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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25
    사토 마나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요약정리.
    구르는돌
  2. 2012/05/14
    시애틀 추장의 연설 - 녹색평론 창간호
    구르는돌

사토 마나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요약정리.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 만들어지는 위기와 무시되는 실태

미디어를 통해 ‘이지메’, ‘부등교’, ‘학급붕괴’, ‘소년범죄’ 등의 사안들이 주목받고, 학교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들은 극히 일부의 사례에만 집중한 것.

변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 고베의 어린이 연쇄살상사건 무렵부터 어르 사회 전체가 아이들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없어졌으며, 일본 사회전체가 아이들의 언동에 대해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중.

그러나 아이들을 적대시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음. 냉엄한 시대일수록 아이들의 하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 위기의 실태 - ‘배움’으로부터의 도주

일본의 아이들이 공부에 쫓겨 여유가 없다는 말은 학원에 다니는 일부 아이들에 국한된 이야기. 통계적으로 보면 일본의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시간은 세계 최저 수준. 독서량 급감.

선택과목의 강화가 학생들의 기초 학력을 붕괴시킴. 초,중학교 단계에서 높은 학력이 시민적 교양으로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어린이 되는 과정에서 몽땅 떨어져 나가 일반시민의 과학적 교양은 최악의 상태.

아이들에게는 지금 ‘무엇을 배워도 소용없다’는 식의 니힐리즘과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음.

 

○ 동아시아형 교육의 종언

동아시아형 교육근대화의 특징 : 압축된 근대화, 경쟁교육, 산업주의 교육,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통제, 강력한 내셔널리즘, 교육 공공성의 미성숙.

이러한 교육시스템은 산업화와 교육의 급속한 근대화가 정체되는 시점에서 파탄을 드러냄.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도 동아시아형 교육의 ‘압축된 근대화’의 종언과 그 파탄에 의해 생긴 현상. 일본에서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학력수준도 제일이었던 때는 교육에서 압축된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시기. 그러나 압축된 근대화가 종언을 맞이하자 이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높은 교육력을 획득할 수도, 부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도 없음. 학교는 일부의 ‘성공팀’과 다수의 ‘실패팀’을 가르는 장치로 변모. ‘공부’의 시대 종말.

 

○ 사회변모와 교육개혁의 실패

산업주의 사회는 소수의 지적 엘리트를 정점으로 하고 다수의 단순노동자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노동시장을 형성. 그러나 포스트산업주의로의 전환은 지적노동자의 수요를 높여 항아리형 노동시장으로 옮겨감.

기업의 구조조정과 IT혁명은 그런 징후의 하나이며, 이로 인해 청년노동시장이 해체되고 있으며 그 급격함. 대량의 프리터 출현. 일본의 경우는 동아시아형 근대화의 파탄과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아시아 쇼크로 인해 보다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음.

젊은이들은 취직을 통한 사회참가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고, 고령화사회의 부담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었으며, 막대한 국가재정의 적자를 갚아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됨.

조기교육에 열중인 가정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부모의 이기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이에 아이들의 배움으로부터의 도주가 순식간에 진행.

일본 교육에서 신보수주의 => 내셔널리즘의 강조와 가정교육의 강조 그리고 ‘봉사활동의 의무화’ 제창 / 신자유주의 => 공립학교 기능 줄이고 나머지는민영화하자는 ‘합교론’ 등.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은 교육행정과 학교 책임을 극소화하여 아이들과 부모와 교사의 ‘자기책임’을 극대화하는 무책임한 개혁. ‘마음의 케어’를 강조하며 개인인적인 카운슬링만으로 대처.

‘보건체육’을 제외한 모든 교과의 ‘선택이수를 기본’으로 개편하는 신학습지도요령은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를 한층 가속화시킴. “매년 교육내용이 어려워져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할 때마다 교육 내용을 삭감하고 수준을 낮추어 점점 아이들이 수업에 따라가지 못함. “수험공부의 폐해로부터 아이들을 구한다”고 하지만, 교과내용 삭감과 수준저하를 단행해 오면서도 대학입시의 수준은 변하지 않음. 21세기는 평생교육 사회. 생애에 걸쳐 배움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고교단계까지 교육내용은 모든 학생에게 기초 교양으로 보장되어야 함.

