. 이 글이 다중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하트와 네그리 논의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다중에 대한 이론적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그들의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고리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동안 한국에서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 관련해서 ‘제국’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고 다중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아직까지는 없었다.1) 마지막으로 다중에 주목하는 것은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실천적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우선 하트와 네그리의 논리에서 다중이 어떤 실체를 가지는지를 평가한다. 이 작업은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과 ‘다중’의 개념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특히 비물질노동은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의 경제적인 토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글의 2절에서는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후 이 글의 3절에서는 다중의 구성과 기획을 검토한다. 이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듯 “다중의 행위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될 수 있을까? 다중은 제국의 억압 및 끊임없는 영토적 분할에 저항하여 어떻게 자신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중할 수 있을까?”(Hardt and Negri, 2000: 505)와 관련한 질문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답하고 있고, 이 답이 과연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2. 다중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이해


(1) 다중의 물질적 기초, 비물질적 노동


1) 비물질노동의 개념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의 형성의 물질적 기초는 무엇보다도 ‘공통된 것의 생산’, 다시 말해 ‘노동의 공통되기’이다. 특이한 차이들의 다양체들이 구성적 힘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의 주체성으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즉 ‘다중들’이 아니라 ‘다중’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중의 소통과 협력의 물적 기초가 되는 공통성(commonality)2) 아주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적 주체성은 “생산의 지형 위에서만 나타날 것”이고 “생산의 지형에서 작동 중인 형상들을 살펴보기 위해 숨겨진 생산의 장소”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Hardt and Negri, 2000).

생산의 장소에 대한 분석은 ‘제국’의 물적 토대를 규정하는 생산영역의 변형으로부터 포착된다. 그들에 따르면, 제국의 시대에는 생산영역이 경제적 탈근대화에서 나타나는 서비스화와 정보화를 바탕으로 변형된다. 중세 이래, 경제 패러다임의 추이를 지배적 경제부분에 의해 규정할 때, 첫 번째 패러다임은 농업과 원료채취가 경제를 지배한 형태였으며, 두 번째 패러다임은 산업과 내구재 제조가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던 시기였다. 세 번째이며 최근의 패러다임은 서비스와 정보의 지배, 즉 생산의 정보화로의 이행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새로운 변화인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것이 노동의 질과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이 보기에 포디즘이 포스트포디즘으로 전환하고 정보와 소통이 생산과정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의 장소에서 작동 중인 형상들을 ‘비물질노동’으로 개념화한다.3) 그들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서비스업은 실제로 정보와 지식의 지속적인 교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서비스 생산물이 물질재와 내구재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산에 포함된 노동을 비물질노동―즉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규정한다(Hardt and Negri, 2000: 강조는 필자).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Hardt and Negri, 2004: 강조는 필자).


이 두 정의는 『제국』과 『다중』 두 저작에서 각 각 인용한 것이다. 이 두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물질노동은 ‘생산된 생산물의 최종형태의 물질성 여부’, 다시 말해 그것이 물질적 생산물이냐 비물질적 생산물이냐를 통해 구분된다.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노동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신체와 두뇌를 필요로 한다. 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Hardt and Negri, 2004). 이 언급만 보면 비물질노동의 정의는 아주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비물질노동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최종형태로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바탕으로 한 정의를 제시한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주요 형태를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은 『제국』과 『다중』에서 비물질노동의 형태와 관련해서 미세한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저작에서 그들이 제시한 비물질노동의 중요 측면을 각각 나눠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제국』에서 그들은 비물질노동 중 중요한 측면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컴퓨터 사용이 늘어나면서 실제로 모든 사회적 실행 및 관계와 함께 노동 실행 및 관계를 차츰 다시 규정하는 경향”으로부터 발생한다. 이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은 컴퓨터 기술에 정통하고 능숙한 노동이나 컴퓨터 작동모델에 따라 상징들과 정보들을 처리하는 노동이다(Hardt and Negri, 2000). 두 번째는 상징적-분석적 서비스이다. 이 개념은 미국의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가 제시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그 정의는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명시하며 전략적으로 중개하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과업들이다.” 마지막으로 비물질노동의 중요한 측면인 세 번째 노동형태는 ‘정동적 노동(affective labor)’이다. 이 노동은 인간의 접촉과 상호작용을 양산하는 노동으로 “신체적이고 정서적일지라도, 노동의 결과물들, 즉 안심, 행복, 만족, 흥분 또는 정열을 만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비물질적이다”(Hardt and Negri, 2000).4)

