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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강학과 학강으로서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명자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한 학강이 아니라 한 여성노동자를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동윤의 시선이 집요하게 민수에게 쏟아져내렸다. 동윤은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문득 너와 또 우리 강학들을 떠올렸어. 만일 그들이 내게 이런 고백을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강학과 강학으로서 물론 이런 식으로밖에 처리하지 못했을거야. 그러나 .... 여지는 남겨두었을거야. 잊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새로운 관계로 시작될 수 있다는 여지... 명자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그 여지가 없음을 알았어.... 최소한 명자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그애가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의 반증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짐 ㅗㅅ했어. 나는 그 아이를 한 학강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지. 그러나 명자는 달랐던거야. 그애는 날 인간으로서 사랑했고, 그러나 내가 강학이었기에 떠났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네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텐데. 그런 일에는 늘 환상이나 계층 상승욕구 같은 것이 작용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 환상? 계층 상승욕구.... 아니야 민수야. 명자는 적어도 내게 환상을 갖지는 않았어. 그애의 편지 귀절 생각나니? 제가 끝까지 선생님을 사랑했더라면 선생님의 일대기에 오점을 남겨놓을 뻔했다고.... 그애는 날 정확하게 바라본 것인지도 몰라.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야."
"그럼 명자가 계속 남아서 널 사랑했으면 넌 정말 그걸 네 인생의 오점으로 생각했을 거란 말이니?"
"아니 그런 거하고는 달라."
동윤은 일어나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렇듯 불안하고 괴로워하는 동윤의 모습을 민수는 처음 보았다. 알듯 모를듯 동윤이 가지고 있는 저 소용돌이치는 어움의 깊이를 민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민수야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 기꺼이 노동자가 될 자신이 있니? 민중과 선뜻 결혼할 수 있겠니?"
민수를 돌아보며 동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수는 갑작스런 동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민수야. 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곳에 모였다.... 아까 네가 물렁한 벽이라고 표현했던가? 그걸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 82-8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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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내 말이 없던 연순이 고개글 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민수를 불렀다.
"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 왜 강학들은 ....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쳐줄까요? 돈도 못 버는 일인데.... 또 고생까지 해가면서.... 제가 본 대학생들은 옷도 화려하게 입고 다니던데 .... 이상해요."
"그건... 그렇게 해야만이 스스로 또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야."
연순이 의하한 눈초리로 민수를 올려다본다.
"우린 서로 모르는 게 참 많다 그치?"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민수의 목소리는 서글프게 울렸다.
"행, 복, 해, 진, 다, 구요?"
낱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순은 한자한자 힘주며 되물었다.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서지...."
민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았다. 언젠가 민수는 동윤에게 이미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괴리 대문에 심한 괴로움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을 때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을 때 민수는 이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은 분열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가난과 추위와 궁핍감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민수의 머리채를 휘업잡기도 하고 민수를 어두운 방구석에 내팽개치면서 그녀에게 속삭여대곤 했다. 자 이제 이런 철부지 방랑은 그만두는 것이 어때? 집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부모님들을 일단 안심시키고 나서, 졸업이라도 한 뒤에.....
연순은 보도 블럭들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바라본다. 가로등 아래 민들레의 노란 얼굴이 창백하게 떨고 있다. 왜 하필 저런 곳에서 피어나야 했을까. 연순은 문득 가슴이 아프다.
".... 선생님 요즘은 모순이라든가 사회의 나쁜 점들이 제게 아주 뚜렷하게 느껴져요.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저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두려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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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혜섭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섭은 재깍이는 시계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1차 약속 시간은 지나고 2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 병실을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누나의 희고 가느다란, 상처투성이 손을 한번 잡아보고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섭은 일어설 수 없었다. 압제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막상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대 공포어린 분노로 변했고 이윽고는 공포만이 남았다. 끝없이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이 가난. 제가 여지껏 가졌던 분노들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깨달으면서 지섭은 피투성이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꼼작 않고 그 밤을 지샜다. 검붉은 해의 빛살이 닿을 때마다 그의 앞에 놓인 세상이 유리처럼 와르를 무너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딛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 1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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