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블로그에 글을 잘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가장 몰두하게 되는 독서는 역시 금융위기와 공황,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관련된 책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게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런 위기와는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최종병기그녀(最終兵器彼女).
자세한 설정을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세계가 멸망해가는 전쟁통에 "최종병기"가 된 치세와, 그녀의 남자친구 슈지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를 군사무기로 전유하는 설정에 대해서 페미니즘적 비판이 있기도 하고, 군국주의적인 설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작 "최종병기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혀 가상적이다. 말하자면 전혀 있을법하지 않고, 그래서 일종의 판타지.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라고, 혹은 현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이 사랑하던 말던, 아파하던 말던, 세상은 전쟁으로 멸망할 예정이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당연히 희망도 별로 없다. 마지막편에서는, 주인공들이 있던, 후카이도에 마지막 남은 마을마저 폭격과 해일로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금융위기의 시작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뒤메닐-레비나 윤소영선생의 분석처럼 2012/13년 경에 최종적 위기를 경험하게 될까, 혹은 지금일까, 혹은 더 먼 언젠가일까,
여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우리의 주관적 희망과는 무관하게 점점 더 최악으로 상황으로 전개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치세와 슈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것처럼)
*** 너희들이 무슨 점쟁이냐는, 혹은 너희가 뭔데 그렇게 오만하게 예상하냐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운동권들의 심리는 순전히 사태의 진실을 믿고싶지 않은 주관적 희망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무지의 근거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니면 어떤 선의에 기반한 희망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도 최후의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혹은 구하는 것일테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준비라도 다 할 것이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적어도 5년 후의 시각에서 현재를 보아야한다. 매순간 그렇다. 5년후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그 때 무엇을 했어야한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인식하는 우리 모두는 전혀 다른 책임감으로 행동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전혀 알수 없다. 다만 시간은 그저 '역사의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최종병기그녀"의 시간대, 그 시간대에 살아가는 치세와 슈지의 시간대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다. 무엇에 최선을 다하는지는 치세와 슈지와는 다르겠지만(이건 연애얘기는 아니니까), 그/녀들의 말처럼, 살아남아야한다.
하지만 어쨋든, 결과가 세상이 망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치세와 슈지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그/녀들 보다는 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 포스터에 겁먹은 표정의 소년이 와타루 미타니,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네권짜리 원작소설도 있고 열몇권짜리 만화책도 있는 데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있다.) 몇몇 극장에서 상영중.
RPG게임의 전개방식을 차용하기도 한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지난번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볼 때처럼, 내가 여전히 하나의 소녀이거나 소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되기는 아직 좀 먼 것일까. 하지만 늦게 어른이 되어가서 좋은 점도 있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면서 좀 더 클 수 있다. 그리고 좀 다른 측면에서는 작품 속의 상징들을 더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랄까.
"용기는 빵점, 체력은 평균" 포스터에 나온 이 구절은 와타루에게 환계(幻界)의 도사가 한 말이다. 굳이 이런 말이 아니라도, 보는 내내, 와타루, 넌 참 나와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이혼하고 어머니는 아파서 쓰러진 와타루는, 성공하면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여행-모험을 환계(환상계, 따라서 상상계)로 떠난다. 실패하면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모험이다. 와타루의 소원은 가족의 복원.
이건, 부모가 이혼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이혼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같다. 그 결정적인 모험이 하나의 여행이고, 그 장소가 상상계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위험이 있는 장소다. 사실 내가 작년에 헤어지고 떠난 여행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는 유럽대륙이었지만) 바로 그 상상계였던 셈이다. (제대로 돌아왔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전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제는 실재계로 "어떻게 돌아와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게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여행을 떠난 와타루가 만난 것은 어떤 것들일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인격을 갖춘 온갖 상징들이다. 먼저 여행을 떠난 친구 미츠루는 외롭지만 내면이 강하다. 중간중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들에서 작가는, 무엇이 강한 것인지를 다시 묻는다.
원하는 대로 운명을 바꾸어 준다는, 운명의 여신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시험에서, 와타루와 미츠루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부정적인 면, 아니 그 보다 슬퍼하는 자신을 만나고 싸운다.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와타루가 그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아주기 때문이다.(그것이 자신과 싸우고, 결국 그 가슴에 칼을 꽂는 미츠루와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작년, 가장 힘들었던 어떤 시점에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내가 나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야", 라고.
