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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호성컬럼] 오마이뉴스의 ‘맥아더 죽이기’

심층적인 재미있는 글... 요즘도 계속 딴나라당원 박사모 하는지...

 

[곽호성컬럼] 오마이뉴스의 ‘맥아더 죽이기’
입력 :2005-09-15 10:42   곽호성 시사평론가 
지난 11일 오마이뉴스는 ‘맥아더, 한국에서만 신이 된 사나이’ 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어 맥아더를 공격했다. 이 글은 고지훈 서울대 강사가 쓴 글인데 필자는 이 글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우선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결국 맥아더 장군은 과대평가되어 있는 하찮은 인물이란 주장으로 정리된다. 이 글은 맥아더 주변 인사들의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맥아더의 필리핀 전선에서의 실패와 한국전 초기 상황에서의 오판을 소개한다. 또한 뒤이어 맥아더의 38선 돌파요구를 소개하며 맥아더를 극우 전쟁광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맥아더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과감히 깨버린 고지훈씨는 맥아더를 ‘정신병자’로 치부하고 맥아더가 성적으로 가학적 취미를 갖고 있었으며 부패했고,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대단한 일로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일이 아니며 결국 맥아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은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군사적 모험주의자의 대표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대단한 일이 아니었나

고 씨의 주장 가운데 우선 중요한 것부터 생각하고 넘어가자. 먼저 고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인천은 상륙작전 대상지로 미리 선정되어 있었으며 북한 또한 상륙작전 예상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평가다.

잠깐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만일 필자가 여기에 대해 반론을 하면서 애초에 거의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강행해 성공시켰다고 설명을 하면 역시 고 씨 주변의 진보진영에서는 맥아더가 그만큼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느냐고 재반론을 해올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해 이야기하면 물론 인천에 상륙한다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그 문제점을 십분 고려해 그 난점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 강사의 말대로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작전은 아니었다. 단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작전은 아닌 셈이다.

이제 육군사관학교 전사학 교수 정토웅 씨가 쓴 ‘20세기 결전 30장면’에 나오는 인천상륙작전 부분을 참고해 보기로 하자. 정토웅 씨는 군 출신이며 육사 전사학 교수이므로 고 강사 못지 않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배경

정토웅 씨의 저술에 따르면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구상한 것은 그가 한국전쟁 발발 4일 후인 6월 29일 전선시찰 때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1개 사단으로 수원 근처에서 적을 막고, 1개 사단으로 인천에 상륙해 적 배후를 강타함으로서 적을 격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정토웅 씨는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여러 차례 상륙작전으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그는 적 보급선을 차단시키고 승리를 거두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늘 상륙작전을 선호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편 동경에 돌아온 맥아더는 참모들에게 특별히 합동전략기획작전단을 구성,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그 후 7월 10일 블루하트 작전계획이 작성되었는데 이 계획의 골자는 7월 23일 미 제 1기병사단과 1개 해병연대를 인천에 상륙, 서울로 진격시켜 적의 배후를 차단하는 동시에 미 제24사단은 수원에서 적의 진격을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무산되었다.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7월 23일 합동전략기획작전단은 새로이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상륙지점을 인천-군산-주문진 가운데 하나로 한다는 것으로 최종결정은 추후에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상륙작전 계획은 또 다시 난항을 겪었다. 북한군의 무서운 힘으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상륙작전용으로 생각한 미 제2사단 마저도 지상작전에 투입하도록 조치했다. 그 대신 상륙부대는 일본에 마지막 예비대로 남은 제 7사단을 완전편성상태로 증강시킨 다음 그 사단을 투입하도록 계획을 수정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이면

정토웅 씨는 저서에서 ‘맥아더가 상륙작전을 구상했지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기까지에는 유엔군 총사령부, 워싱턴 미 합참, 또한 양쪽을 대표하는 대표단 간 대논쟁을 겪었다’고 적고 있다.

인천은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는 교범에 나타난 금기사항으로 가득 찬 곳이다. 우선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 수행 시각이 너무 제한되었다. 상륙하기에 충분할 만큼 간만의 차가 크지 않은 날은 9월달에는 15일부터 3일 뿐이며, 이때를 놓치면 다음달 11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밀물이 꽉 들어차는 것은 하루 두 번인데 9월 15일 만조시각은 06시 59분과 17시 59분이었다. 그리고 상륙용 주정을 해안에 접근시키기 위해서는 물깊이가 최소 7.6미터는 되어야 하나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아침-저녁 3시간 뿐이었다고 한다. 이는 1차상륙 후 2차 상륙을 위해서는 무려 10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로 인천 외항은 대규모 상륙부대의 수송선단과 화력지원을 위한 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접근로인 비어수로가 협소하고 굴곡이 심해 함대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 제약이 많았다. 인천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막고 있는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결국 상륙은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2단계를 거쳐야 했다. 또한 인천부두시설은 하루 하역 가능 물량이 1만 1천톤에 불과할 정도 밖의 능력뿐이었다.