다른 한편 2004년에 발간된 『다중』에서는 비물질노동이 『제국』의 첫 번째 측면을 제외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측면으로 정의되며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개념화된다. “첫 번째 형태는, 문제해결, 상징적․분석적 과제들 그리고 언어적 표현 등과 같이 일차적으로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종류의 비물질노동은 아이디어, 상징, 코드, 텍스트, 언어적 형상, 이미지, 그리고 이러저러한 여타의 생산물을 생산한다. 우리는 비물질노동의 또 다른 주요 형태를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른다.…정동적 노동은 평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Hardt and Negri, 2004: 144).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최종생산물의 형태가 가진 물질성의 여부를 기준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비물질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정보혁명이 야기한 탈근대화 과정에서 “오늘날 생산성, 부, 그리고 사회적 잉여의 창조는 언어적 소통적 그리고 정서적 네트워크를 통한 협동적 상호작용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서, 비물질노동은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삶정치적 노동


비물질노동의 개념을 분석한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비물질노동이 “전 지구적 노동에서 소수를 차지하며, 지구 전체의 지배적인 지역들의 일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다른 노동형태들과 사회 자체에 대해 그런 경향을 부과해왔다”고 주장한다(Hardt and Negri, 2004: 146).

이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150년 전 산업노동이 전 지구적 생산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에 집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생산형식들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때에 차지했던 것과 동일한 지위를 오늘날 차지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보화가 지배적인 포스트포디즘 시대에는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물질노동 헤게모니는 생산조직을 일관작업의 선형관계에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수한 불확정적인 관계들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보, 소통, 협력은 생산의 규범이 되며, 네트워크는 그 지배적인 조직형식이 된다”(Hardt and Negri, 2004: 150). 또한 그들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비물질노동의 특징을 소통, 사회적 관계들, 협력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사회적으로 전면화 되면서 비물질노동은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 즉 ‘삶정치적 노동(biopolitic labor)5)으로 전화한다. 비물질노동이 삶정치적인 것으로 전화하면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하트와 네그리는 삶정치적 노동이라는 용어를 경제적인 의미에서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문화적․정치적인 것에 걸친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생산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삶정치적 노동은 삶 자체를 생산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삶정치적인 생산은 시간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며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 또한 삶정치 노동은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생산의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들 사이에 충분한 공통적인 토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이 존재”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삶정치적인 것을 통한 ‘공통된 것의 생산’, 즉 ‘노동의 공통되기’는 소통과 협력을 통해 ‘삶정치적 노동’(산업노동자,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을 융합하는 용광로가 되고 “협력과 소통을 통해 주체성을 생산하고 이 생산된 주체성 자체가 협력과 소통의 새로운 형태들을 생산하며, 이것이 다시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이 계속된다(Hardt and Negri, 2004).


(2) 비물질적 노동에 대한 비판


1) 비물질노동의 애매함


지금까지 설명한 하트와 네그리의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로 인식된 생산의 정보화 과정에서 변형된 노동의 특징을 포착하고 이를 공통성의 물질적 기반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이론적 논의의 완결성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비물질노동은 여러 측면에서 애매모호한 개념이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과대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우선 비물질노동의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이론들에서 노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해왔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비물질노동의 정의와 마르크스적 의미의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r)과 비생산적 노동(unproductive labor) 구분과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명확하기 구분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트와 네그리가 사용한 비물질노동이 마르크스적 이론화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 것이지를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노동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마르크스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은 두 가지 규정이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본원적 규정이다.6) 이 규정에서는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된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규정이다.7) 이 규정에서는 생산적 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노동이 수입(소득)과 교환이 되면 비생산적 노동이 된다.

