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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생식기에 대한 또 다른 ‘킨제이 보고서’

잡기장에 쓰기에는 너무 정치적인 글

 

 

여성 생식기에 대한 또 다른 ‘킨제이 보고서’


브이(V) 이야기/캐서린 블랙레지

여성은 자신 ‘몸의 일부’이면서도 한번도 스스로 그 이름을 자신있게 불러보지 못한 곳이 있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외설스럽다고 터부시돼 온 곳. 바로 생식기, ‘보지’다.

이브 엔슬러 원작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우리에게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것도 우리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며 여성성을 당당하게 자각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기는 왜 오랫동안 터부시돼 왔을까?

의학 저널리스트 캐서린 블랙레지의 <브이(V) 이야기>(눈과마음·2004)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여성 생식기의 ‘오해와 편견의 역사’부터 그 해부학과 생리학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그야말로 ‘질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책 제목의 ‘브이’는 당연히 여성의 생식기를 뜻하는 버자이너(vagina)를 의미하는데, 원래 버자이너는 ‘칼을 넣어두던 칼집’을 의미했다고 한다. 여성의 생식기가 마치 칼집처럼 남성 생식기를 감쌀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캐서린 블랙레지에 따르면, 여성 생식기가 처음부터 모든 문화권에서 터부시돼 온 것은 아니었다. 뉴멕시코나 하와이, 혹은 선사시대의 기록을 들춰보면, 여성의 생식기는 풍요의 상징으로, 때론 악마를 물리치는 수단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여자의 음부를 보여주면 바다가 고요해진다’는 카탈로니아 지방의 격언도 그 단적인 예가 되리라.

실로 충격적인 것은 여성 생식기를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여성 생식기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왔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도 전립선이 있는지’, ‘있다면 그 기능은 무엇인지’, ‘과연 클리토리스는 페니스의 잔여물인지’, 아직까지 온갖 논쟁과 근거 없는 학설만이 난무할 뿐, 진지하게 연구하는 과학자를 찾기조차 힘든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과학적인 사실 하나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여성의 질은 결코 남성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기관이 아니며, 오히려 생식에 있어 정교한 ‘선택과 조절’을 담당하는 능동적인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의 생식기는 질 내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정자를 저장하기도 하고 때론 파괴하기도 하면서 자신과 유전적으로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정자를 찾아낸다. 가장 빠른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고 질은 단지 정자에게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이 정자를 골라서 난자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능동적인 기관인 질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여전히 논쟁적인 이유는 그것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대부분이 버자이너 대신 페니스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과학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또 한 번 펀치를 날린다.

성적인 즐거움이 비롯되고, 인류의 생명이 창조되는 곳. 바로 ‘질’에 대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금기시하고 무지로 일관해 왔다는 사실에 많이 부끄러워진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처럼 설령 다리가 부러지는 해프닝이 있더라도, 내 성기를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공부해 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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