세 번째는 상륙해안이 4-5미터의 해벽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이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사닥다리, 쇠갈고리, 그물 등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그 후 육지에 오르게 되면 시가지 건물을 방벽으로 삼는 적과 교전해야 하므로 매우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거센 반대의 목소리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맥아더의 상륙작전에 반대했다. 또한 해군과 해병대도 반대했다. 그러나 정토웅 씨는 이런 미 합참이 ‘맥아더의 위광과 집요한 요구’에 밀려 한국에 미 해병대 파병을 선택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상륙지점을 인천으로 하는데 있어서는 미 합참과 해군-해병대가 모두 반대했다. 한편 7월 20일 미 합참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을 동경에 파견해 상륙작전계획을 검토하도록 했다. 동경에서 그들은 유엔군 내 해군 및 해병대측의 지지를 업고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보다 안전한 군산에 상륙할 것을 종용했다.

이런 거센 반발의 목소리 속에서 맥아더 장군은 23일 회의에서 45분에 걸쳐 왜 인천상륙작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해 더 할 나위없는 능변으로 요점을 짚어 나갔다.

1. 가장 불리한 지점이 인천이란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즉 적도 설마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 허점을 찔러야 한다는 것

2. 인천을 냉정히 보면 북한군의 배치가 허술하고, 전략예비대가 없었던 상태로 유엔군 해-공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상륙작전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3. 상륙 후 신속히 서울을 탈환함으로서 얻는 심리적 효과와 함께 적 병참선을 단절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북한군 병참선의 단절은 곧 낙동강 전선에서의 북한군 전력의 엄청난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낙동강 전선을 포기하고 북으로 퇴각하는 북한군 주력을 격멸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한국 농민으로 하여금 온전한 추수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한국 국민들이 적 치하에서 오래 있게 되면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 것이며, 전쟁이 장기화하면 국제여론과 동맹국 지지가 시들해 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신속한 상륙전은 이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군산’ 대안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1. 군산상륙으로는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없다는 점
2. 이는 곧 장기전으로 가게 된다는 점

이번 논의 이후 많은 이들이 맥아더 장군의 주장을 따르게 되었으나 반대파들이 그들의 주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해군과 해병대는 군산 대신 평택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합참본부 역시 맥아더 장군에게 다른 대안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버텼다.

결국 국방장관 존슨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강력히 지지한데 힘 입어 맥아더는 미 대통령의 상륙작전 승인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인천상륙작전의 진행과정

상륙에 앞서 유엔군은 엄청난 공중폭격 및 함포사격으로 인천 일대의 북한군을 섬멸했다. 9월 15일 새벽 상륙군은 월미도를 습격해 점령하고 유엔 공군과 해군은 다시 한번 인천 일대의 적들을 쓸어 버렸다.

이후 오후 5시 32분부터 미 상륙군이 상륙을 시작해 새벽 1시 30분 경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맥아더가 예상했던 대로 인천의 북한군은 매우 허술했다. 북한군 포로의 진술에 따르면 적은 인천에 불과 2천 여명의 수비대를 배치했다.

여기에다 15일 새벽 약간의 병력이 증원될 예정이었으나 유엔군 상륙과 폭격에 눌려 서울로 퇴각했다. 이는 북한군이 인천상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이후 상륙군은 2만명의 북한군과 서울 지역에서 교전을 벌여 승리하고 서울을 탈환한다.

낙동간 전선은 인천상륙작전의 영향을 받아 한국군과 유엔군의 우세상황으로 변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총반격을 펼쳐 북한군을 궁지로 몰았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불과 15일만에 10만여명의 병력손실을 안겨 준 대 섬멸전이었다. 정토웅 씨는 북으로 도주한 북한군 병력은 채 3만 명을 넘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정토웅 씨는 맥아더와 유엔군의 공적 못지 않게 한국군의 공적 역시 대단했다고 쓰고 있다. 한국 해군은 상륙 전 특수부대를 인천 주변 지역에 침투시켜 중요한 정보를 얻어냈고, 한국 해병대는 인천 시가 소탕작전을 맡아 적의 게릴라전 움직임을 원천봉쇄했다. 뿐만 아니라 상륙작전에 참여한 한국군 카투사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정토웅 씨는 인천상륙작전 계획에는 특별한 개념이 도입된 것이 아니고 맥아더 장군이 전쟁사에서 배운 전통적 작전개념인 망치와 모루의 원리를 적절하게 적용시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낙동강에서부터 정면공격을 통해 반격을 시도하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따르므로 인천지역에 상륙해 모루를 만들고 낙동강에서부터 망치를 휘둘러 그 안의 적을 모두 섬멸한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뒷 이야기

한편 이런 뛰어난 작전개념이 있어도 우수한 팀워크가 없이는 작전이 성공될 수 없는 법이다. 국군과 유엔군, 미 제10군단과 제8군, 그리고 육해공, 해병대 사이에 상륙작전 결정 전에는 많은 논쟁과 마찰이 있었지만 일단 결정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상호협력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또한 정토웅 씨는 글을 맺으며 다시 한번 맥아더 장군을 칭찬하고 있다. 워싱턴으로부터 작전을 변경시키기 위한 압력이 지속되고 반대파들의 집요한 저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일을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쓰고 있다.