물론 두 규정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두 규정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문제로 이해된다. 만일 역사적 규정만을 문제 삼을 경우, “자본의 의해 고용된 모든 노동은 자본의 가치증식에 도움이 되어서 고용된 것이므로 생산적이다”(강남훈, 2002). 따라서 역사적 규정은 생산적 노동을 아주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규정만을 가지고는 엄밀함 의미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제시하기 힘들다. 따라서 역사적 규정은 본원적 규정을 한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본원적 규정에서 생산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좁은 의미에서 생산물을 물질적 생산물로 규정하게 되면 생산적 노동은 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으로 규정되며 비생산적 노동은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 비물질적 생산물인 서비스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는 한 상품으로 생산되며 이 경우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8)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염두에 두며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으로 정의하는 한 좁은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이 기준을 적용하면 비물질노동은 비생산적 노동 중에서 서비스 노동과 동일시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잉여가치이론을 부정하고 있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자체를 부정한다.9)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노동시간을 양화하고 여가와 노동을 구분했던 것은 현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또한 생산적 노동을 넓게 해석할 경우 서비스노동도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며 이 경우 비물질노동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과는 다른 차원임이 보다 분명해 진다. 더욱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인 잉여가치의 원천에 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는 노동과정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최종형태를 강조하면서도 비물질노동의 특성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적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다른 한편 비물질노동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트와 네그리에게 육체노동=물질노동, 정신노동=비물질노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노동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신체와 두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Hardt and Negri, 2004: 145). 이 언급으로 볼 때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비물질노동이 생산물의 최종형태의 물질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구분하는 논의는 별 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10)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기존의 노동을 구분하는 방식과는 아주 상이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최종생산물의 물질성 여부를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특이한 노동의 구분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의 구분이 노동과정의 특성이나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중심으로 개념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Camfield, 2007).11) 다시 말해 정의 자체로만 본다면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과정 자체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기능이 아니라 과정의 결과로 나온 노동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한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최종생산물의 물질성의 여부를 기준으로 했지만 이후 하트와 네그리가 이 개념을 스스로 수정하면서 개념에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은 『제국』에서는 ‘제조업도 서비스’라는 표현으로 컴퓨터 관련 노동을 비물질노동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노동은 이후 발표한 『다중』에서는 제외되고 제조업에서 나타나는 비물질노동의 특성과 관련지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의 문제로 대체된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비물질노동의 정의를 보다 엄밀하게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들이 정보혁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제조업부문마저도 서비스로 간주하면서 비물질노동을 과대해석한 오류를 잘 보여 준다. 다시 말해 비물질노동은 최종생산물의 형태가 비물질적이어야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제조업의 대부분의 생산물은 최종형태가 물질적이기 때문에 제조업에서도 비물질노동을 사용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설령 비물질노동의 특성이 제조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이를 특권화해서 제조업을 서비스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한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정의에 기준이 되는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산업을 서비스 산업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정보혁명으로 산업생산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언급을 통해 은연중에 비물질노동=서비스 산업이라는 정식화를 제공하고 있다.12) 게다가 그들은 비물질노동의 예로 공공의료, 엔터테인먼트 산업, (미소를 지으면서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 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 건강관리 노동자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군에 속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물질노동의 엄밀한 정의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서비스 부문에서도 대부분의 노동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물질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예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가 비물질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햄버거를 만드는 노동자는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비물질노동을 수행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하트와 네그리는 ‘물질적 업무’라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해서 문제를 더욱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건강관리 노동자들은 정동적이고 인지적이며 언어적인 업무들과 함께 변기청소와 붕대 교환과 같은 물질적 업무를 수행한다.” 이 때 변기청소와 붕대 교환이 물질적 업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물질적 업무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물질적 생산에 따르는 노동’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이 경우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이것은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이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김세균, 2004). 결국 이 논의로 본다면 정동적이고 인지적이며 언어적인 노동이 비물질노동에서 특권화할 이유는 전혀 없다(정성진 외, 2008).


2) 삶정치적 노동의 문제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하트와 네그리도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가진 모호함을 인정하면서 ‘삶정치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 우리는 비물질노동이 이러한 점에서 매우 모호한 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헤게모니적 형태를 삶정치적 노동, 즉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관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Hardt and Negri, 2004: 145: 강조는 필자). 이 언급에서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정의된다. 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생산물이냐 비물질적 생산물이냐의 경계를 초월해서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전화된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삶정치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비물질노동의 정의와 모순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비물질노동은 최종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비물질적인 경우에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재화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고 나아가서는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따라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은 논리적인 차원에서 일치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로 인해 이 두 개념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중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규정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비물질노동이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되는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적 정의만으로는 노동 전반을 통분가능케 하는 노동의 공통되기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해서 비물질노동의 특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삶정치적 노동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미 네그리는 ‘사회화된 노동자(socialized workers)13)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시도를 전개한 적이 있다(Negri, 1989). 네그리는 잉여가치이론과 유통이론을 결합하고 정보화로 인한 기술변화에 주목해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을 매개로 자본-임노동 관계를 사회적 수준에서 재정립하여 사회화된 노동자라는 개념을 정립했다.14) 이에 따라 대중 노동자들은 사회적 자본에 대립하는 사회화된 노동자로 되며 착취는 사회적 규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회화된 노동자에서 제시되었던 논리에는 실질적 포섭을 매개로 잉여가치이론과 유통이론을 통합하고 생산영역과 유통영역, 그리고 나아가 소비영역까지 자본주의적 착취를 확대해석하는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사회화된 노동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주부, 실업자 등도 포함되게 되며 노동의 의미는 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재정립되게 된다.15)

