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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물질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는 짐작도 할수 없을 만큼 인간이란 깊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총체성을 말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사회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인식에 머문다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 충분히 철저한 인간 이해를 수행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고, 따라서 크게 감동적일 수 는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 현대의 위대한 지적 업적 중의 하나는 인간 행동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표피적인의식의 수준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심층의 심리 구조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정신분석학의 성과가 아닌가 싶은데요.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이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한 질환은 환자 자신의 유아기의 어떤 경험, 프로이트가 대체로 그런 질환의 원인을 개인차원에서만 탐구하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서구 부르주아 과학의 기본 가정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프로이트의 후학이면서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간 융의 경우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지요.
융이 쓴 <땅과 마음>이라는 글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대 미국 백인들의 심층 심리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뜻밖에도 그들이 내심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인디언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사람 이하로 보면서 야만적인 폭력으로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해 온 바로 그 인간 종족이 백인들 자신도 모르게 심층 심리의 가장 내밀한 고셍서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거지요. 백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백인들의 무자비한 무력 행사 앞에서 죽어가거나 쫓겨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거의 완전한 패배속에서도 의연히 위엄을 잃지 않았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어쩌면 심한 열등감을 느겼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깊은 심층 심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백인들 자신이 이것을 인정할 리는 없겠지요. (...)
융이 말하는 지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겪어 온 생명 진화의 전체 역사가 각 개인의 심층 심리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이렇게 직립하기 이전에 하나의 포유류로서, 또 그 이전에는 파충류, 그 이전에는 단순한 세포...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맨 처음 이 지구상에 생명이 싹틀때의 기억, 또는 좀 더 뿌리까지 간다면 생명을 잉태시켜 온 흙이나 물, 바람, 핷빛,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생성의 근원적 기운과 같은 것이 내 기억의 까마득한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본다면 나의 자아라는 것과 자아 아닌 것은 엄격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서양에서첢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수준이 아니고 제1식에서 제8식까지 나누어 이야기해 왔는데요. 대개 우리의 외관을 통한 감각적 체험이 제5식까지의 내용이라면, 그 다음 단계가 우리의 의지적 작용, 감정 생활, 이지적 체험을 관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의 제7식부터가 이른바 무의식이나 잠재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는데, 같은 무의식의 차원이지만 정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7,8식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제7식의 범위는 말이지요, 이를테면 생존 본능의 심리라 할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죠지 오웰이 쓴 어떤 글에 보면 어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 오웰이 젊은 시절 버마에서 영국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할 때 실제 체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사형수 한 사람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서 간수들을 따라 교수대로 가는데, 전날 내린 빗물로 땅이 질퍽해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수는 될수 있는대로 그런 곳을 피해서 마름 땅을 골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쌩각해 보면, 곧 목숨이 끊어질 처지에 있는 사람이 빗가랑이나 신발에 흙물이 투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은 우수운 행동이지만,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취하는 그런 행동이말로 진실한 행동인 셈이지요. 어떻든 불교에서 말하는 제7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드러나는 생존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능의 단계보다 더 지독한 차원이 있다고 유식학에서는 보고 있어요. 그것이 제8식, 다른 말로는 알라야식이라고도 하고 또는 종자식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각자의 전생, 금생을 통틀어서 내가 사념으로나 실제 행동으로나 지었던 모든 업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윤회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자아 개념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인간과과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자아 개념, 즉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이 육신을 경계로 하여 나와 나 아닌것의 분별을 기초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보면, 이런 식의 분별심에 기초한 자아 개념이 가장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문화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늘상 들어 왔듯이 자기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지요. 저 자신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연기법이라는 것은 결국 나와 세계와의 불가분리성을 뜻하고 근원적인 일체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내 마음 가운데 우주가 있고, 우주는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생각도 거기서 비롯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하여튼 융의 관점이든 불교적 생각이든 어느 쪽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총체적 인격의 구조를 간단히 어떤 결단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정의감이라든가하는 이지적, 의지적, 합리적 언어에 의해 다 통제하고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우직한 착각인것 같아요. 인간성의 구조의 깊이와 복잡성에 대한 탐구가 깊어짐에 따라 "세계의 합리적 조직화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융은 술회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삶의 이성적 기획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겠지요. (93-6쪽)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적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모든 참다운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볼까요? "신비의 감정에 낯선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가장 높은 지혜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을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 -- 그것은 모든 종교성의 중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만이 나는 경건하게 종교적인 인간에 속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은 일종의 감옥인데, 거기서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로만 제한되고,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애정을 갖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심의 권역을 넓혀서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자연을 그 아름다움 속에 포용해야 한다. 누구도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해방의 일부가 되며, 내면적 안전의 토대가 된다." (87-8쪽)
그런데, 그런 문명 사회를 이루는 데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문자란 말이에요. 문자가 나옴으로 해서 평등 사회가 무너진 것이에요. 동양에서도 가량 도가 사상은 문자나 지식 행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거부감을 끊임없이 표현해 왔는데, 이것도 그냥 관념적인 문명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 지금 우리가 당장 문자 없는 삶을 구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적인 인간 질서,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잇는 문학 형태는 아마 문자를 벗어난 문학 생활일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서구 지식인들이 인도의 문맹률이 높은 것에 대해 걱정으 하면, 아니 인도 사람들이 전부 글자를 깨쳐서 신문을 다 보기를 원한다면 히말라야의 나무가 한 그루인들 살아 남겠느냐고 반문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터무니 없는 듯하지만, 앞으로 지구 사회가 나아갸야 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 깊이 시사하는 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종래의 방식대로 지식 생활을 한다면, 지구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거든요. 집집마다 책이 수백 권씩 있고, 매일 몇 십 페이지나 되는 신문을 잠깐 보고 버리고, 또 매일 같이 수십 장의 종이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지금 인류의 10분의 1이 이렇게 해도 지구가 못 견뎌 하느데, 그런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겠어요? 조만간 생태계가 붕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차워의 구비 문학에 대해, 지금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일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태학적 사고라는 것은 문명화 이후 인류가 당연지사로 여겨온 관습과 가치 전부를 뿌리로부터 다시 검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자 중심의 문명 생활의 문제도 근본적인 각도에서 새로이 짚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28-9쪽)
그런데, 요즘 어디서 읽은 내용입니다만,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20년 동안 조사를 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연평균 1퍼센트의 비율로 청소년들의 감각 능력이 퇴화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20년에 걸쳐 그 이전에 비해 20퍼센트나 감각이 둔화되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미세한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즈 세대는 어지간한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대뇌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간에 망상 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요. 예전 청소년들에게는 조그마한 소리도 그 망상 구조에 반응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작은 소리들은 아예 거기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큰 소리들만 들리는 것이죠. 시각 능력도 그래요. 전에는 가령 붉은 색 계통이라면 360개나 가려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붉은 색 중 분간할 수 있는 것은 100개 정도로 줄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뻘건 색깔이 아니면 식별하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이런 보고 내용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양을 보면서, 전자 오락실의 굉장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든지, 늘상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을 보면서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이미 감각이 둔화디어 아주 충격적인 것들에만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었다면, 그 심성은 자연히 거칠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사실이 게 제일 문제란 말이죠. 하기는 20년 전의 사람들도 그 보다 훨씬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감각이 둔화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이 인간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급격하고 가장 심각하게 환경이 변화하고 손상되어 온 시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아마 감각 능력에 가장 급격한 쇠퇴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겠지요.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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