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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이현상 평전 - 안재성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가 주도한 연쇄파업과 관련하여...)

 

이틀 후인 9월 21일에는 서울에서도 가장 큰 공장의 하나로 알려진 동대문 종연방직과 용산공작소 영등포 고ㅇ장에서 동시에 파업이 터졌다. 둘 다 이현상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감행된 파업이었다. 종연방직에는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으로서 영등포 방면 공장에서 활동하던 이병기의 조카 이병의와 유해길이 취업해 있었다. 가회동 집에서 이재유와 회합한 이현상은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이끌기로 합의를 본 후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등과 함께 투입되었다. 이현상은 별도로 조선일보 배달원 정칠성과 변홍대를 신설동 하천가 야산 등지에서 만나 최대한 많은 노동자를 참가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종연방직 파업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일으켰다. 참가 인원이 오백 명으로 지금까지의 파업 규모 중에 가장 컸다. 이에 경찰이 이영자 등 다섯 명의 여성 노동자를 검거하자 흥분한 오십육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서로 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일제 치하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경찰서 진입을 감행한 것이다.

파업이 사흘째 이어지자 회사측은 직공 모집 공고를 붙이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두 해고한다면서 신문기자들에게 구십 퍼센트 이상이 출근하리라 장담했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가는 노동자는 없었다. 이에 회사 측은 더욱 교묘한 술수를 썼다. 남성 노동자들에게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었으니 여성 노동자들을 출근하게 하라고 시킨 것이다. 이를 믿은 남성 노동자들의 설득으로 여성 노동자들도 모두 출근했다. 하지만 일단 노동자들을 축근시킨 회사 측은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 적 없으며, 남성 노동자들이 멋대로 말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이 과정에서 남녀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바람에 파업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이현상은 요구조항 속에 남자들의 임금도 올려줄 것을 넣도록 하는 등 파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재파업에 돌입하지는 못했다. 요구조건의 쟁취에는  실패하지만 종연방직 파업은 연일 언론에 실리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 111-2pp

 

 

 

 

감옥살이는 늘 힘들었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음식의 질은 더욱 떨어졌고, 사상통제도 심해졌다. 이현상은 정치범들을 조직해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싸움을 그치지 않아 서대문형무소에서 함흥형무소로, 다시 대전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체포된 지 사 년 칠 개월 만에 석방될 때 감옥에서 싣고 나온 책이 손수레로 석 대나 되었다.

 

- 119p

 

 

 

 

(1945년 1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김태준이 한 축사)

 

"여러 동무들을 등지고 연안에 갔다가 이제 대하니 오히려 면목이 없습니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농민의 대표 여러분! 우리의 해방은 아직도 어렵습니다. 잠깐 연안 독립동맹의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팔로군하에서는 남녀노소가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먹을 것을 농사짓습니다. 모택동 동지도 하루에 몇 시간씩은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도 연안에서 조선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여러분은 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호언장담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공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밥을 먹고 누구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정치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이완용이나 김옥균도 주관적으로는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결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사상운동이 아닌 이상, 정치운동에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팔로군의 십 개조 정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경솔한 공산주의를 버리고 진실한 신민주주의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당한 노선을 세우고 옳게 걸아 나갑시다. 우리는 자기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팔로군에는 정풍운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비판을 할 줄 알면 오늘과 같은 혼란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민족을 위해 싸웠다느니, 네가 그랬느니 하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삼일운동도 결코  삼십삼 인의 지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으로부터 세워진 과거 혁명의 결정인 인민공화국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 성공적으로 나가는 연안에도 민족단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태도는 겸손합니다. 조선의 인민을 위한 일을 하려면 그러한 태도라야 할 것입니다. 혁명가는  마당히 대언장담하지 말고 자기비판을 합시다.

 

- 177-8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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