그러나 사회화된 노동자를 설명하는 논리와는 달리, 하트와 네그리가 비물질노동으로부터 출발해서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적 특성만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이것이 가능하더라도 두 개념 중 하나는 논리적으로 모순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리적 연관이 약한 상황에서 비물질노동이라는 매개 없이 삶정치적 노동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가 다중의 기초를 이룬다는 설명만으로도 다중의 특징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은 ‘군더더기(redundancy)’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삶정치적 노동은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양식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삶 자체의 생산은 인류가 탄생한 이후 늘 지속되었던 것이 때문이다. 이 경우 삶정치적 노동과 비물질노동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주 강력한 연관을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다 보편적인 개념인 삶정치적 노동과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에서만 성립되는 비물질노동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통해 전화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비약이거나 우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한 삶정치적 노동에서는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16) 그들은 삶정치적 노동의 특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시간측정이 불가능해지면서 경제적인 것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함으로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측면을 이해한 것과는 달리 삶정치적 노동을 통해 변화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할 수 있다.17) 게다가 삶정치적 노동이 자본에 포획된 노동을 해방시킨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할지는 모르지만,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본이 적극적으로 노동을 포획하려는 시도를 과소평가할 위험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가 비물질노동을 제시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들의 논의에서 비물질노동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환과정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초를 확립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나아가 이 개념은 ‘제국’의 경제적 토대와도 관련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화는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한편으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을 병렬적으로 제시한다면 두 정의의 개념적 규정이 충돌하기 때문에 다중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이론적 기반은 약화되고 모호해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의 연관을 설명하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두 개념을 연관시키는 논리는 약해보이며 비물질노동 개념 자체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는 다른 철학적 저작들이나 이론서들에 비해 경제적 토대를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지만, 비물질노동을 무리하게 정의하고 있으며 차원이 다른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는 논리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 그들이 다중의 실체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3. 다중의 ‘구성’과 ‘기획’에 대한 비판적 이해 


지금까지 다중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했다. 그러나 다중의 실체만으로 온전히 다중을 총체적으로 비판적인 평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중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중의 역사적 구성과 그들의 정치적 기획을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은 다중의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1) 다중의 구성과 기동


1) 다중, 공통적인 특이성


다중의 논의와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는 다중이 공통되기를 통해 수많은 내적 차이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제국의 대항권력으로 형성되는 문제이다.18)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것은 다중이 공통적으로 행동하면서도 특이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모순되지 않게 해명하고 이것이 전 지구적인 정치적 신체를 형성하며 어떻게 조직되고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고 있는가이다.

우선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을 민중, 대중, 노동자 계급과의 차이를 통해 설명한다.19) 그들에 따르면, 민중은 “통일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다.…민중은 저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며 인구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만든다. ‘민중은 하나이다.’ 이에 비해 “다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단일한 동일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Hardt and Negri, 2004). 다중은 다양한 문화들, 인종들, 민족들, 성별들, 성적지향성들, 다양한 노동형식들, 다양한 삶의 방식들, 다양한 세계관들 그리고 다양한 욕구들과 같은 모든 특이한 차이들을 가진 다양체(multiplicity)로 존재한다.