그것이 자신과 싸우는 "또다른 자신을 살해하는", 그래서 결국 "자신"을 살해하는 미츠루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으론 그 동안 내 마음을 얼마나 살해하려고 했는지 생각한다.(그래서 나는 혹은 우리 모두는 와타루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느 정도는 미츠루이기도 한 것이다.) 백무산 시인은 <인간의 시간>에 실린 시, "마음을 살해하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면 죄악이란 무엇이겠느냐 눈에 보이는 것들 살아있는 것들 다 쏴죽이고서 그 시체들이나 잔뜩 쌓아두고 있는 마음이여 너를 살해한다
백무산 시인에겐 죄송하지만, 나를 살해하는 대신, 품어주고 싶다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나서 만난 운명의 여신에게, 와타루가 말한 소원은 애초에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었다. (나도 작년에 얼마나 그 운명의 여신 Fortuna에 몰두했었는지, 심지어 유럽 여행지에 유명한 박물관에서 마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Fortuna를 일부러 찾았던 것이다.) 그 대신, 억지로 바꾸려고 했던 운명 때문에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끝내달라고 이야기한다.(환상계의 친구들을 위한 소원이다) 운명(의 여신)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던 거다.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대면하는 것. 바로 나의 운명에.
그래서, 용기는 빵점인 소년 와타루의 이야기에 제목이 브레이브 스토리 Brave Story가 된 사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용기란, 무서운 괴물, 적들을 대면하는 것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것, 품어줄 수 있는 것,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 그리고 타자를 만나고 고통을 공감할 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에 마주했을 때, 비로소 와타루는 환계(상상계)를 구하고,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원했던 것, (정상)가족의 복원이 아니라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
(상상계에서 오히려 실재계에서 보다 더 진실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이란! 주체들은 사실 실재계보다는 상상계 속에 있기 때문일까?, 또는 진정한 용기는 상상계를 추악한 마물들로부터 구하는 그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상상계를 구하는 와타루의 행위는 자신을 보둠어주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난삽하게 이야기하다보니, 오히려 맥빠지고 밋밋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애니에는 이런 얘기들은 안 나오니 안심들 하시길, 쓰고 나서 보니, 이 글은 애니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증류시키면 이렇게 김빠진 술처럼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랄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와타루의 모험을 함께 하다보면, 내가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생각하게 될 내용이다.
* 주제곡도 좋다.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OST 중에서, "결심의 아침에"
決意の朝に (결심의 아침에)
Artist : Aqua Timez
作詩:太志 作曲:太志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いこうよ 기왕이면 서투른 꿈을 꾸면서 가자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で明るく愉快な愛のある夢を 기왕이면 서투르고 밝고 즐거운 사랑이 있는 꿈을 「気取んなくていい かっこつけない方がおまえらしいよ」 「신경 안써도 돼. 폼 안잡는 쪽이 너 다워서 좋아」
一生懸命になればなる程 空回りしてしまう僕らの旅路は 열심히 하면 할 수록 헛도는 우리들의 여행은 小学生の 手と足が一緒に出ちゃう行進みたい 초등학생 때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행진 같아 それもまたいいんじゃない? 生きてゆくことなんてさ 그것도 좋지 않아? 살아 간다는 건 きっと 人に笑われるくらいがちょうどいいんだよ 분명,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당할 정도가 딱 좋아
心の奥の奥 閉じ込めてた本当の僕 마음의 안의 나. 가둬 두었던 진짜 나 生身の36度5分 飾らずにいざwe don't stop 몸의 36도 5부. 허세 부리지 말고 we don't stop けどまだ強がってるんだよ まだバリアを張ってるんだよ 하지만 또 강한 척 하고 있어. 또 방어막을 치고 있어 痛みと戦ってるんだよ 아픔과 싸우고 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なのさ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야
僕だけじゃないはずさ 行き場のないこの気持ちを 나 뿐만이 아닐거야. 갈 곳이 없는 이 기분을 居場所のないこの孤独を 있을 곳이 없는 이 고독을 抱えているのは… 안고 있는 것은…
