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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약간의 변명

 

내가 그의 책에 논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장애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사실상 전무한 국내 좌파의 토양 위에서 그나마 장애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글들을 써왔던 수유+너머의 고병권마저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사실 내가 김도현의 책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내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병권의 말을 기준으로 하자면 내가 '서평'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낙서' 수준으로라도 글을 찌끄리는 것은 상당히 발칙한 생각이겠지만, 버스비 천원이 아까워 3-40분 거리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다니는 내가 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책을 샀으니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평 올리는 사람들마냥 몇 마디 코멘트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일단 뭔가 평을 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문헌들, 특히 논평하려는 책과 다른 관점을 가진 문헌들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더군다나 나 같은 풋내기 독자가 이 책을 평하는 글을, 심지어 낙서수준으로라도 쓴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국내에서 장애문제를 자기 학문적 과제로 다루는 사회복지학이나 특수교육학 전문서적을 제외하고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애(학) 관련 서적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내가 봤을 때 (물론 공부를 전혀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장애복지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그냥 '장애'라는 단어를 '노인'이나 '아동' 등으로 바꿔놓으면 또 아주 새롭고(?) '훌륭한'(??) 이론서가 될 만큼, 장애문제 자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정이다보니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 읽기>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국내출판 문헌만 봤을 때) 전공서적스러운 몇 개의 문헌과 저자 자신이 이전에 쓴 다른 책을 제외하고는 장애문제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책은 전문 연구자도 아닌 저자가 거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해외 원문서적 찾아가며 읽어낸 장애학의 정수를 그의 말마따나 소화한 만큼 보여주는, 그래서 완전 알짜배기로만 뭉쳐있는 그런 책이다.

 

 

 

내가 읽은 <장애학 함께 읽기>

 

이 책의 1부는 주로 '장애'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이 중에서 특히 주로 사회적 생성주의 모형에 따르는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한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관점은 그의 전작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도 얼마간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영국 리즈대학 장애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운동세력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 등)간의 논쟁을 덧붙이면서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학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아가 2부에서는 장애학이 사회운동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을 엮어놓는데, 이 부분에서는 특히나 저자의 폭넓은 독서편력이 돋보인다. 그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논쟁에 장애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와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폴 애벌리의 '노동거부'와 '기본소득'론, 그리고 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경로로서 울리히 벡의 '새로운 노동세계'건설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이 둘을 경쟁시킨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의 결합 또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장애인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노회찬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책이 노회찬의 이 말을 더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애인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 젠더가 배제된 정치여서는 안된다고 이해했다면, 이는 곧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단순한 '부분집합'이 아니라 사회운동 자체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우리 운동의 전략적 심급으로 사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운동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말미에서 발리바르가 제기했던 '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이'라는 시각을 환기시키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를 인간학적 차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한 모순들이 다른 어떤것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일전에 나는 어떤 활동가가 여성운동이 왜 전략적 심급을 갖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장애인운동과 다르게 여성운동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장애인운동은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전체운동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심급이 아니라는 것이고, 여성운동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넘어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 장애인운동의 근원적 위치를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2부를 읽으면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장애 정치' 부분은 장애정치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다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는 주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탄생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인, 당이냐 사회운동이냐라는 쟁점을 환기시키고 여기에 장애문제를 살짝 얹어놓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쉽다'라는 느낌이 책 자체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논의를 둘러싼 장애정치의 발전 수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애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식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저자 자신의 논의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도 정치무대의 제대로된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 자신도 불가피하게(?) 장애운동 외부의 이론적 자원들을 동원했던 것일테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근거를 둔 논의 방식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가의 롤모델

 

어쩌다보니 난 지금까지 김도현씨가 낸 3권의 책을 다 사보게 되었다. 근데 좀 씁쓸한 것은 그의 책 세권이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운동 관련된 책 중에 한권 빼고 나머지 다 라는 사실이다. (그 한권은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이다) 내가 그 동안 책을 많이 본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문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고 있던 편이다. (그냥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데 내가 본 4권에 장애문제 관련된 책 중에 3권을 김도현씨가 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장애운동의 이론화, 대중화를 위해서 그 혼자 독고다이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부하고 투쟁하는 사회운동가의 전형적인 롤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참 그런 의미에서 김진균상 같은 것은 정말 아무한테나 주는 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에 이 허섭스러운 서평, 아니 낙서를 보시는 분들에게 <장애학 함께 읽기>라는 양서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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