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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펌] 아이스케키

 

 

 

[의식의 흐릿] 아이스케키의 추억

2006.4.20. 목요일
딴지 문화생활부

  들어가며

'의식의 흐름'이란 게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큰 영향을 받은 이 용어는, 간단히 말해 개인의 의식이건 상념이건 기억이건 계속적으로 쫙쫙 흐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서술기법으로 많이 알려졌다.

'의식의 흐릿'이란 것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우습게 아는 이 용어는, 복잡하게 말해 창조적 구라와 아님말고식의 독설로 개인의 의식이건 상념이건 기억이건 계속적으로 흐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지에서만 사용되는 서술기법의 하나로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즉, 독자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교란함으로써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일탈적 사고를 훈련시키고, 급기야는 지적 유희와 포만감마저도 선사하기 위해 본지가 개발해낸 유니크한 서술기법이라 하겠다. 지난번 짬짜면을 소개했을 때부터 눈치빠른 독자라면 알 수 있듯이, 이 기법은 내용을 '믿거나말거나꼴리는대로임하소서'라는 무한 무책임을 생명으로 한다.

오늘 '의식의 흐릿'의 그물망에 걸려 든 주제는 바로 아이스케키.

그렇다고 요렇게 먹는 아이스케키냐고? 사람을 어떻게 보시나, 지금. 천만이다. 여기서 아이스케키라 함은,

소시적 고무줄 놀이에 열중하는 여아동 주변,
혹은 선생에게 일러바치는 걸 모범생으로 착각하던 여자 부반장 무리
그들을 염탐하다가
적절한 타이밍를 포착, 기습적으로 치마를 들추는..

남아동의 성장소설적 행위를 일컫는다.   
 

 왜 아이스케키라 부르는가?

윤복희 누님이 미국에서 귀국하며 국내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선보였던 1967년. 이 해 이후 국내 모든 남성들이 느닷없이 바람부는 날을 학수고대하기 시작했다. 그 왜 이런 말도 있잖은가? 바람부는 날이면 '수질좋은'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육교 밑에서 진을 치는 느끼남들이 본격적으로 양산된 해도 이 때부터다.

그러다가 소극적으로 관망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동층으로 중심으로 치마를 들춰보기 시작하는 탕아적인 놀이문화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은 대략 1970년대 중반이다.

80년대 초반설도 있지만, 치마 길이 무릎 위 10cm이면 경범죄 처벌함으로써 남성들의 낭심을 유린하는 반인권적 처사가 횡횡했던 박정희 시대 그때 이미 아이스케키가 유행했다 게 논리적인 정설이다.   

70년대 아동들의 치마 들추는 행위는, 치마길이에 대한 안타까운 동심이 행동화된 반(反) 박정희 항쟁의 개인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만, 늘 그랬듯이 거대담론의 역사는 이 개인적이고도 게릴라적인 항쟁을 기억치 못한다. 유감이다.

그럼 이쯤에서 본능적으로 드는 의문점 하나. 치마를 들추면서 남아동들이 보란듯이 외치던 사자후 한마디가 왜 하필 '아이스케키'일까 하는...  

도대체 치마 들추는 행위와 아이스케키 간에 무슨 유의적 상관관계가 있길래, 모범발음 아이스케익~도 아니고, 케키냔 거다. 차라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의미에서 "심봤다!"라고 외칠 수도 있었는데 대체 왜..

특정 대상이나 행위가 명명되는 현상의 기저에는 그 대상 혹은 행위를 향한 이데올로기가 녹아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예사스러운 게 하나도 없다. 착용치마끝단 순간상승을 도모하는 행위가 아이스케키라고 불리는 데에도 하여 분명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 의식이 흐릿해진다...
 

  노출에 의한 청량감 상승의 측면

치마를 들출 때 치마폭이 퍼덕거려 주변 대류현상이 왜곡되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기압차, 즉 바람 때문에 아이스케키 시전자는 시원함을 느끼고, 이 느낌은 빙과류를 먹을 때 느끼는 청량감과 유사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관점이다.

혹자는 치마가 급속하게 올려지면, 치마 속 기온분포가 달라지면서 역시 대류현상이 발생, 노출을 당하는 쪽이 더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속절없이 타의에 의해 무릎부터 시작해 허벅지를 거쳐 그 이상의 부위까지 백주대낮에 노출해야 하는 피(被)아이스케키자의 심정을 단 한번도 헤아리지 않은 낭설일 뿐이다

  대가성 향응 뇌물 지칭의 측면

평소에 흠모하던 여아동의 치마를 들추기를 또래의 친구에게 청부하면서 그 대가로 주로 아이스크림을 제공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따라서 청부를 받은 친구는 타겟의 치마를 들춰올리는 걸 임무 완료하는 순간, '이제서야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겠다!'는 순간적 환희를 경탄조로 토해냄으로써 그 기쁨을 주위에 과시했다고 한다. '아이스케키'라는 사자후 바로 다음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먹을 수 있다!"를 과감히 생략함을써 당시 아동들의 탁월한 언어 경제성을 엿볼 수 있다.  

  급속 안면 냉각의 측면

아이스케키를 당한 여아동이 수치감, 분노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그 얼굴형상을 빙과류의 차가움과 단단함에 빗댄 데서 연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가설은 치마를 들추는 행위가 사실은 치마 속을 훔쳐보겠노라는 남아의 명시적 혹은 함의적 성적욕구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중요한 단서로 많이 이용된다. 어째서.

