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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문화][기고]파리꼬뮌, 잊혀진 혹은 지워진 기억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44
  • 수정일
    2011/06/27 15:46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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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파리코뮌 140주년이다. 이에 <사노위 정치적 해산자 선언 모임>의 김병효 활동가가 파리꼬뮌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파리 탐방기를 기고해 주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편집자주]

 

 

이제 막 여름 날씨가 시작되던 5월 중순, 파리코뮌 140주년을 맞아 파리를 찾았다.

밤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자정을 갓 넘길 무렵, 흐린 날씨 탓에 이륙 후 창밖으로 별빛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하바로프스크 상공에 이르자 비행기 창을 통해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여명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고위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백야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창 밖에는 12시간 비행 내내 새벽빛이 비추었고, 저 아래 광활한 툰드라가 끝없이 펼쳐졌다. 5월이지만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채, 원시의 자태를 비추는 동토의 땅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경치구경도 잠시, 비행 기간은 내내 자다 깨다의 반복이었다. 드디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할 무렵 시간은 시차 때문에 여전히 새벽녘이었고, 벌써 발걸음은 무거웠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숙소까지 이동해 짐을 풀고는 곧바로 첫 목적지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빵집. 일단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부터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빵집 점원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로 그 빵집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수도꼭지가 옛날 파리의 공용 상수도가 있던 곳이란다. 맞은편에 있는 구청사 앞 광장은 파리코뮌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집결했던 장소, 그리고 그 앞길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고가도로가 코뮌 최후의 격전지로서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끝까지 버티던 지역이었단다. 지금은 그저 파리 외곽의 조용한 고가도로일 뿐이지만.
파리 전역이 코뮌의 현장이었기에 도시 곳곳에 많은 흔적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또 막상 찾아보면 별다른 특이한 장소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 격전지도 코뮌과 관련된 아무런 안내나 표지도 없었다. 파리가 코뮌 이후 1977년까지 불온한 도시로서 100년 넘도록 시장조차 없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럴 만하다 싶기고 했다. 파리코뮌 당시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던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파리코뮌은 아마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지금도 진행형일 것이다. 그래서 파리코뮌과 관련된 역사를 가능하면 모조리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꼬뮌 기간에 희생된 부르주아지와 성직자를 기리기 위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런 착잡한 마음도 잠시, 다음 일정으로는 파리에서의 다음 목적지인 몽마르트로 향했다. 몽마르트는 화가들의 광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바로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몽마르트 가는 길에는 프랑스인 친구 한 명도 동행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서 몽마르트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성당(Le Sacré-Cœur)을 바라보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다. 몽마르트 가장 높은 곳에 3개의 돔 구조로 이루어진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에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언덕길을 힘든지도 모르고 올랐다.
그런데 성당 앞에 펼쳐진 잔디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함께 가던 프랑스 친구가 이 성당의 유래를 아냐고 물었다. 몽마르트가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니 당연히 파리코뮌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것 아니냐고 내 말에, 맞긴 맞는 말이란다. 파리코뮌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하여. 그런데 그 희생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파리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하지만 부르주아지의 폭격으로 몽마르트 언덕에 매장된 수많은 꼬뮤나르드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코뮌 기간에 희생된 일부 부르주아지들과 성직자들이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애초에 코뮤나르드들의 무덤 위에 놓인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순간 80년 광주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희생자가 폭도가 되고, 가해자가 되었던 역사. 