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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3/01

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중에서 - 2012.2.19

"비문해에 스며 있는 폭력 가운데 하나는 읽고 쓰기를 금지 당한 이들의 의식과 표현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읽기를 한 것을 글로 써봄으로써 처음에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합니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연필, 빈 종이,... 글 쓰는데 필요한 백지를 챙겨서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과정이 사실은 내가 책상 근처에 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행동하거나 실천할 때 혹은 앎의 대상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이미 시작됩니다." (38-40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86쪽)

"실로 두려움은 하나의 권리이지만, 두려움을 교육하고, 두려움에 맞서며, 그것을 극복할 의무가 따릅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분석하고 두려움의 원인과 우리의 대응능력 간의 관계를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두려움을 감추는 것이 아니며, 두려움을 감추지 않는 것이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나는 분명한 어떤 한계선 안에서 내 자신과 내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의 행동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어떤 대화에서 거짓으로 자신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식은 인간적인 것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 당시 느끼는 그대로를 학습자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학습자들에게 말해줄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권리라는 것과 그 권리를 교육자들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두려워할 권리가 있듯이 교사들도 두려워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교육자들은 불사신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인간인 만큼 교육자들도 인간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싸울 능력이 없다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반문해봐야겠지만, 두려움을 겪는다는 사실 때문에 교사의 자질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초임 교사의 불안감까지도 알아채는 노련한 학생들 앞에서, 교실에서 첫날을 보내면서 교사가 겪는 두려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33-134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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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정치 풍자글

 

 

마우스랜드에서 통치자를 뽑았다. 1위는 생쥐가 아니라 검은 고양이었다. 생쥐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은 탓이다.

고양이는 쥐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쥐구멍은 고양이 발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한다.’거나 ‘생쥐는 너무 빨리 달려서는 안 된다.’는 등등.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갔다. 이번엔 흰 고양이가 당선됐다. 그래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흰털에 검은 반점이 있는 고양이로 갈아치웠지만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신세는 똑 같았다. 한 생쥐가 말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고양이들을 뽑는 거야?”

당연한 질문에 다른 생쥐들이 즉각 반응했다. “빨갱이다. 감옥에 잡아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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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강의 후기 - 2012.8.2

페이스북에 쓴 글. 수유너머R에서 진행한 함석헌 선생 사상에 대한 강의 (김경재 교수)

 

 

 

어제 함석헌 씨알사상 강의 곱씹기.
강의 막판쯤에 나는 "왜 함석헌에게 주체성의 형성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당함, 또는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왜 기쁨의 계기는 찾을 수 없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김경재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한참 곱씹어보니, 내 질문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질때부터 시작은 고통이었다. 어두운 자궁에서 빛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질 때, 어떤 아기라도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울음이 잦아들고 아기에게 고요한 잠이 찾아올 때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태초의 관계맺음도 수동적으로 당하여지는 고통에 관계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앞에서 성숙해져야만 기쁨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함께 울 수 있어야 공동의 기쁨에 참여 할 수 있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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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중에서 - 2012.9.2

지금 지구촌에는 꿀벌들이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꿀을 따러나간 벌들이 전자파로 인해 길을 잃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구촌에서 꿀벌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4년안에 대재앙이 인류사회에 덮쳐온다고 합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들의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로 인하여 사과, 포도, 쌀 등의 먹거리가 생산될 수 없습니다. 먹거리가 없는 인류의 삶이란 고통과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ᆞᆞᆞᆞ
사람으로 인하여 꿀벌들이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짐으로써 인류의 운명도 위험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현상만으로 보면 꿀벌이 나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그 실상은 꿀벌 자체가 바로 내 생명입니다.

- 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30p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도법
불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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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 2012.9.2

페이스북에 쓴 글.

 

_________________________

 

 

 

함석헌 선생의 주옥같은 말씀 몇 구절 훔쳐오기.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사람들은 푸름을 노래합니다. 푸른 산, 푸른 바다, 푸른 청춘, 푸른 서울, 늘푸름, 늘봄. 물론 푸름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나 정말 푸름은 푸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푸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생명이 제 즐거움에서 푸름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푸른 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겉 푸름이 있고 속 푸름이 있습니다. 속 푸름에서 겉 푸름이 나왔지, 겉 푸름이 속 푸름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시 푸름이 되려면 반드시 한 번 죽어 썩어서 근본에 돌아가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푸름이란 없습니다. 없는 늘푸름을 나모하고 숭배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늘푸름은 전체에만, 근본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푸...름은 푸름이 아닙니다. 늘푸름은 가지는 것은 씨ᄋᆞᆯ뿐입니다. 씨ᄋᆞᆯ 속에는 푸른 잎도 있지만, 또 검은 뿌리도 있고 붉은 꽃도 있고 갈색 나무통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온 계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 27p