또한 다중은 대중(mass)과도 차이가 난다. 대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온갖 유형들과 종류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다중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이며 모든 차이는 대중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다중에서는 사회적 차이들이 서로 다른 상태로 남아 있다. 다중 개념에 의해 제기된 도전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노동계급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산업노동자를 지칭하며 이 개념은 농업 노동자, 서비스노동자 그리고 여타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배제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노동계급은 모든 임금노동자를 뜻하며 이 경우 빈민들, 임금을 받지 못하는 가내노동자들 그리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타의 모든 사람들은 배제된다. 이와는 달리 다중은 개방적이며 포괄적인 개념이다. 다중은 잠재적으로는 사회적 생산을 하는 온갖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다중은 통일성과 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차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네트워크로, 우리가 공동으로(in common)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 있는 마주침의 수단들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체이다”(Hardt and Negri, 2004: 18)

이러한 논의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중’과 ‘역사적 다중’으로 개념적으로 분리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로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스피노자가 절대적이라고 부르는 자유를 창조하는 다중이다.” 이 다중은 “존재론적이며, 우리는 이 다중 없이는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다중,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직 아닌’ 다중(the not-yet multitude)이다. 이 다중은 아직껏 존재하지  않았다.” 이 두 번째 다중은 정치적이다. 따라서 “이 다중을 이러한 출현 조건들의 토대로 해서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271-2).

비록 영원의 관점에서 본 다중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개념적인 수준이나 현실적 맥락과 관련해서 문제는 역사적 다중인 ‘아직 아닌 다중’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누가 이러한 다중인가?”이다. 이에 따르면 “다중 속에 융합되는 형상들―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이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삶의 독특한 형식들을 대표하는 삶정치적 형상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점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199)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에서 지구화의 정치적 형식들, 즉 제국의 구성적 요소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사회적 존재 속에 잠재해 있고 내재해 있는 다중의 존재를 구체적인 수준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충분히 수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다중의 기동, 다중의 정치적 저항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다중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등장과 이들이 제국에 맞서는 대항권력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탐구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구성적 대안권력은 제국 내부에서 생성된다. 따라서 “다중의 삶정치적 생산은, 다중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 그리고 전 지구적 자본의 제국적 권력에 대항해 공통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곧 다중은 공통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산적 형상을 발전시키면서, 제국을 꿰뚫고 나가 자신을 자율적으로 표현하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그런데 이러한 다중의 자율적 운동은 투쟁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며 다중은 ‘매개 없이’ 제국과 직접 대면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매개 없이 다중과 직접 대면한다. 따라서 변증법, 즉 사실상 한계와 한계의 조직에 관한 과학은 소멸한다. 국민국가를 폐지하고 따라서 국민국가에 의해 설정된 장애물을 넘어서려는 계급투쟁은 제국의 구성을 분석과 갈증의 장소로 제시한다”(Hardt and Negri, 2000). 따라서 국가라는 장벽이 없이 투쟁의 상황은 완전히 열려 있으며 다중은 국민국가의 주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주권에 저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이 하나의 정치적 형상으로서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은 노동과 부의 위계들에 의해 지리적으로 나누어지고 경제적․법적․정치적 권력들이 이루는 다층위적 구조에 의해 지배당한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다중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을 필요”로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다중의 반란’에 주목한다. 반란은 “부를 기초로 해서만, 즉 지성, 경험, 지식, 욕망 등의 잉여를 기초로 해서만 나타나며” “각 투쟁의 강렬함을 높이고 다른 투쟁들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가동된다.” 

이러한 반란은 “공통적인 실천들과 욕망들의 소통을 통해 전염병처럼 한 지역적 맥락에서 다른 지역적 맥락으로 확산되는―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이라는 형태를 띤다.”20) 투쟁의 국제적 순환은 한 지역의 투쟁이 다른 지역의 투쟁과 소통하는 가운데 기동해서 전 지구를 가로질러 소통하는 공통된 것을 생산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순환은 19세기 카리브 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노예 반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유럽과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산업노동자들의 반란, 20세기 중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가로질러 만개했던 게릴라 투쟁과 반식민지 투쟁, 그리고 1968년 산업 노동자들, 학생들, 그리고 반제국주의 게릴라 운동들의 전 지구적 투쟁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적 순환은 1990년대 후반 세계화 문제를 둘러싸고 출현했으며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에서의 시위들로 나타났다. “한 나라에서 일어난 IMF 긴축경제프로그램에 맞선 폭동들, 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세계은행의 기획에 맞선 시위들 그리고 제3세계에서 일어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맞서는 시위들이 모두 투쟁들의 공통적인 순환의 요소들임이 시애틀 투쟁에 의해 갑자기 드러났던 것이다. 투쟁들의 순환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사회포럼과 다양한 지역사회포럼들의 연례모임들에서 공고화되었다”(Hardt and Negri, 2004).

