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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문화]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_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로 보는 관료주의의 폐해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5/06 15:11
  • 수정일
    2011/05/06 15:1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안보 투쟁과 관료적인 사회주의 조직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는 일본에서 안보투쟁이 한창이던 1960년에 만들어졌다. 1957년 수상으로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전국민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안보투쟁이라 부르는데,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명하고 일본을 냉전체제에 편입시키려는 미일상호방위 개정에 맞선 반전평화 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 5월 자민당 정부는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으로 받아들여졌고, 전국적인 반대투쟁이 이어졌다. 이 투쟁으로 기시 내각이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지만, 조약개정을 막지는 못했다.
안보투쟁이 한풀 꺾인 뒤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점차 활기를 잃어 가고, 결국 적군파 같은 과격한 테러 집단으로 전락한다. 안보투쟁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다지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관료주의가 한 몫을 했다.
감독인 오시마 나기사는 이 영화를 통해 50년대 일본 학생운동과 일본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의 학생운동 시절 경험이 뒷받침한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개봉 나흘째 되던 날 상영이 중단됐다. 제작사인 쇼치쿠 영화사가 사회당 당수 아시누마 이네지로의 암살 사건을 핑계로 영화 상영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10년 전, 타카오의 죽음

 

 

 

 영화는 레이코와 노자와라는 사람의 결혼식에서 시작한다. 둘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만났다. 노자와는 학생운동을 하다 그만둔 뒤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가 됐고, 신부인 레이코는 학생운동 활동가로서 안보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결혼식 사회는 노자와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자치위원장이었던 나카야마가 맡는다.
모두의 축복 속에 진행되던 결혼식에 불청객 두 명이 끼어든다. 한 사람은 신부와, 다른 한 사람은 신랑과 관계가 있다. 레이코와 함께 안보투쟁에 참여했던 오타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지만 투쟁 대열에서 이탈한 친구들을 비판하기 위해 결혼식에 참가한다. 그는 레이코가 안락한 결혼 생활을 위해 키타미라는 동지의 실종을 모른 척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불청객 타쿠미는 노자와 등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인물로 나카야마와 노자와에게 10년 전 죽은 타카오라는 동료의 일을 캐묻는다. 그리고 타카오의 죽음과 키타미의 실종이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영화는 10년 전 사건과 몇 달 전 사건을 뒤섞어 이야기하며 두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가면을 들추고 상처를 드러낸다. 10년 전에 타카오가 죽음을 택하게 된 까닭은 당 지도부가 그에게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었다. 대학 자치회(남한의 학생회에 해당)에 몰래 들어와 운동 관련 문건을 보다가 들킨 사람을 스파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그를 자치회 건물 안에 가둬 두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둬둔 사람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았던 타카오는 스파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나카야마는 타카오에게 스파이가 된 경위서를 적어내지 않으면 제명하겠다고 협박한다. 그 뒤 타카오가 스파이라는 자백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회의와 절망에 빠진 타카오는 결국 자살한다. 타카오의 유서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 타쿠미는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나카야마와 노자와에게 책임을 묻지만,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모른 채 화합을 깨뜨린다는 비판만을 받는다.

 

10년 뒤, 사라진 키타미

 

평범한 대학생인 키타미는 열렬한 활동가인 레이코와 오타에 손에 이끌려 안보투쟁에 참가한다. 투쟁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키타미와 레이코는 병원에 입원한다. 키타미가 부상이 다 낫기도 전에 다시 투쟁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레이코는 어짜피 조약은 체결될 것이라며 집회 참여를 만류한다.
왜 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키타미에게 레이코는 키타미가 처음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털어놓는다. 레이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회 장소로 돌아간 키타미는 사람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을 마주하자 깊은 절망감에 빠져 운동을 포기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오타는 키타미가 경찰에 잡혀갔거나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지가 사라졌는데도 결혼식이나 올리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리고 키타미의 실종이 레이코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레이코를 추궁한다. 하지만 키타미의 사라진 데에는 오타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전위라 칭했던 세력의 지도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나카야마는 궁지에 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오타가 경찰에 잡혀가게 되면서 논쟁은 중단되고, 나카야마가 운동 내 쁘띠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상황을 정리한다. 나카야마는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비판의 자유를 막는 독선적인 지도부