他人の痛みには無関心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 そのくせ自分の事となると不安になって 그런 주제에 자신의 일이 되면 불안해 하고 人間を嫌って 不幸なのは自分だけって思ったり 인간을 싫어해. 불행한 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해 与えられない事をただ嘆いて 三歳児のようにわめいて 가지지 못한 것을 단지 한탄하면서 3살짜리처럼 우는 愛という名のおやつを座って待ってる僕は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앉아서 기다리는 나는 アスファルトの照り返しにも負けずに 아스팔트의 열에도 지지 않고 自分の足で歩いてく人達を見て思った 자신의 다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깨달았어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もう二度とほんとの笑顔を取り戻すこと 이제 두번 다시는 진정한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는 できないかもしれないと思う夜もあったけど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밤도 있었지만
大切な人達の温かさに支えられ 소중한 사람들의 따뜻함에 도움 받아 もう一度信じてみようかなと思いました 다시 한번 믿어 볼까 하고 생각 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だけど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過ちも傷跡も 途方に暮れ べそかいた日も 잘못도 상처도 어찌할 바 모르고 울상 짓고 있던 날도 僕が僕として生きてきた証にして 내가 나로서 살아간 증거로서 どうせなら これからはいっそ誰よりも 기왕이면 이제부터 아예 누구보다도 思い切り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ゆこう 마음껏 서투른 꿈을 꾸며 가자 言い訳を片付けて 堂々と胸を張り 변명을 정리해버리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自分という人間を 歌い続けよう 자신이라는 인간을 계속 노래하자
나름대로 취향을 탈 것같은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인 단편 애니 <별의 목소리>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좋아할만하다.(그래서인지 개봉관도 많지 않다. 상암CGV까지 조조 상영에 맞춰 헐레벌떡 겨우 찾아가서 봤는데, 그나마 '인디상영관'에서 상영중.) 극장에서 <초속5센티미터>를 보더라도, <별의 목소리>는 꼭 미리 보아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영화에 대한 아래 나의 이야기는 아마 다 헛소리로 들릴 공산이 크다.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보기
영화는, 초등학교 때만난 타카키와 아카리의 관계를 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1부), 고등학교(2부), 어른이 된 시기(3부), 세 편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1부 : 벚꽃 무리 2부 : Cosmonaut(우주비행사) 3부 : 초속5센티미터
그러나 이 영화는 청소년기의 감정을 그린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어른스럽게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청소년기라는 설정이 작품에 독특한 효과를 주기 위한 하나의 설정일 뿐, 영화는 시간과, 사랑, 그것의 엊갈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감독은 자신이 이미 사용했던 익숙한 소재들을, 다른 공간에서 변주한다. 예를 들어 <별의 목소리>에서 문자메시지라는 소재. 영화들에서, 문자메시지는, 먼 별 어느 곳에서 시간을 지나 수광년을 떨어져서도 달려오거나, 혹은 가까이서 수천번을 보내도 1센티미터도 다가가지 못하거나, 버릇처럼 수신자없이 쓰여지고, 누군가는 그 수신자가 자신이길 바라고.. 그것은 도착하지 않은 편지, 혹은 보내지 않은 편지, 그리고 감정.
이 영화가 독특한 것은, 주인공인 타카키가 나와 같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인물들, 아카리, 혹은 카나에..들이 어느 장면들에선가 모두 나와 같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3부, '초속 5센티미터'에 어른이 된 타카키가 선 상황이.. 오래 찾아오던 것을 어느 새 모르게 놓쳤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나의 현재와 같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는 다른 인물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나와 같다고 느낀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은 살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어떤 때에는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어떤 때에는 상처를 입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시간은 어긋나고, 그래서 모두 그/녀들 모두는 나와 같은.., 혹은 타카키처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느 새, 오래 찾아오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거나 놓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기 때문에. 항상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너무 늦게.