그런데 시애틀 전투로 상징되는 새로운 국제적 순환은 분산된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발전했고 지역적 투쟁이 하나의 마디로 기능하면서 어떤 중심이 없이 다른 모든 마디들과 소통했다. 각각의 투쟁은 특이한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들에 묶여 있지만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공유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조직화 형식을 다중 개념의 정치적 사례로 높게 평가한다. 공통된 것의 전 지구적 확산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것들 각각의 특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전 지구적 투쟁순환은 다중을 조직하고 기동시킨다.


2) 다중의 정치적 기획 - ‘절대적 민주주의’


다중의 기동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하트와 네그리는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실천들이 다중의 정치적 기획을 활성활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다시 말해 다중은 “현재의 제국권력 형식에 항의하고 어떻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Hardt and Negri, 2000: 13).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제국』과 『다중』에서 상이한 추상수준을 가진 논의를 제시한다. 우선 『제국』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전 지구적 시민권(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 ‘사회적 임금권(the right to a social wage)’, ‘재전유권(the right to reappropri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전 지구적 시민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세계 종속 지역의 노동자들의 유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을 뜻한다. 또한 사회적 임금은 전체 다중에게, 심지어 실업자들에게까지 각자에 대한 응당한 시민권 수입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전유권은 생산수단을 재전유하는 권리, 전통적인 기계와 원료에 대한 자유로운 통제를 넘어서서 지식, 정보, 소통, 그리고 정성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의미한다(Hardt and Negri, 2000: 502-13)

그런데 『다중』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로서 ‘절대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공통의 언어들, 공통의 실천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생산형식들은 명력의 형식들과 배치된다. 요컨대 우리의 꿈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아직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전 지구적 규모는 점점 더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의 지평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Hardt and Negri, 2004).

그들은 다중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개념을 차용한다. 그들에 따르면 홉스와 루소가 사회계약을 통해 인민들이 주권을 국민국가에 양도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설명한 것과는 달리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은 어떠한 권력의 양도도 없이 절대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토대가 된다. “전적으로 절대적인 형태의 통치로서 민주주의는 권력의 어떤 양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도, 권력의 형성에 있어서도, 혹은 집행 행위의 특정성, 즉, 사법권을 행사하는 직위의 특정성에 있어서도, 어떤 소외도 없다. 절대적인 것은 비소외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긍정 속에서 있는 것으로, 모든 사회적 활력을 만인의 자유를 조직화하는 일반적인 노력 속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Negri, 1991: 77).

그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창출이 다중의 힘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길이며, 역으로 다중이 우리에게 오늘날 최초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케 해줄 사회적 주체와 사회적 조직화의 논리를 제공해준다”(Hardt and Negri, 2004). 공통된 것의 생산증가를 통해서 다중을 구성하는 주체성들은 특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전체 다중 사이에 상호교류가 존재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구성적 동력을 형성한다. 또한 이 공통적 생산은 협력적 생산의 네트워크들 자체가 사회의 제도적 논리를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구성적 힘의 한 형태를 함축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정치적 생산을 통해 협동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절대적’이라고 부른다”(Hardt and Negri, 2004: 416).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권력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다중에게는 불복종의 권리와 차이의 권리가 근본적이다. 다중의 헌법(구성)은 항상적이고 정당한 불복종의 가능성에 기초한다. 다중에게 의무는 오로지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다중의 적극적인 정치적 의지의 결과로서만 나타나고 그와 같은 정치적 의지가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된다”(Hardt and Negri, 2004: 404). 이러한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주권을 폐지하고 시대에 발맞춰, 극적인 반전들과 자멸적인 실수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구성적 메커니즘들과 제도들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획을 조직해 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

결국 하트와 네그리에게 있어 절대 민주주의는 현재의 전 지구적 체제의 불만을 표현하는 운동들과 개혁제안들을 토대로 한 다중의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아니라 소통과 협력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생산하여 형성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2) 다중의 구성과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


