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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독자편지]어느 교생의 이야기...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56
  • 수정일
    2011/06/27 15:5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한 독자회원이 교생실습 과정에서 느낀 소감문을 기고해주었다. 교생실습을 하면서 경험한 학내의 비민주성과 권위주의, 그리고 일부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교사들과 그들의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어색한 마주침

지난해 여름, 언제 졸업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한 남자고등학교에 교육실습 신청서를 냈다. 이유야 간단했다. 새벽부터 불편한 정장을 차려 입고 나서기엔 집 근처 학교가 제일이었다. 물론 생판 모르는 학교보다는 졸업한 학교가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신청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저만치 학생들이 보였다. 군인들처럼 머리를 짧게 하고 있었다. 누군가 매 맞는 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어쩜 예전과 그리 똑같은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해가 바뀌자 학교는 거짓말처럼 달라져 있었다. 교생 첫날, 일명 ‘스포츠머리’를 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교실 뒤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보면서 머리 빗는 학생이 여럿 보였다. 어디 그 뿐이랴. 학교의 전통이라던 이른바 ‘떡매’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의 엉덩이를 떡을 치듯 때릴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떡매. 그 존재만으로도 학생들을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던 떡매가 이젠 학교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은 자유스러워보였다. 수업 시간이 다 돼 종이 울리고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가라고 호루라기를 불고 소리를 쳐도 학생들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재잘거렸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나사가 풀렸다며 성을 냈지만 학생들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 싫지만은 않았다.
교생은 ‘교육실습생’의 준말이다. 하지만 내게 교생은 교사도 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로 느껴졌다. 교사 앞에선 학생보다 더 학생 같이 있다가도 막상 학생 앞에선 교사인 마냥 있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내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색하기만 했던 교생이라는 자리가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교무실과 교실을 두루 둘러볼 수 있었고, 해서 학교라는 공간을 예전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반민주적인 너무나도 반민주적인

 

출처: realcsn.tistory.com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흔히 전통이 깃든 도시라고 불린다.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되레 고루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말하고 싶어서다. 변화에 둔감해서 그런지 옛것을 고집하는 문화가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데,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나온 학교는 시내 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혔다. 고교 평준화 지역이지만 학생들을 때려서라도 공부시켜 비평준화 지역만큼 소위 명문대에 보낸다는 것을 자랑이라고 들먹이는 데였다.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완고한 전통은 작년 가을 언론의 주목까지 받은 ‘떡매 사건’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 교사가 예전 방식 그대로 학생을 때린 것이 발단이었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시퍼렇게 멍들게 한 잔혹한 체벌은 더 이상 암암리에 용납되지 않았다. 이를 고발하는 인터넷 기사가 곧바로 떴고, 결국 교장까지 물갈이 될 정도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물리적인 체벌만 없어졌다 뿐이지 학생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교육이 아닌 훈육을 받고 있었다. 체벌의 유무를 떠나 학교를 배회하고 있는 유령은 권위주의와 위계질서였다. 학생들에게 정해진 일과 시간, 즉 등교·수업·청소·야간 자율학습 등의 시간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절대 명제였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교사의 제재가 뒤따랐다. 벌점제와 수행평가는 체벌을 대신하는 훌륭한 제재 수단이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교사의 지시에, 학교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권위주의로 포장된, 그래서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여겼던 학교의 위계질서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간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 짓눌려 있던 학생들은 더는 웅크리지 않았다. 나름의 일탈을 꿈꾸기 시작했다. 획일성이라는 잣대로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기에 여념이 없던 학교를 상대로 그들은 스스로의 욕구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것의 귀결점은 단 하나, 공부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었다.
거창한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핸드폰 게임하고, 수업 시간에 자고, 청소 시간에 놀고, 그리고 언제나 와글와글 시끌벅적하고,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내가 봐도 참 밋밋했다. 굳이 덧붙이자면 학교 안에서 빈번해진 학생들의 흡연 문제가 있지 싶다. 하지만 교권추락의 사례로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다른 학교들과 견줘보자면 전반적으로 얌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저리 가라 할 정도 규제가 엄격했던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인 변화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교사들은 그러한 균열에 근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교사와 학생이 날마다 대립하고 긴장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사실 교사와 학생이 뺏고 빼앗기는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 않는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이 학교에서도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정이라는 게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런 걸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던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학교의 위계질서였다. 교장을 정점으로 수직 체계계화 한 권력 질서는 정작 학교 구성원의 다수이자 흔히 학교의 주인이라 치켜세우는 학생들을 소외와 배제로 내몰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중세의 봉건 영지와 다를 바 없었고, 영주와 마찬가지로 교장만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학교는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보였고, 오직 반민주적인 깃발만이 펄럭여 보였다.