여아동의 수치심 가득한 얼굴에서 일종의 우월감 혹은 승리감을 만끽하려는 남아 특유의 짖굿음 혹은 그것을 넘어 지배욕의 소산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마 속 신비주의 잉태의 측면

그 옛날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 때 스멀스멀 올라오는 드라이아이스의 CO2, 그 스모크성 연기는 모종의 신비감과 더불어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신비감과 두근거림은 사모하는 여아의 치마 속은 어떨까 하는 신비감 내지는 기대감과 유사하다는 데서 아이스케키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고 보는 특면이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후의 나이대에 맞는 단선적 성적 판타지가 효과적으로 투영됐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관점이라 하겠다.

  발음에 의한 쾌감 유도 측면

음성학적으로 볼 때, 연구개 즉 목구멍에 가까운 입천장을 강하게 폐쇄한 상태에서 발음하는 게 /ㅋ/이다. 이 /ㅋ/은 모음과 만나 강력한 파열음이 되는데, 이를 연쇄적으로 발음해줌으로써 수반되는 일종의 호쾌하고도 뭔가 한탕했다는 느낌을 얻고자 이 명칭을 사용했다고 보는 측면.

즉 치마를 들추는 행위에서 오는 1차적 쾌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유효적절한 효과음으로 "케익" 대신 "케키"라는 어휘를 선택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부차적 쾌락을 추구했다는 아주 논리정연한 유추가 가능하다.
 

   아이스케키를 하는 이유에 대해

아이스케키는 사실 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숭악스럽고, 범죄라고 보기에는 너무 순진무구하다. 아이스케키 피해자가 어른이 되어 동창회에서 가해자를 만난 걸 계기로, 명백한 성범죄라며 법정공방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그 때를 회상하며 아름다운 시절이었노라며 노스탤지어의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참, 거시기한 성질을 지녔던 게 아이스케키다.

여기서 아이스케키와 관련해서 드는 두 번째 의문.

그럼 왜 남아동들은 좀 건전하게 놀지 않구선 허구한 날 호시탐탐 아이스케키를 하며 놀았나?

이 또한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겠다. 다시, 의식이 흐릿해 진다..
 

   치마착용에 기인한 자연발생론

아이스케키라는 남아동의 가학적 놀이문화가 이 땅에 퍼질 수 있었던 건, 여아동들이 나팔바지가 아니라 몸빼이가 아니라 그냥 치마를 입어줬기 때문이라는 아주 단순한 논리다.  

치마는 여성의 노출욕과 남성의 관음증이 상보적 긴장을 일으키게끔 만드는 의복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도 남성의 관음증이 우세할 때 양상이 달라진다. 남성들은 대개 '바람'이라는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손'이라는 확실성을 택하는 경향을 띄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이스케키는 이러한 역학의 산물이며 아이들 수준에서 갖는 성적 유희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또래에 대한 우월감 과시론

아동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여아의 치마 속을 봤다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또래의 친구들보다 좀 더 어른에 가까워졌다고 느끼게 해주는 속성을 지니는데, 이런 함의가 또래 집단 내 우월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치마를 들추는 행위의 강력한 동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반친구들에게 봤다고 우기기 위해 과장술이나 기만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일취월장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일취월장한 나머지, 빤스의 색깔, 무늬, 사이즈는 물론 질감이나 습도, 심지어는 고무줄의 탄력도까지 상세하게 묘사해내는 놀라운 쌩구라도 선보이게 된다.

   괘심죄에 의한 집단 응징론

평소 반에서 꼴보기 싫던 여아를 골탕먹일 목적으로 또래 친구들과 사전모의, 끈끈한 팀플레이에 의해 아이스케키가 감행되는 측면도 놓치면 안된다.

피해자의 학부형이 다음날 반드시 찾아와 되려 가공할 죄책감, 가령 무기정학 심지어 퇴학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이스케키 중독자 중에는 이러한 강한 체벌에도 불구하고 다른 타켓을 물색하느라 허구한날 눈알을 희번덕거려 눈알분열증까지 발병하는, 개인적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연모를 은폐하기 위한 반사적 행위론

괘심죄에 의한 응징론의 대척점에 있는 이론으로서, 마음에 드는 여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시도하지만 그 연모의 마음은 들키지 않기 위해 아이스케키를 한다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남심에 우리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며 정신적 성숙과 성적 욕구가 혼란스럽게 결합하면서, 치마 들추기 행위는 '여선생님 뒤에서 거울 내려 치마 속 반사시키기'로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매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서 남아동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단련되고 제련된다.
 

  맺으면서

아이스케키는 유년기적 남성 로망이 가학적 찝쩍거림의 형태로 표출된 아방가르드적 커뮤니케이션이며, 또한 아이스케키는, 가해자에겐 성적 호기심의 돌파 수단으로 피해자에겐 돌이킬 수 없는 쪽팔림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다면적 행동양식이다.

게다가 아이스케키는, 남성 특유의 폭로적 경향성이 여성 특유의 내향적 감수성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생, 간혹 뜻하지 않게 여아동이 울음을 터뜨림으로서 순식간에 남아동의 자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스케키는, 같은 방식으로 보복이 들어오는 똥침놓기와 달리, 여성의 입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응징을 가할 수 없다는 데에, 이 놀이의 태생적 불평등이 발생한다.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가해자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어떤 주장을 이 놀이로 인해 6.9%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이 유희가 없어질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왜일까?

화장기 있는 얼굴 본 기억이 오래된 마누라의 치마를 들춰봤자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이스케키는 시간의 침식을 받는 추억 속의 유희임이 분명하다.

어른이 되어서는 결코 할 수 없고... 또 한다한들 두근거림도 사라져 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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