영화의 주제가인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가 흐르는 때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이 노래가 나올 때, 당신도 나처럼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위안이 된다면, 벗꽃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던 그 철도 건널목, 마지막 장면에서 타카키가 아카리를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고 해도,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는 것을 아카리가 이야기하는 첫 순간부터 그 장면까지.. 그것이 슬프더라도, 여전히 모두 아름답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これ以上 何を失えば 心は許されるの 이 이상 뭘 잃어야 마음을 용서할 수 있을까 どれほどの痛みならば もう一度君に会える 어느정도의 고통이여야 다시 한번 널 만날 수 있을까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食い違うときはいつも 僕が先に折れたね 일이 안 풀릴땐 언제나 내가 먼저 양보했었지 わがままな性格が なおさら愛しくさせた 제멋대로던 성격이 더욱 사랑스러웠어
one more chance 記憶に足を取られて one more chance 기억에 다리를 잡혀서 one more chance 次の場所を選べない one more chance 다음 장소를 고를 수 없어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向かいのホーム 路地裏の窓 맞은편 홈 골목길 창가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もう何もな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さみしさ紛らすだけなら 誰でもいいはずなのに 슬픔을 달랠 뿐이라면 누구라도 좋을텐데 星が落ちそうな夜だから 自分を偽れない 별이 떨어질 듯한 밤이니까 자신을 속이지 못해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交差点でも 夢の中でも 교차점에서도 꿈 속에서도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했던 "좋아해"란 말도
夏の思い出がまわる ふいに消えた鼓動 여름의 추억이 맴돌아 갑자기 사라진 고동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明け方の街 桜木町で 새벽녘 거리 벛꽃나무 마을에서 こんなとこに来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올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 もう何も無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かけら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조각을 旅先の店 新聞の隅 여행 안내소 신문 모퉁이
こんなとこにあ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한 "좋아해"란 말도
いつでも探してしまう どっかに君の笑顔を 언제나 찾게 되버려 어딘가 너의 미소를 急行待ちの 踏み切りあたり 급행열차 대기소 횡단보도 근처
こんなとこに 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命が繰り返すならば 何度も君のもとへ 생이 반복된다면 몇번이고 네 곁으로 欲しいものなど もう何もない 바라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君のほかに大切なものなど 너 외에 소중한 것따윈
6월21일에 DVD발매가 되었다니까 얼마있으면 인터넷에 돌긴 하겠군요. ^^;
인터넷에 올라온 감상들을 보면, 영상이 아름답다거나하는 호평과 혹은 내용이 없다는 혹평이 많습니다. 감독이 영상미에 탁월하기도 한 게 사실이기도 한데, '내용'이 없다는 이야기가 복잡한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죠. 이건 하나의 뮤직비디오 같아서(실제로 3부는 사실상 주제가에 대한 뮤직비디오입니다.) 감독이 전달하고자하는 것은 줄거리라기 보다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좋아하실 분들은 좋을 영화.
줄거리나 설정은 검색엔진에 찾아보면 나올 테니 생략.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해들어갈 수 있는 DC mini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놀라운 설정과 상상력의 산물. 프로이트를 애니메이션에 초대해서 '노는' 셈인데, 흥미롭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1.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의식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에서는 정신분석가, 혹은 정신과의사들의 일일텐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이 우리 무의식에 접속하거나 들어오는 과정은 항상 불충분하다. 그러니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처럼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좋을까?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나 정신과치료의 과정에서, 피분석자 혹은 환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치유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직접 무의식을 투명하게 보고, 개입한다고 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의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저항'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게다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전이-역전이를 너무나 위험하게 만들 것같다.
2.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John Lennon의 부인인 Yoko Ono가 한 잘 알려진 말.
그런데 영화는,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긴 하는데, 그런데, 그 꿈이 악몽이면 어쩌지? 라고 묻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인 꿈을 꾼다. 그것은 온갖 상징들, 욕망들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기괴한 모습이다. (위에 포스터에서, "This is your brain on anime."라는 말, 파프리카 안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것들이다.)
집단이 혹은 대중이 함께 꾸는 꿈은, 그래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지만, 그것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나의 집단적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역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우리가 집단적인 꿈을 모두 기각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오히려 집단적인 꿈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느낌이지만 말이다.(그 위험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경고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의식적인-지적인 요소와 결합하고 반성하지 않는, 날 것 자체의 무의식과 욕망은 현실이 될 때 끔찍할 수 있다.