1) 다중의 정치적 기획의 문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관한 비판은 상당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중의 정치적 기획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제시하는 방식보다는 시적인 언어를 동원해서 “이미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현존하는 사회적․정치적 경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다.21) 또한 그들은 현실의 실천운동에서 변혁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22)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변화한 현실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획을 정립할 수 있는 개념적 기초를 다듬는 것이기 때문이다(Hardt and Negri, 2004: 21-2).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들은 다중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다중은 존재론적으로는 “언제나 이미” 있어 왔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아닌(not-yet)” 존재가 된다. 따라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논의는 다중의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측면과 현실적이고 정치적 측면을 혼동하지 않으면서 평가되어야한다. 게다가 그들이 제시하는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미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경향을 지적하는 아주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도 현실의 진행과정에서만 확립되기 때문에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alter-globalization movement)에 접목될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으로 언제나 늘 있지만 정치적으로 아직 아닌 다중의 정치적 기획이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운동 형태에 대한 평가는 필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첫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중심 없는 네트워크적 관계에서 제국에 대항하는 구성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조직되고 기획되는가와 관련한 것이다. 사실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권력의 장악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다중의 형성은 권력을 만드는 과정이자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논의에서 다중은 새로운 권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니치와 긴딘(Panitch and Gindin, 2002)이 주장하듯 “어떤 종류의 운동이 생산수단과 소통을 자본한테서 재전유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데올로기적․조직적 능력을 실제로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다시 말해 현실의 운동에서 어떤 운동방식으로 어떠한 조직화를 통해 다중의 긍정적인 주체성으로 형성되고 새로운 권력으로 나서게 되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트와 네그리는 수직적 위계관계로 고착화되어 있는 기존의 조직된 노동운동, 좌파정당 혹은 전위당을 부정하며 다중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그들이 기존의 조직운동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인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성방식의 조직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수직적 위계를 통한 조직화 방식이 가진 한계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고 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직적 위계를 통한 조직화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해서 수평적이고 네트워크적인 관계망을 어떻게 조직화 할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트와 네그리도 “우리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떻게 다중이 긍정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조직되고 재규정되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조직화의 문제를 전혀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Hardt and Negri, 2000). 따라서 다중의 운동이 네트워크 조직 형태로 구성된다면 이것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제국에 대항해서 타격을 주는 일이 가능하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김영수(2008)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조직은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는 형태이고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구성요소는 조직의 매개를 통하여 비로소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대중투쟁이 이론이나 조직과 결합되지 않는다면,…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다중의 수평적 네트워크도 현실의 운동 공간에서는 조직화의 문제를 피해나갈 수 없다.23)

두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국민국가 수준의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특히 그들이 다중이 매개 없이 제국과 직접 대면하며 국가의 장벽 없이 투쟁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된다고 언급한 부분은 큰 논쟁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국지적인 수준에서 국민국가를 매개로 한 운동은 해롭고도 잘못된 것이며 심지어 반동적이기 때문이다(손호철, 2004)

그러나 이 경우 우드(Wood, 2003: 136-137)가 지적한 다음의 문제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대답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적 수준을 성취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발전은 매개 없이 다중과 직접 대면한다.…만약 이것이 철학적 추상화를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저항 투쟁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로서 국가의 매개를 과소평가하거나 심지어 부인하는 것이 낙관주의의 기초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설명에서 다중의 권력은 그 무권력에 있는 듯 하며, 반면 저항 권력의 현실적 가능성, 즉 현실 세계의 현실적 대항 권력은 사실상 부인된다.” 비록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이 새로운 대항권력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현실 운동의 현실적 대항권력을 부인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되어야할 지점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제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는 대안세계화운동의 문제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시애틀 전투’이후 새로운 국제적인 투쟁주기가 시작되었다고 언급하면 시애틀의 시위를 다중의 기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투쟁주기라는 개념적 유형화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투쟁주기는 “특수한 투쟁들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의존의 전반적 운동의 맥락 속에서 분석하기…보다는, 특수한 투쟁들(예컨대 1970년대 초 피아트 노동자들의 투쟁들)로부터 투영하여 그 투쟁들을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에 ‘계급구성’ 개념은 모든 투쟁들이 분류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이념형적인 유형 또는 패러다임, 즉 하나의 표제를 구성하기 위해 사용된다”(Holloway, 2002).24)