 

50년대 초 일본 학생운동은 일본 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당의 방침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고 이를 따라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 노자와의 친구들은 모두 일본 공산당의 영향 아래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다. 대학교 자치위원회 위원장이며 공산당 당원이었던 나카야마는 당의 방침을 일방적으로 내리꽂는 인물이다.
이런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노자와는 반대 세력을 억누르며 나카야마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나카야마와 노자와는 공산당의 권위를 업고 노동계급 어쩌고 운동의 정신이 어쩌고 하는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말을 남발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한다. 공산당의 노선이 변함에 따라 이들의 주장은 극에서 극으로 오락가락했지만 지도부인 그들은 자신의 투쟁방침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당의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거나 적의 편을 드는 변절자로 몰아간다.
함께 활동을 하던 사카마키, 토우라, 타쿠미 등은 나카야마의 독선적인 태도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나카야마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분위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펼치지 못한다. 결국 건강한 활동가였던 이들은 무기력과 체념에 빠져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맹목적인 추종자였던 노자와도 결국에는 나카야마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운동을 그만둔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카야마의 관료적인 조직운영이 사람들을 운동 밖으로 내몬 것이다.

 

대중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위주의

 

50년대 중반을 거치며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에 반기를 드는 흐름이 학생운동 안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취하는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을 비판하며 국회의사당 진입과 같은 전투적인 행동을 취한다.
이들을 흔히 신좌파라고 불렀는데 레이코와 오타가 바로 그 신좌파였다. 영화 속에서 오타가 나카야마, 토우라 등에게 거친 언사를 늘어놓는 배경에는 신·구좌파의 대립과 갈등이 놓여 있다.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이들 신좌파도 자신들의 조직운영 방식에서는 구좌파와 다르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오타 역시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토우라 등이 10년 전에 나카야마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한 것을 욕하기만 할 뿐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또 키타미가 안보투쟁 과정에서 회의를 느끼고 운동을 떠나는 것이 자신의 그런 독선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키타미가 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사라진 이유는 레이코와 오타가 심어준 환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투쟁하면 조약개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키타미로서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자 혼란스러워했다. 혼란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는 키타미에게 오타처럼 더 열심히 투쟁하자는 말만 외치는 사람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키타미가 사라진 까닭은 대중에게 운동의 전망을 솔직히 보여주지 않고 금방 승리를 얻을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 활동가들의 잘못된 태도에 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진실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지 않고 그들을 주체로 만들려는 노력 없이 거짓된 환상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해 쉽게 대중을 동원하려는 조급함이 이런 태도를 낳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이야기는 남한 운동진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과거 남한의 운동조직에서도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정권의 탄압 속에서 조직을 비합법적으로 운영하면서 경직된 조직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에 조직 내부에서 비판의 자유는 거의 없었다.
누구나 민주집중제를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민주”보다는 “집중”에 훨씬 강조점이 찍혀 있었다 보안과 규율, 단결과 통일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언제나 개인이 가진 “비판의 자유”를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암묵적으로 강하게 억압했다. 이 속에는 조직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초인적인 전위관이 깔려있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런 실수와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구성원들의 비판과 자유로운 토론이다. 지도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구라도 그에 대해 비판을 하고 토론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단합과 통일을 핑계로 비판을 막을 때, 그 조직은 자기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괴물과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활동방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몇몇 활동가의 화려한 전술 사로 쉽게 투쟁에서 승리하려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따낸 승리가 대중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더 큰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투쟁이 성공하지 못하게 됐을 때 대중이 느끼는 패배감은 매우 컸고, 그로 인해 빠르게 운동에서 이탈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조직들은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운영을 계속하다 대중과 점점 멀어졌고 결국 붕괴했다. 남한 사회주의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열린 자세로 조직 내외부의 비판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일본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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