3.
(꿈 공간의) 파프리카는 (현실 세계의) 아츠코 치바의 또 하나의 주체. 파프리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꿈의 세계에서 치바 대신 나타난다.
지나가는 대사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이 장면. (그림은 파프리카)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자.
(치바) : 멋대로 앞서가지 마, 파프리카 (파프리카) : 항상 너만 옳은 건 아니잖아 .. (치바)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파프리카) 아츠코(치바)가 내 분신이라는 발상은 못 하나봐? (치바) : 내 말을 들어 (파프리카) : 모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되리라는 생각은 어느 대머리 아저씨랑 똑같은 것 같은데?
(참고로, 여기서 '어느 대머리 아저씨'는 모든 사람의 꿈을 지배하려는 노인네를 지칭한다.) 의식-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주체인 파프리카가 오히려 의식-주체인 치바에게 네 멋대로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항상 무의식에 이런 저런 것을 강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의식이 항변한다.. 그럴 때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 파프리카는, 치바의 말처럼 '멋대로 앞서'간다. 주체가 어쩔 수 없이..
정신분석책에나 나올 개념들을, 스토리로 구성해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후반부에는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약간 무리하는 것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상력과 사고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작품.
위의 글을 읽다가 오랜만에 군대생각이 났다. 26개월. 논산에서 훈련받고 철원 6사단, 최전방 사단에서 육군, 90미리 무반동총 소대에서 복무했다. . . . 군대는 가장 끔찍한 기억이다. 물론 지금도 만만치는 않지만. 특히, 훈련소는 그렇다. 위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나에게는 낡은 "육군수첩"이 하나 있다. 그런 걸 보관하는 이유는, 내가 첫번째 면회를 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공간인 입소대, 훈련소와 첫배치받은 부대에서 스스로와 대화하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정말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글을 썼다.민중가요를 잊지 않기 위해서 생각나는 모든 노래를 적었고, 매일 일기를 썼다. 반공교육 교재에 나오는 한총련 출범 선언문을 배껴적었다.('교재'에서 배껴쓴 94년 슬로건;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 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이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아마 그것도 없었다면그 공간에서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수첩을 "보급"받은 날은 입대 3일째 되는 날부터. 이날의, 며칠의 일기. 어쩌면 유치하지만 가장 솔찍한.
나는 1995년2월28일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제5교육중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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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지루하다. 불안하다. (중략) 오늘부터 민가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도 몇개씩 틀리는 것이 잊고 기억안나는 것도 있다. 점점 더 잊어먹겠지. 빨리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써야지. 그래도 오늘은 삼일절이다. 이런 글 쓸 정도의 여유라도 있다. 이런거라도 계속 쓰니까 시간은 간다. 갑자기 앞일이 막막하다. 그래, 오기 전 생각으로 지내야지. 가볍게 생각하자, 겨우 2년이다. 금방 갈거다. 제대해서 웃는 얼굴로 동지들을 다시 만나자! 아, 지금도 검은 창살아래 박노해, 백태웅, 수많은 구속수배 노동자들. 사회와 격리되고 운동과 격리되고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동지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그런 동지들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나은 편이겠지.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4일째] (중략) 시를 외우기로 했다. 지금 갖고 있는 건 "썩으러 가는 길" 뿐이다. 다음에 편지하면 용운형과 명진이 형한테 시좀 프린트해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다. 일단 있는 것부터 외워야지. '민들레처럼', '강철은 따로 없다', '전사2'가 먼저 보고 싶다. 그 외에도 몇가지. 고 김남주님의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등등등. 빨리 편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왜 언제나 최상의 조건만을 요구하는 지.. 나보다 고생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중략) 그리고 오늘 새로온 친구들을 갈궜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다니, 고참되어서 남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반성하자. (후략)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 : '복무신조'라는 것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개소리 나올 때와 애국가를 부르라는 데 '동해물과~'가 나올 때. 이 치욕.