수준별 학습도 학력격차를 확대하는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함. 기초를 모르는 학생에게는 그런 학습의 환경에 더 많이 노출시킴으로써 빨리 내용을 습득할 수 있음. 수준별 학습지도는 저학력인 아이를 저학력인 채로 묶어둘 위험성이 있음.

 

○ ‘공부’에서 ‘배움’으로

공부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배움에는 굶주리고 있음. 필요한 것은 ‘공부’에서 ‘배움’으로의 전환.

공부와 배움의 차이는 ‘만남과 대화’의 유무에 따름. ‘배움’이란 사물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세계만들기>,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에 의한 <친구만들기>, 그리고 자기자신과의 만남과 대화에 의한 <자기만들기>가 삼위일체되어 수행되는 ‘의미와 관계를 엮어가는’ 영속적인 과정.

‘공부’는 교과서와 칠판에 비쳐진 지식의 그림자를 정보로 습득하고 있는 것에 그치는, 일종의 ‘동굴 신화’. 이 벽을 극복하기 위해 도구나 소재나 사람으로 매개된 ‘활동적인 배움’을 교실에 실현할 필요 있음. 또한 공부’에서 가정하는 자립과 의존의 이항대립을 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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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력을 묻는다 – 배움의 교육과정

 

○ 학력문제의 혼란

대학생의 학력저하 배경으로는 대학입시과목의 다양화와 축소화, 고등학교의 선택중심 교육과정, 대학의 교양교육 해체에 거품경제 붕괴 후의 취업난으로 이한 고등교육 진학률의 상승이라는 직접적, 복합적 요인이 얽혀 있음.

이러한 대학생의 학력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초/중학생의 학력저하는 실제와 거리가 멀다. 이러한 학력저하 논쟁은 입시산업 쪽에서 보면 학부모와 학생들의 불안을 이용하여 고객을 늘릴 수 있는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기회라 할 수 있을 것.

학력저하라는 여론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부과학성 등은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다른 목적을 이루고자 함. 즉 복선형 학교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 기초학력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수준별 학습지도’와 ‘소집단지도’도입을 결정하고 학교선택의 자유화를 추진.

과연 ‘읽고 쓰고 셈하기’라는 기초학력 강화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을까? 수준별 학습지도는 낙제생들에게 효과가 있을 수 있는가? 미국과 유럽의 교육개혁은 산업사회로부터 지식사회로의 전환을 예상하여 교육내용의 레벨업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는데, 일본은 거꾸로 교육내용의 레벨다운을 시도하고 있음.

 

○ 학력의 실태 – 무엇이 문제인가

①일본의 초/중학생의 학력은 아직까지 세계최고 수준이다. ②초/중학생 학력수준에 비해서 일반시민의 과학적 교양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최하위. 성인의 교양쇠퇴현상이 훨씬 심각. ③초/중학생 학력에 있어서 기초내용에 관해서는 고득점이지만, 창조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능력에서는 평균 이하. 21세기형 창조적 사고에 있어서는 취약. ④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를 싫어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배움으로부터의 도주가 심각. ⑤배움으로부터의 도주와 학력저하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 계층일수록 심각. 학력의 위기는 문화자본의 측면에서 계급간 양분화를 촉진(수준별 수업, 교육내용 삭감은 이를 부추김). ⑥대학생의 학력저하는 직접적으로는 대학입시과목의 삭감과 교양과목의 해체 및 고등학교 선택과목의 확대에 따른 결과에 지나지 않음.

 

○ 위기의 배경 – 학력신화의 붕괴

학력을 힘(power)으로 여긴다는 것은 학력의 사회적 기능을 표현하고 있는 것. 학력의 기능은 화폐와 세 가지 측면에서 같은 것. ①화폐가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을 수량적으로 비교하여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학력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학습 경험을 일정하고 균질적인 척도로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 ②교환수단으로 기능. 학력은 누구나 원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입시시장이나 노동시장의 교환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음. ③저축수단. 학습활동에 계획성과 계속성을 부여하고, 낭가서는 저축 욕망이 ㅜ자로 작용하여 교육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음.

일본의 학력위기는 학력신화가 붕괴함으로써 통화폭락에 비유할 수 있는 학력폭락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음.

싱가포르, 한국, 홍콩, 타이온, 일본 모두 학력성적은 1~5위를 독점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학교 외 학습시간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배움으로부터 도주현상이 일어나고 있음. 이것은 동아시아형 교육위기 현상.