흙! 씨ᄋᆞᆯ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의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흑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나옵니다. 씨가 흙 속에 떨어지기 전엔 평안이 없습니다. 그저 불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자아를 열지 않습니다. 아구 트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질 때 거기서는 노래와 춤이 나옵니다.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씨ᄋᆞᆯ도 그렇습니다. 겸손히 역사의 바닥에 내려갈 때 혼의 평안은 오고, 혼이 평안을 얻을 때 거기서 우주의 영(靈)의 부름에 의한 활동이 기쁨과 영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아이들이 서로 치고 받아 그 피와 시체로 더럽혀 놓은 역사의 동산을 다시 푸른 생활로 갱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아! 봄이 왔씁니다. 여러분, 안녕하십시오.
-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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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부, "땅의 숨구멍" - 2012.5.24

페이스북에 쓴 글.

 

 

 

 

나도, 도시의 아스팔트, 시멘트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 내 방 책꽂이에 오래 묵혀두었던 녹색평론(81호)을 한권 꺼내 시 한편을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와 닿아 옮겨본다.

마지막 부분을 혼자 소리내어 읽어보는데, 빗물이, 흙탕물이, 소금쟁이와 물방개가 외치는 격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

땅의 숨구멍

권영부
...
매일매일 다져 밟고 사는 땅에는 숨구멍이 있다
봄비가 잔잔히 내리는 날에는
저 숱한 나뭇잎들이 걸러낸
맑은 빗물이 박하사탕처럼 싸하게 땅의 숨구멍을 타고 흘렀을 것이고,
제법 세차게 여름비가 내리는 날에는
농사꾼이 막걸리로 마른 목을 축이듯
땅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은 철철, 논물로 흘러들어
가장 넓게 몸을 누이고 가슴팍에는 소금쟁이와 물방개를 키웠을 것이다
여름 볕의 사랑에 온 몸이 달아오른 논물은
슬그머니 논고랑을 빠져나와 개울을 타고 만경창파로 흘러들지만,
단 한번도 땅의 숨구멍을 막은 적이 없다
질퍽거리는 논둑길을 걸어갈 때면 흙탕물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땅이 제 숨구멍을 막아대는 발자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수만년을 반복한 습성이기에
누가 누굴 탓하지도 않는다
이제, 논둑길이 헐리고 아스팔트로 땅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시절
빗물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빙빙, 돌고 돌다가 우리를 덮쳐도
오로지 하늘만 탓하고 살지만,
그 사이 우리의 몸뚱어리를 먹여 살리는 숨구멍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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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 2012.7.17

페이스북에 쓴 글. - 2012.7.17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 108게송으로 새롭게 중론 읽기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 108게송으로 새롭게 중론 읽기
김성철
불교시대사, 2004

 

 

 

오늘 아침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중론>에 대한 책을 다 읽었다. 나는 초딩때부터 절에 다녔지만 간단히 암송하는 불경 몇 구절에 대해서도 무슨 뜻인지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하기는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초딩때 아무리 들어봤자 이해를 했겠나...

<중론>은 인도의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용수(인도식 발음으로 나가르주나)가 저술...한 '공空'사상에 대한 핵심적 저작이다.

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다 접어두고, 딱 이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지식은 쌓아서 이룩되고 지혜는 부수어서 얻어진다"

공사상은 지혜를 얻는 것을 막는 온갖 희론, 망상, 헛된 관념을 때려부수는 무기이다. 마치 손오공이 108요괴에 맞서 싸우듯이.

나도 하'오공'(悟空)이 되고 싶다. 다 때려부수고 지혜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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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욕심과 분노의 구심점이다. 좋은 것을 나를 향해 당기는 마음이 욕심이고, 싫은 것을 나에게서 밀어내는 마음이 분노심이다. 욕심과 분노는 그 힘의 방향이 반대다. 불교 전문용어로 욕심을 '탐(貪)', 분노를 '진(瞋)'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탐'과 '진'의 마음은 모두 '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나며 이런 어리석음을 '치(痴)'라고 부른다. 이런 세 가지 마음, 즉 탐진치가 바로 '독과 같이 우리는 해치는 세 가지 마음(三毒心)이며 이를 제거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최종 목표가 된다.
겉으로 분노심과 욕심을 억누를 수는 있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우리 암속에서 분노심과 욕심은 다시 발생한다. 따라서 삼독심 가운데 가장 뿌리가 깊은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이다.

