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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음반은 나의 둘도 없는 보물"

LP음반은 나의 둘도 없는 보물"
남인수·박재홍 ·손인호 ·백년설, LP 마니아 경남 마산시 정성열씨
텍스트만보기   김연옥(redalert) 기자   
▲ 수집해놓은 음반 앞에 앉아있는 정성열씨
어쩌면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미치듯 푹 빠져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회적 지위나 부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 같다. 그렇다고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이나 마약의 늪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지난달 28일에 만난 LP 마니아 정성열(36·경남 마산시 합성동)씨. 그는 마주 보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입가에 웃음을 머금다가도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면 금세 잔뜩 긴장한 굳은 얼굴이 되고 만다. 그런 평범한 그에게도 아침마다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버릇이 하나 있다.

평소 KBS 가요무대에서 좋아하는 남인수를 비롯한 몇몇 가수들의 추모 특집 방송이 나오면 녹화를 해 두는데, 아침마다 그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그들의 생생한 무대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거다. 방 넓이에 어울리지 않게 큼직한 29인치 TV가 놓여 있어 의아하게 여겼던 내 궁금증도 그 설명으로 시원하게 풀렸다. 사실 흘러간 가요에 대한 그의 애정만큼은 좀 유별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손때 묻은 LP는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감동을 준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LP음반 수는 2800장 남짓. 모두 남인수, 박재홍, 손인호, 백년설의 음반 등 흘러간 가요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남인수 음반의 경우 남인수 노래만 있는 독집 음반을 포함하여 대략 80장이 된다고 한다. 그는 남강수 등 남인수 모창 가수가 부른 것도 마다하지 않고 모았다. 이른바 레코드 재킷에 남인수의 얼굴이 나와 있으면 무조건 모은다는 말이다.

▲ 그가 소장하고 있는 남인수 음반.
ⓒ 김연옥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명단에 남인수의 이름이 포함된 일을 거론하자 그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너무 마음 아프다. 그렇지만 그의 구성진 목소리에 왠지 마음이 끌린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가 우리의 전통 가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그 당시 MBC 라디오 프로 '세월따라 노래따라'를 종종 들으면서 전통 가요의 구수한 가락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던 그가 남해수산고등학교(경남 남해군) 3학년이던 1988년에 참치 잡는 원양어선을 타고 14개월간 멀리 태평양으로 현장 실습을 가게 되었다. 그때 모은 돈으로 꿈에도 그리던 소형 전축을 사게 되면서 LP 3장도 같이 샀는데, 그것이 그가 LP 수집을 하게 된 첫걸음인 셈이다.

전통 가요에 쏟는 그의 애정에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술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배여 있는 듯하다.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살던 어린 시절 미장공이면서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가 장이 서던 날 조그마한 전축과 LP 몇 장을 사 가지고 왔던 일이며, 술이 들어가면 늘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를 흥얼거렸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김주열 열사의 추모곡 '남원땅에 잠들었네'가 실려 있는 손인호의 음반.
ⓒ 김연옥
그는 박재홍의 음반은 30장, 손인호의 음반은 20장 정도 소장하고 있는데, 김주열 열사 추모곡인 손인호의 '남원땅에 잠들었네'가 실린 음반을 내게 보여 주었다. 1960년 마산상고에 입학하여 그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일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지 않았던가.

정성열씨는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LP를 수집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음반은 '내 진정 몰랐구나'라는 노래가 실려 있는 <남인수 신가요걸작집>이다. 마산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정든 고향과 다름없다는 그는 반야월 작사에 고봉산이 작곡하고 노래한 '내 고향 마산항'이 담긴 음반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오랫동안 운수업에 종사한 그는 "운전하면서 핸들을 돌릴 때 마치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느낌이 들만큼 LP에 빠졌죠. 구하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잠이 도통 오지 않았고. 그럴 때면 한달음에 영록서점(마산시 석전2동)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부산과 대구 벼룩시장에도 갔어요. 그곳에서 못 구하면 서울 청계천 상가에도 가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LP음반들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과 같다고 한다. 또한 우리 전통 가요의 맥을 잇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도 그는 가지고 있다. 손때가 묻은 LP로 듣는 노래는 단순히 귀로 듣고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는 말에서 한 장의 LP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그의 순박함이 내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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