 

교사의 열정, 교사의 좌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부 교사들도 이러한 학교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사를 조롱하듯, 교사들은 교장을 조롱했다. 실제로 몇몇 교사들은 달라진 학교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가 20~30대로 젊거나 기간제 교사 ― 해가 갈수록 정교사 자리가 줄어듦에 따라 공립학교임에도 전체 교직원의 40% 정도가 기간제 교사였고, 젊은 교사들의 상당수는 기간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 일수록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협력하는 교사가 되길 원했다.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과 같은 시간엔 학생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열심이었고, 수업 시간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토론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학생을 마주할 때도 권위주의에 물든 과거의 모습과 달리 편히 대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타까운 건 이러한 노력들이 교사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지나 열정, 이런 걸로 말이다. 하지만 교사도 사람이다. 더구나 온갖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개인적인 의지와 열정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부장 교사는 교생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담임 10년 하면서 학생들한테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역시나 고고한 이상보다는 당면한 현실이 더 커다랗게 보이는 걸까.
어느 교사든 교직생활 초창기를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 같았다. 누구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에 대한 희망을 가슴 속 깊숙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말한다. ‘현실은 다르다고.’ 그리고 이런 말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고.’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부딪치는 가장 커다란 벽은 다름 아닌 이 나라 공교육 체계였다. 좋든 싫든 국가의 방침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가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교육과정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는 그야말로 공교육의 화신일 수밖에 없다. 교사의 딜레마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고, 공부 잘하는 애들 들러리 하기 싫다고, 지금 공부보다는 당장 돈 벌어야 한다고.’ 누군가의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어려운 게 또 있을까. 교사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집중이수제로 한 학기에 교과서 한 권을 다 봐야 할 정도로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교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교육’공무원이 아닌 교육‘공무원’으로 잡다한 교육행정 처리에 정작 자기수업 연구할 시간도 빠듯한 교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 체계에서 겉도는 학생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최소한 공감이라도 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다. 일단 학생들과 직접 대화부터 하는 거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밝은 빛뿐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과 대화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려는 교사에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교사 개인의 의지와 열정이 충만할 때야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러한 시간과 노력은 고스란히 자기 부담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한마디로 피곤하고 귀찮아지는 거다.
더군다나 미래가 보장된 정교사라면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교직생활 20년이면 노후가 보장되는 공무원연금에, 사실상 유급휴가인 방학마다 할 수 있는 재충전과 자기계발에, 그대로 안주하고픈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가뜩이나 교육 전반에 대한 교사의 재량권이 적은 마당에 꿈쩍도 하지 않는 공교육 체계는 더 거대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그 자리 그대로 순응한 교사는 더는 학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교사가 아닌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사로 전락하게 되는 거다. 이때 학교의 권력 질서가 안겨주는 권위주의는 외면할 수 없는 강렬하고 달콤한 유혹이지 않을까. 연차가 늘수록 편해지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학생들에게 그러한 교사는 단지 자신들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통제자일 뿐이다. 권위주의로 무장한 학교 질서의 재생산,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위계질서가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내가 겪은 학교에서 현재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희망이 아니었다. 날마다 옥죄는 학교의 통제와 흥미 잃은 수업의 반복에 학생들은 지쳐 있었다. 탈출구를 원하지만 기껏 한다는 게 일순간의 일탈뿐이었다. 공부와 성적으로 채워진 족쇄는 회색 벽돌로 구획된 교실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교사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의 화살을 직접 맞는 교사들 역시 지쳐 보였다. 그런데도 공교육의 요새로 군림하는 학교는 굳건히 서 있었다.
때문에 한 달 남짓 교생을 하면서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한 건 학교가 바뀌기 위해선 학교의 위계질서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차단하고 교류를 억제하는 지금의 학교 질서에서는 그 무엇도 새롭게 시작할 수 없어 보였다. 수십 년 묵은 권위주의의 낡은 때부터 벗겨내, 우선은 학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의 장부터 필요해 보였다.
이를 위해 학교 현장에서 당장 요구되는 것은 그 누가 됐든 자기의 불만과 요구를 말할 수 있고, 또한 이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일 것이다. 생소하고 어려울 건 없다. 초, 중, 고교 12년간 교과서에 반복해 등장하는 낱말이 바로 민주주의다. 저마다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를 배운 대로 가르친 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면 된다. 최소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이는 가능하다.
서로 다른 배경과 서로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이, 이 나라 정책에 의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된 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교 안팎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놓고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또한 때때로 서로 논쟁하고 서로 설득할수록,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 교육의 문제를 집단의 고민, 집단의 요구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민주적이어야 한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교생을 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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