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발췌독]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권현정 외

성욕의 문제, 특히 여성 히스테리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형성되고 발전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여성적 동일성과 성욕의 관련성이라는 가정 하에서 여성성을 규명하기 위해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는 무성적 존재였던 여성을 성욕을 가진 존재로 구성하는 데서 중요한 질문이었다.

프로이트에 와서 여성성의 문제는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이전되었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이전 시기 정치철학의 코나투스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 기념으로 개인성 특히 성적 동일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열쇠였다. 따라서 여성 성욕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여성성을 밝히는 데서 핵심적 문제였다.

프로이트는 유아의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남성적 리비도를 중심으로 여성성을 설명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성의 욕망은 페니스의 결여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페니스 선망을 거쳐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여성은 자신의 성감대를 작은 페니스인 클리토리스에서 바기나로 이동시켜야 하며 이 과정은 페니스 선망을 페니스 삽입에 의해 남자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151-2 pp

 

 

 

 

2차 성혁명을 향한 새로운 성관념의 출현은 이미 킨제이 보고서에서 시작되었다. 킨제이는 1948년 남성의성욕에 대한 연구를, 1953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성은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하나의 게임으로 묘사되었고 '만족'이라는 모호한 용어 대신 '오르가즘'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었다.

킨제이에 의하면 오르가즘을 목표로 한 성은 반드시 사랑이나 이성애적 매력이나 심지어 인간적 상호작용마저도 포함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킨제이의 연구는 오르가즘의 횟수에 관한 한 동성애, 자위, 심지어 수간까지를 포함하여 이전 시대에는 일탈로 여겨졌던 다양한 성행위를 포함했다.

킨제이 보고서의 충격은 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 .그것은 첫째, 성의 목적이 임신보다는 오르가즘의 추구에 있다면, 정상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적 일탈이라는 기존의 판단에 대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능하다는 점이었다. 둘째, 킨제이 보고서는 오르가즘의 추구가 목적인 한 성에 관해서 남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발전시켰다. 즉 오르가즘에 관한 한 남녀간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킨제이의 연구는 물리적 반응으로 환원된 오르가즘은 인간적 감정과 무관하며 따라서 남녀간의 성관계는 출산은 물론 사랑 및 결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하지만 50년대의 성과학은 불감증의 치료를 위해서 여전히 남성의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페니스가 바기나 안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이에 대한 실패를 표현하는 단어가 '조루'였다. 여전히 남성이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으며 여성의 지나친 활동성은 문제로 인식되었다. 2차 성혁명의 초기에 여성들에게 더 많은 성욕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해도 여성의 성적 경험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았다. 주부든 독신여성이든 바기나 오르가즘은 여성성의 증거로 이해되었으며, 성교를 중심으로 하는 성욕에 대한 관념은 변경되지 않았다.

 

- 153-4 pp

 

 

 

 

 

금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혁명의 대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쾌락에 수반되는 위험에 대한 방어적 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성혁명의 기간에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혁명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1963년경 절음 여성들은 성혁명의 시대에 살면서 '예스'라고 말하라는 압력이 갑자기 '노'라고 말해야 하는 이전의 무를 대체하면서  혼란을 느꼈다. 젊은 여성들은 새로운 자유를 향유해야 하는지 성적 착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햇다.

 

- 165 p

 

 

 

 

 

낙태의 권리를 처음으로 제기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분파는 레드스타킹스로 이들은 낙태투쟁을 통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삶의 향을 통제할 수있는 여성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들은 임신을 성 경험의 대가나 벌이 아닌 성적 권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대법원은 미국 전역에 걸쳐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른바 '로우 대 웨이드' 사건으로 알려진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헌법 14조)에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정부가 낙태 문제에개입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했다기보다 시민의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승인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낙태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에서 개인의 선택권의 문제로 변화했다 그 결과 두 개인의 권리, 즉 어머니의 권리와 태아의 권리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을 계기로 낙태권의 문제가 개인의 선택권으로 옮겨가면서 논쟁은 이른바 '생명존중'을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와 '선택존중'을 주장하는 페미니즘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변형되었다. 신보수주의가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한 반면에 페미니즘은 낙태를 개인의 선택권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한편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찬성 캠페인을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건강하고 보편적인 낙태 요구는 흑인 여성들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개입이 있은 뒤에야 낙태와 피임 문제에 관한 페미니즘 캠페인은 비로소 적절한 상담없이 강제로 낙태나 단산을 당하지 않으려는 흑인 여성들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즉 '낙태를 할 권리'라는 협소한 정의는 임신과 출산 여부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는 의미를 가진 '재생산의 권리'로 다시 정의 되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문제를 이론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히 고든은 출산통제 운동사를 통해서 자발적인 재생산 권리와 비자발적인 재생산 선택을 분리시켰고 낙태를 자발적인 권리로, 불임시술은 비자발적인 선택으로 분류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권리를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라는 관념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게 했다. 즉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에 유비되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통제라는 차원에서 출산통제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발전은 이전 시대에 '자발적 모성'을 제기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 168-170 p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