[일주일후-주특기배치후] '낙관적이라고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 실컷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리더스다이제스트에 95년2월호에 나온 말이다. 정말 좋은 말 같다. 정말 낙관적이라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군의 정신교육기능 중 하나로, 저들이 말하는 것이 국군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같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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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후 2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군가 몇곡을 부른 적은 있어지만 한번도 '애국가'와 '멸공의 횟불'같은 것은 부르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대신 눈밭 겨울 100km 행군 중에 '녹슬은 해방구', '빨치산의 밤'을 혼자서 불렀다.
그런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어쩌면 더 나약한 지도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수첩을 다시 펼쳐보면서, 오늘의 나를 돌아본다. 오래된 내가 나의 거울이다.
전혀 딴 얘기일 수도 있는데... '내일의 기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오로지 일만보고 달려온 남성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다룬 전형적인 최루성 영화입니다. 한순간 기억을 잃어버리는게 아니라, 조금씩 소멸되어가고, 게다가 그걸 본인도 알기 때문에 기록에 집착하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뭐 그런 얘기입니다. 그에게는 그나마도 마모되어 가고 있는 자신만의 기억이 전부이지만, 직장동료, 가족 등의 주변인들, 그리고 그가 몸담았던 장소들에는 그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그의 과오, 그의 장점, 그가 했던 일 등등이 더 많이 각인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기억이 소멸되어 가는 고통은 (물론 본인이 가장 크겠지만)오롯이 그의 것만은 아닌 것이지요...
손님의 댓글을 보고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 누군가를 만날때 기억을 쌓아가는 것처럼, 누군가와 헤어질 때 기억을 그 역순으로 잃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추억이라는 것으로 남고 또 아프기도 하죠.. 영화는, (영화속 주인공이) 그런 식으로 기억을 잃어갈 때, 그것이 관계의 두 사람에게 비대칭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어느 한 명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가 그런 것같습니다. 비대칭성..
2006년작 애니메이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F 혹은 그냥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주인공 콘노 마코토(소녀)는 우연한 기회에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훌륭한 SF, 판타지들이 그렇듯 그것은 하나의 설정.
콘노는, 몇번이건 시간과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과 사건을 자유자재로 반복할 수 있는 가운데, 시간과 그것과 연결된 사건은 유일무이하고, 단 한번, 그래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 작품에서 시간은 항상 사건과 연결된다.) 가장 소중한 시간-사건은 그 많은 반복가능한 시간-사건 속에서 다만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하나의 시간,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은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와 마지막 순간. "미래에서 기다릴게"
이 영화는 소녀의 성장소설, 애니이라는 점에서 하야오의 <귀를 기울이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녀의 성장소설, 하지만 어떤 때엔 이미 지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한 사람의 마음, 꿈들에 대해서 다시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들.
<귀를 기울이면>의 이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컨트리로드>는 정말 명곡. 동영상을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꼭 보시길. 애니메이션 최고의 명장면과 OST.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찾은 시간의 의미. 우리는 굳이 타임리프가 없더라더라도 사건과 시간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마치 굴레 속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콘노처럼, 단 하나의 사건-시간의 의미를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야 겨우 알게 된다. 그것이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운명.
겨울철쭉님의 [[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 에 관련된 글.
흠...역시 진보블로거엔 이 작품에 대한 포스트가 존재하는구나 홍홍
애니를 보고 나서 감상평을 좀 넓혀볼까 하고 검색했는데, 읽을만한가 싶으면 죄다 돈 내래서 짜증났다.
몸도 마음도 지치는 요즘,
찐하게 눈물 흘리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에 영화 <행복>을 보러갈까 고민하다가
애매한 상영시간에 컴터 앞에 주저앉아 애니매이션을 보게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준 영화평인 것 같습니다.
종종 영화평들이 자폐적이거나 자기매몰적인 경향 혹은 지나치게 현학적인 경향들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영화평들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데, 겨울철쭉님의 영화평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기위한 길잡이로서의 역할에 성실하다고 보여지네요.
