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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3
    자서전 타령. - 2012.11.4(1)
    구르는돌
  2. 2013/01/03
    간단한 후기 -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구르는돌
  3. 2013/01/03
    [발췌독] <당신들의 대통령>, 문주 中 (2012.12.8)
    구르는돌

자서전 타령. - 2012.11.4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 대한 후기에 이어지는 글.
 
페이스북에 썼음. - 2012.11.4
 
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서전 타령 하나 더.

얼마 전 사당동 판자촌 지역 주민 연구를 다룬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빈곤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속에서 1년전 또는 10년 전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빈곤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자기 역사를 잃어버리면서 자기 주체성도 상실해버리는 데에 있다.

오늘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에게 사줄 동화책을 사러 서점에 갔는데, 들어서는 입구에 진열 되어있는 책들 중에 인문학 어쩌구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신발스럽게도 표지 문구가 "이시대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스펙은 인문학이...다" 뭐 이 따위 것이었다. 정말 꼴깝스럽지 않은가.

나에게 인문학은 무엇일까? 굳이 갖다 대자면 오장환 시인의 <나의 노래>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사실 이 시인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데, 시와님께서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주셔서 알게 되었다)

"내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내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다."

'기꺼운'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 상 '회피하다' 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나는 인문학, 아니 그냥 공부는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슬픔, 내 과녁이 가리키는 방향이 단 한발짝도 회피함없이 '님'(이 님은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나 자신 일수도 있다)을 향하게 하는 것, '님'의 삶과 욕망,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를 직시하게 하는 것.

그래서 꼭 자서전을 써보고 싶다. 아니, 한 10명정도 같이 모여서 1-2년 동안 함께 자서전 쓰는 모임같은걸 해보면 좋겠다. 그런게 잘 되면 정말 문자 그대로의 '지적 해방'의 순간을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야학에서 이런 자서전 글쓰기 수업 진행해 보면 좋겠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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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후기 -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2.11.4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푸른숲, 2010

 

 

사실, 이 책을 서점에 눌러 앉아서 거의 다 읽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을것 같아 사 들고 나왔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나도 언젠가는 나의 자서전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렇게 출판사에서 편집해주는 깔끔한 형태의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살아온 삶 그대로를 고백하고, 누군가가 나의 고백을 경청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식으로 나의 자서전을 읽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독자가 딱 10명...만 되어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이 책에서 처럼 어떠한 얇은 포장마저도 벗겨낸 채로 내 욕망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오직 자기 내면의 욕망에 근거해 자기 삶을 풀어내는 저자의 담대함이 부러웠다. 사실 나는 한번도 그래본적이 없어서....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산재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 묶여, 내 자신을 그 규정속에 묶어 놓고 살았다. 그 규정 속에서 한발짝도 못벗어난 채, 그 안에서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에 치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런 강박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 나는 단 한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고, 우리 부모님도 그런 나를 보며 못가지고 못배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미안해하는것, 그것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나의 대학 1~2학년 시절은 이런 나의 조건을 주변 친구들과 비교하고, 밤마다 신음소리같던 엄마의 아픈 하소연을 떠올리며 불면증으로 밤을 새우던 나날이었다.

나는 이런 시간들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고유한 자양분이 될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택도 없는 소리이다. 그것은 희망의 증거는 커녕 절망의 표준이 되었을 뿐이고, 그 속에서 나는 피폐해져 갔다.

나는 나의 운동이 내 욕망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축제이자 전투이길 원한다. 너무나 멋지게 그러한 시도를 한 김원영씨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다 쓰고 나니 내가 뭔소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지만, 어쨌든 결론은, (좀 밍숭맹숭하긴만) 후회없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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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당신들의 대통령>, 문주 中 (2012.12.8)

아, 내말이.... 대학때 읽던 책들이 어느 순간 내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살짝 감이라도 잡은 듯.
마지막 부분에 주목.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혁명이 뭔데요? 세상의 명을 바꾸는 건데 그건 전체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설계도란 것이 기술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건 아니니까 문제에요. 천명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겠습니까? 민중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시대의 뜻을 읽어내고 그로부터 우리가 같이 걸어야할 새 길, 말 그대로 새로운 도를 열어 보이는 것, 그게 이념이고 철학입니다.

그런데 그걸 잊어버린 거에요. 그나마 이전에는 갖고 있던 것처럼 믿을 수라도 있었어요. 근데 그게 남의 거였던 거죠. 해보니까 아니거든요.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서 김일성주의 붙잡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붙잡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둘 다 이제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누구도 설득 못하는 겁니다. (...) 그나마 김일성주의는 토착이론이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절반은 들어 맞습니다. 그게 남한 사회에서 NL이 PD를 이기는 이유 입니다. 그 철학이 수미일관되게 이 땅에 뿌리내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PD는 그나마도 할수 없다고 할 수 있죠. 순수한 수입 이론이기 때문에 아무런 생산력이 없다는 것이죠."

- 김상봉,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 <당신들의 대통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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