또한 시애틀의 전투는 다중의 네트워크적 성격이 표출된 자율적인 것이라고 특권화해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크지는 않아 보인다.25) 오히려 시애틀의 전투에 모인 “4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일정한 사회집단으로 구성됐다. 즉 저임금과 인권 유린이 삶의 표준을 침해하고 착취를 강화할까봐 염려하는 상당수의 노동운동 분파와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했으며 미국의 노동조합 단체의 참여도 큰 역할을 했다(Arnowitz, 2003). 따라서 대안세계화운동을 다중의 구현과 등치시키는 주장은 다양한 형태의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조직화된 운동의 의의를 완전히 무시하며 부문운동의 힘을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2) 다중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절대 민주주의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다중의 기획, 정치적 프로그램과 궁극적 지향으로서 절대 민주주의이다. 우선 정치적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아리기(Arrighi, 2003: 76)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중요하다. “어떤 종류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통해 제국적 주도권이 해방을 향한 다중의 욕망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재확립되는 한계를 가로지르고 무너뜨릴 것인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는 중요한 문제제기는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중의 기획은 현실에서만 확립가능하고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으로 상징되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변혁은 다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변혁운동의 주체와 실천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국』에서 하트와 네그리가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전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과 재전유권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제국』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은 그들의 개념적 기초를 중심으로 한 논의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다지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정성진(2004)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트․네그리의…수사학은 실제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투적인 개량주의 정치로 합류한다. 하트…네그리가 결론에서 제안하는 이른바 제국에 대한 세 가지 대안은…제국에 전혀 무해한 체제 내적 요구들이다.”26)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보다 비록 추상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다중』에서 제기한 ‘절대 민주주의’의 문제가 다중의 정치적 기획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설정한 다중과 절대 민주주의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하트와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다중과 절대 민주주의 개념을 차용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해석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를 띠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불(Bull, 2003: 158)스피노자를 검토하며 하트와 네그리의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의 해석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27)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는 ‘사회 계약 없는 정치학, 제한 없는 구성 권력’을 기초로 한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권력을 만드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스피노자에게 개인이든 다중이든 자연적이거나 권력적으로 자신의 것인 어떤 것에서도 소외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구성 권력은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생산된다. 그런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빠질 것이기 때문에”, “합의를 향한 욕구는 포함되는 수를 제한하기 쉽다. 구성 원리의 구심적 동학은 제국이나 심지어 대항 제국보다는 소규모 공화국에서 더 작동한다. 다중이라는 ‘새로운 유목민 무리’가 오히려 소규모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하트와 네그리는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Bull, 2003: 162)

다른 한편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을 ‘생산 저항의 주체’인 동시에 ‘착취의 대상’ 즉 수동적 존재임을 인정한다. 이러한 다중의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중의 능동적 계기만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민중/인민은 수동적 존재로서만 파악하고 다중은 권력과 자본에 포섭된 수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포섭에서 벗어나는 역능을 지는 능동적 존재로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김세균, 2004).

그러나 다중의 역능에 의한 능동적인 계기만이 강조되어야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정치론(Politics)』에서 다중은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념들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변덕과 상호갈등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박기순, 2006). 따라서 그들의 주장하는 다중이 긍정적 존재로서 파악되어야만 하는지는 여전히 해명해야할 과제로 남게 된다.28) 게다가  다중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반드시 기존 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다중의 형성이 진보적인 운동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중이 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이 또한 다중의 운동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29)

이러한 철학적인 차원의 질문을 넘어서서 절대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존재한다. 우드는 “주권이 다중에 의해 구성된다는 관념에서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Wood, 2003). 따라서 하트와 네그리가 ‘절대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중과 민주주의 사이에 이를 가능케 하는 매개가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트와 네그리의 절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절대 민주주의가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는지 명확하지 않고 현실 운동에서 그 유효성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절대 민주주의가 현실 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특권적으로 해석되어야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결론 -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


지금까지 이 글은 비물질노동의 개념과 다중의 구성과 기획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글의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다중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모호하며 이것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면서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군더더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비물질노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다른 철학적 저작들이나 이론서들에 비해 경제적 토대를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토대로서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이 목표로 한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탐구는 아직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개념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들의 논의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에 접목될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결국 현실로부터 검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이 제시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여전히 해명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현실운동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현실운동의 현실 대항권력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다중을 특권적으로 해석해야할 이유에 대해서는 더욱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과 『다중』에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은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응하는 좌파의 새로운 정치적 기획에 필요한 개념적 기초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현재의 대안세계화운동에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경향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는 현실 운동에서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3월 24일 투고, 4월 2일 심사 5월 3일 게재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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