그 점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보고싶구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우와~ 고맙습니다. 정말 멋진 장면이죠. 원래가사와는 다르지만 가사도 정말 좋구요. 이런 거 보면 일본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불끈들다가 좌절;; ^^;
우리말로는 가사가 이렇습니다. 컨트리로드 원래 내용과는 다르지만 더 좋아요 ^^;
외톨이를 두려워 하지 않고
살아 가자고 꿈을 꾸었어
쓸쓸함을 억누르고
강한 자신을 지켜 나가자
컨트리 로드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그 마을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컨트리 로드
아무리 절망적일 때라도
결코 눈물은 보이지 말아줘
생각탓인지 발걸음이 빨라져 가네
추억을 지우기 위해
컨트리 로드
이 길이 고향으로 이어져 있어도
난 가지 않아
갈 수 없어, 컨트리 로드
컨트리 로드
내일에는 여느 때의 나야
돌아가고 싶어, 돌아갈 수 없어
안녕
컨트리 로드
술자리 대화에서 추천받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플루토>. <20세기 소년>, <몬스터>, <마스터 키튼> 등을 그렸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鐵腕 아톰> 24~25화, "지상최대의 로봇"편에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테츠카 오사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인지, '지음'을 그로 했다. 작품의 이미지, 인물 모든 곳에서 오마주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최대의 로봇"편을 애니메이션으로 봐야한다.) 이제 일본 만화들이 세대를 넘어 세대간-재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주요 포탈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되겠고. 현재 국내에는 2권까지 정식발매되어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4권+a까지 볼 수 있다.) "지상최대의 로봇" 편에 나오는 7개의 로봇과 이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플루토'가 나온다. 캐랙터들은 모두 재창조되었는데, 위에 책 표지에 나오는 것이 게지히트 형사(左)와 아톰(右)이다. 각각의 로봇 캐랙터 모두(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 [左] <철완 아톰>에서 게지히트 형사와 플루토의 대면, [右] <플루토>에서 아톰.
그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시작해서 헐리우드의 "AI", "바이센티니얼 맨", "아이,로봇"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의 인간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영혼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이 변주되어왔다. 그러나 그 원형은 아무래도 '아톰'이라고 할 만한데,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침내 '완벽한 로봇'은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슬픔까지(그렇다면 사랑까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아톰의 원래 창조자인) 텐무 박사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놓여진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지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 만화는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철완 아톰>이 처음 연재된 50년대초부터 6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70년대는 일본의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이 가시화되면서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으로 느껴졌던 시기,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진 시기다. 그런 고민은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은 인간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가.
(그런 점에 비해서 "공각기동대"는 고유한 '인간'에 비해서는 '인공적인 지능' 자체에 촛점을 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 의미는 <철완 아톰>에 비해서 후퇴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특히 "공각기동대2-이노센스"는 더 심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다시 복제하는 헐리우드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이 작품도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쟁에 가슴 아파하고,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로봇을 지키려고 하고, 살아있는 것들/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윤동주, 序詩) 증오와 분노로 고통받는다.(한 에피소드에 자신을 드러낸 플루토가 보여주는 감정은, 다른 것들보다 '슬픔'이다.) 당신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 아이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나는 마음이 벅차 올랐다. 로봇인 내가.." (로봇 형사 게지히트가 아톰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
고유하게 '인간적'이라고 정의된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속에 존재하는 증오와 고통을, 인간적인 것의 또 한 부분으로 대면시킨다.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영혼을 가진 플루토는 (오히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또한 단지 '인간적인 것'이 고유하게 '선한 것'으로 규정된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증오와 고통에도 눈감지 말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눈앞에서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플루토'는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인간을 비추어보는 거울.
한편, 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는 그리스신화의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이다. 그래서 Pluto는 명왕성冥王星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국제천문연맹의 결정으로 태양계의 형성planet이 아니라고 '결정'되고 소행성asteroid 134340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치 이 만화에서 플루토가 SOL228350..뭐 이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작년에 이 결정이 있은 후에 '미국 방언협회'라는 단체가 plutoed라는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추락하다, 위신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저승의 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플루토, 하데스를 먼 태양계 외곽의 소행성대인 카이퍼벨트에 추방하고자하는 무의식들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보여주는 것처럼, 플루토-죽음은 인간적인 것-삶의 이면이며,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고, 우리의 '인간적인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고통들에도 대면해야한다. 마치 아톰이, 플루토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그것은 (주인공격인) 게지히트, 이건 또 하나의 당신이라고,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4권,Act27) 그때 아톰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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