- 김성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의한 해탈],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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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나서 - 2012.8.18

페이스북에 쓴 글. - 201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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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 그리고 기쁨으로 충만하다!

맛있는걸 먹어서도 아니고, 멋진 광경을 보아서도 아니고, 누구에게 칭찬을 들어서도 아니다.
'존재의 실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스님의 복된 말씀 하나로도 이렇게 마음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드는건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내 삶 최초의 경이로움이자 불가사의다.

그대들은 '더위'의 실상에 대해 생각해 본적 있는가? 우리는 더위를 피하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여름 더위만이 벼를... 익게하고, 열매를 맺게하며, 그 탐스러운 열매로 아이들을 웃게한다. 그러나 오직 더위를 피하기 위해 창 밖으로 남에게 더 심한 더위를 전가하는 에어컨은 그런 기쁨들을 만들어 내지 못힌다.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복음(Good news)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불상도 탱화도 염주도 없는 작은 교육장에서 만난 도법스님의 말씀은 마치 첫사랑의 순간처럼 나를 두근거리게했다. 우리말로 암송했던 생명평화경도...

매달 인드라망 월례법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야겠다. 다음달은 9월15일(토) 2시 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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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 후기 - 2012.8.29

페이스북에 쓴 글. - 20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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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영화 은교를 보았다. 몇 가지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 적어본다.

1. 늙은 시인과 패기넘치는 신예 작가의 대결 구도 속에서, 문학적 열정과 출세욕을 투영한 것은 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스승이 제자의 작품을 대필해주는 이런 식의 사제관계가 현실에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좀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2. 이적요 시인의 욕망을 그리면서, 단지 그 욕망의 소중함만에 주목하지 않고, '늙어감'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 한 부분이 좋았다. (특히 이적요 시인의 대사 "젊음이 니 인생에 대한 상이 아니듯이, 늙음도 니 인생에 대한 벌이 아니다.")

3. 하지만 다른건 다 접어두고, 나는 이 두 작가의 관계에 돌발적으로 끼어든 '은교'의 출현이 좀 의아스러운 점이 많다. 너...무 동화적이기도 하고... 아니, 마치 요정같다. 사건의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좀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노 시인과 은교가 가까워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마치 남자가 몽정할 때 눈앞에 그려지는 흐릿하고 몽롱한 장면들을 옮겨놓은 것 같다. 나이 70먹은 할아버지가 자는데 17세 소녀가 그 다리 옆으로 들어와 잠을 자고, 잡자기 할아버지를 자기 무릎에 눕히고 헤나를 그려주겠다거나 하는 건 좀 지나친 남성의 성적 판타지 투사 아닌가?

4. 내가 말하고 싶은건 노 시인의 그런 욕망이 문제라는게 아니라, 이 요정같은 '은교'는 영화 내내 그런 욕망의 객체로 그려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영화에서 은교는 흔들의자에 하얗고 눈부신 허벅지를 드러내고 잠을 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할아버지가 써 준 소설 속에서 자신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 자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5. 감춰진 은교의 욕망. 난 그게 궁금하다.

6. 어쨌든 '은교'는 근래 내가 본 영화중에 가장 충격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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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 2012.12.24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2

 

 

며칠간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시를 만났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의 속물스러움, 누워서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 누군가에게 마음껏 능멸당해도 싸다 싶을 자신의 내면에 거침없이 맞서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당할 자는 없다. 그런 사람, 김수영은 너무나 무섭고, 충격적인 인간이다.

6.25 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에 잡혀있는 동안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친구와 살림을 차린 부인, 게다가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는 간청을 뿌리쳐 시인의 인생에 거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부인. 그리고는 결국 54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부인 김현경.

아래의 시는 63년 어느날, 부인 김○○을 백주 대로에서 때린 일과 관...련된 시이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는 기겁할 시 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떨리는 시선을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 시의 마지막 행을 읽고, 책을 집어던졌다. 결국 이 꼬라지를 한게 인간이구나 싶어서... 시인의 눈을 통해서 이 따위 꼴을 한 인간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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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은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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