가해자가 오히려 민중의 편이자 희생자 대우를 받던 역사가, 이곳 파리에서도 반복되었구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한 발걸음은 바로 거기서 멈췄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앉거나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대화를 나누는 이 언덕이, 그리고 저 아름다운 건물이, 학살을 감추고 오히려 왜곡하는 것이었다니, 더 이상 성당을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피해 화가들의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그것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비하면 오래되고 초라한 성당이지만,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가운데 하나인 생피에르 성당(Église Saint-Pierre de Montmartre)이다. 파리코뮌의 학살 이후에도 파리 시민들은 교회와 부르주아지들이 ‘코뮌의 범죄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의미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이를 무시하고 생피에르 성당에 다녔다고 한다. 코뮌의 후예들은 이처럼 괴멸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후에 화가들의 광장과 몽마르트 주변을 더 둘러보긴 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은 일찍부터 ‘펠라쉐즈 묘역’(Le Cimetière du Père-Lachaise)을 찾았다. 1871년 파리코뮌의 마지막 투사들이 처형된 ‘코뮌 용사들의 담장’(Mur des Fédérés)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찾은 펠라쉐즈는 고즈넉했다.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묘가 있다고 하는 서북쪽 출구를 통해 펠라쉐즈에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안쪽의 안내지도에는 전체 묘역의 대략적인 구분과 유명 인사들이 안장된 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쇼팽,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이사도라 덩컨 등 문화예술계의 거장들과 학자, 정치인, 그리고 잘 모르는 수많은 혁명가들……. 파리 최대 규모의 공원묘지이니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전날 미리 인터넷에서 위치는 확인해뒀지만, 안내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간혹 펠라쉐즈를 찾는 프랑스인,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이 이곳에 처형당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한 무리 관광객들은 짐 모리슨을 찾아왔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또 다른 무리 관광객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찾았다.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파리코뮌에 대해 하냐고 물었고,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했다. 간혹 파리코뮌 희생자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외벽을 따라가며 과거의 흔적을 더듬었다. 전체 2킬로미터가 넘는 외벽을 따라 묘비를 하나하나 확인해가기 시작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정문 안내소에서조차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얻은 팸플릿에도 수십 명의 유명 인사들의 묘역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파리코뮌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최후의 희생자들의 역사에 대해 부르주아 정부가 철저히 삭제한 느낌이었다. 마치 절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금기인 것처럼…….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묘역을 둘러보기로 했다. 묘역 곳곳에 거리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산 자들이 사는 것처럼 교회면 광장이며 설치해 둔 것이 이채로웠다. 크고 작은 묘비들이 제각각 망자들의 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이 호흡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파리코뮌의 희생자들은 집도, 이름도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일행들과 함께 두 시간 넘게 묘역을 헤맨 끝에 결국 반대편 출구를 향했다. 결국 묘역 탐사를 마치고 동쪽 출구로 빠져나오려는 순간,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출구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현지인에게 다시 물었다. 스페인 억양의 관리인은 우리가 방금 지나온 서쪽 외벽이 바로 마지막 희생자들이 처형된 곳이며, 처형된 이후 그대로 버려져서 따로 묘역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차피 명확한 표시는 없고, 대략 그 즈음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했다.
만약 다시 들어가 찾고자 했으면, 묘역 어딘가에 있을 ‘코뮌 용사들의 담장’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덩굴에 가려진 담장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던 여느 묘비 뒤편 어딘가에 초라하게나마 코뮌 용사들을 기억하는 흔적들이 넝쿨에 가려져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허망하고, 안타까웠다. 광주의 원혼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이여.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는 곳에…….
아마도 한 주만 늦게 이곳을 찾았더라면, 매년 5월 마지막 주에 있는 파리코뮌 희생자 기념행사 대열을 따라 쉽게 그 담장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에 한 차례 특별한 기념행사 때라야 겨우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안내지도 및 팸플릿에 명확하게 파리코뮌의 용사들의 자리를 표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펠라쉐즈 묘역 밖의 이주노동자 시위대아쉬움을 뒤로 하고 펠라쉐즈를 나서는 순간, 300여 명 가량 되는 이주노동자 시위 행렬과 마주쳤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를 찍으며 대열에 합류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시위에 참가하는 노동자 중 일부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대부분 식민지 출신의 불법 체류자인 이주노동자들이 얼굴을 찍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체류 보장과, 노동자로서의 동등한 대구를 요구하는 이들의 시위에서 펠라쉐즈에서 찾지 못한 코뮌 투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파리코뮌 만세!!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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