학력경쟁을 통한 사회이동의 활성화는 압축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순조롭게 기능. 그 때는 학력이라는 통화가 실제 이상으로 가치를 지님. 그러나 경제가 저성장시대로 돌입하면서 학력신화는 붕괴. 압축된 근대화가 종료되자 학교교육을 통해 높은 교육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없게 됨. 학력이라는 통화가치가 폭락한 것.

포스트 산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동아시아형 교육은 계속 어긋남. 일본 정부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적 대응으로 일관. 신보수주의는 글로벌화에 대항하여 국가도덕과 가부장제를 고수, 신자유주의는 글로벌화에 영합하여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책임을 극대화하는 구조개혁 단행.

지식, 기능보다는 관심, 의욕, 태도를 중시한 새로운 학력관이 창조되고 있는 중. 후자가 강조되고 있는 배경에는 동아시아 교육이 식민지주의 교육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 과학과 생활, 과학과 도덕, 지식과 경험, 지성과 감성 등을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교육방식에서 기존의 교육을 개혁시키겠다는 미명하에 후자로의 이동이 신자유주의 교육개혁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는 중.

 

 

○ 기초학력의 복고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학력저하를 우려하는 논의는 언제나 교육의 혁신적 실천을억압하는 보수세력의 담론. 영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에 노동당이 추진하는 아동중심 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기초학력저하론 출현. 미국에서는 1980년대 오픈스쿨과 다문화교육을 억압할 목적으로 보수세력의 back to the basics 운동이 일어남.

리터러시literacy는 식자능력이라고 번역되고, 일리터러시illiteracy는 비식자 또는 문맹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 리터러시라는 말의 용법은 본래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였음. 기초학력을 정의하고자 한다면 리터러시 개념으로 해야 함. 고등학교 졸업자가 다수인 사회에서 리터러시는 고등학교 정도의 교양을 갖추는 것이어야 함.

기초적인 지식이나 기능일수록 반복적이 연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기능적으로 습득됨. 그래서 복고주의 교육운동은 변화된 시대의 노동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집단만을 양성하여 실업률만 높이는 결과를 낳음. 학력은 기초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서부터 끌어올려 형성되는 것. 비고츠키의 발달근접영역과 내화이론에 따른다면 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으로 돌아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수준의 내용을 교사나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방하고 이를 스스로 내화할 필요가 있음. 배움에는 점프가 필요함.

 

○ 수준별 학습지도, 소집단지도는 유효한가

왜 학원에서는 수준별 학습지도를 기본으로 하고 학교에서는 도입하지 않았을까? ①수준별 학습지도는 공립학교가 입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차별 교육 ②지도에 곤란을 초래함(이해도가 떨어지는 학생들만 모아놓으면 교사의 혼란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증가) ③학교의 커리큘럼이나 수업은 소정의 지식과 기능을 단계적으로 배우는 학원과 같은 조직이 아님(학교의 수업은 교육내용의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됨).

학급당 40명이라는 악조건보다는 소집단지도가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점은 명확한 것. 그러나 문부과학성이 추진하는 소집단지도는 이에 맞는 교사수를 확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 대신 전임교사를 채용하던 정원을 시간강사로 대체하여 실현하려 함. 이런 방식으로 소집단지도를 하면 학교에서 교사 정원의 반이 시간강사가 됨. 학력저하와 학교해체 초래.

 

○ 아이들의 ‘배움’을 위하여

학급당 학생수를 줄여야 함. 교과서와 칠판을 중심으로 일제수업을 하는 방식을 바꿔야. 교과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환(학교에 비치하고 대출하는 식으로). 나아가 아이들에 대한 평가를 폐지. 배움에 대한 평가는 배움의 경험 자체에 대한 충실감과 배움의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친구, 교사와 부모의 승인과 격려로 충분함. 학력저하의 극복은 교사의 지도력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 서로가 배워가는 협력 속에서 가능.

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해야함. 대학인의 입장에서는 학력저하의 희생이 된 학생의 입장에서 교양교육의 충실을 꾀할 필요가 있음. 학교 교사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를 대폭적으로 확충해야 함. 아이들의 배움을 촉진할 교사의 역량이 매우 중요. 또한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평생에 걸쳐 몇 번이라도 재출발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 제공해야 함. 지식사회에서는 평생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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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추장의 연설 - 녹색평론 창간호

 

 

시애틀 추장의 연설 Chief Seattle letter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호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는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1854 Suquamish Chief Se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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