맥아더 후임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평가하기를 ‘그것은 맥아더 원수의 대담한 착상, 능숙한 계획수립, 그리고 작전 수행상의 용기 및 저돌성으로서 전쟁사에서 괄목할만한 위치를 점한다’라고 했다.

맥아더 장군 비판 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고지훈 씨는 맥아더 장군의 북진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맥아더는 극우 침략주의자였고 그의 집요한 38선 돌파요구에 미국이 마지못해 굴복했다는 주장 등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있었던 청천강 전투를 설명하고 있는 정토웅 씨의 기술을 살펴보자.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38선 돌파 문제에 대해 검토했다. 즉, 전황이 호전되어 38선 이남을 회복하게 되면 이어서 이북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는 찬반논쟁이 뒤따랐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찬성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침공한 적을 완전히 섬멸해 재침 가능성을 제거하고 나아가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다음 유엔감시 하에 한국의 항구적 통일을 이룬다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리고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후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1. 유엔군은 한반도 내에 소련과 중공군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만 북진할 수 있고 여하한 경우에도 한·만국경이나 소련과의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다. 만일 북진 중에 소련군이나 중공군이 공개 또는 비공개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경우 유엔군은 반드시 수세를 취하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2. 국경 근처에서는 한국군만을 투입하고 북한군 저항종식 이후 무장해제 및 항복조건의 수락은 국군이 그 임무를 담당하며 잔적소탕 작전에 유엔군 투입을 최소화한다.

3. 북한지역에서의 군사작전 중 한국정부에 의한 주권행사는 공식적으로 인정해서는 안되며, 이 문제는 유엔의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

한편 10월 7일 유엔결의 이후 38선을 횡단하기 시작한 미 제8군은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그 달 마지막 주에는 청천강에 도달했다. 한편 유엔군의 북진에 대해 중국은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10월 3일 중국의 주은래는 인도대사 파니카를 불러 유엔군의 진격은 중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한국군은 38선을 이미 넘어섰으나 유엔군은 명령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외교적 경로를 통해 주은래의 경고를 전달받은 워싱턴은 미 합참의장이 맥아더에게 도리어 ‘당신 통제하의 병력으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며 중국군과 교전할 수 있다는 권한을 부여했다. 파니카의 전달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설령 믿더라도 주은래의 발언을 상투적인 외교적 엄포로 미국 정부가 취급했다고 정토웅 씨는 적고 있다.

맥아더의 오판과 몰락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오판을 했으며 뒤이어 벌어진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사실상 실각하게 된다. 고 강사의 글에는 맥아더가 군기와 보안규정을 어겼고 과도한 잔인함을 보여 해임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정토웅 씨의 글에는 이런 내용은 없다.

우선 맥아더는 30만의 중국군이 북한에 잠입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미8군과 10군단을 분리시키는 실수를 했으며 한·만 국경지역에서 적정을 살피지 않고 무리한 작전을 벌인 점, 청천강 전투패배 이후 전의를 잃고 성급한 철수에 급급했던 점은 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이후에도 맥아더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트루먼 대통령의 불신임을 받아 이듬해 4월 불명예스런 소환을 당하고 말았다고 정토웅 씨는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필자는 맥아더 장군의 태평양 전쟁당시 행적은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토웅 씨의 주장만 놓고 보면 맥아더 장군이 고지훈 씨의 평가만큼 무능했던 인물은 아닌 듯 싶다. 그리고 고 씨의 주장만큼 무능한 인물을 미군이 원수까지 진급시킬 정도였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꼭 계급과 능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그 어려운 전쟁시기에 미국이 무능한 인물을 전쟁의 중책을 맡길 만큼 어리석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시사평론가 곽호성씨 
또한 필자는 맥아더 장군의 만주 핵공격 발언 문제에 대해서도 조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성적 취미나 부패의혹, 부하들에 대한 몰인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조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앞서 인천상륙작전 등에 대한 고 씨의 저술로 보아 고 씨 한 명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고 씨의 주장은 근거도 부족할 뿐더러 일견 너무 편파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맥아더 장군 비판 글을 쓴 고지훈 서울대 강사에게 위 정토웅 씨의 맥아더 평가에 대한 재반론을 부탁드린다. 그리고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은 고 강사의 맥아더 장군의 비판 글 의도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의도도 섞여 있었으며 나아가 한국 보수사회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는지 의심된다.

고 씨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보수인들은 하찮은 맥아더 신화에 놀아난 사람에 불과하며 이승만 대통령 역시 맥아더와 같은 ‘하찮은’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고 씨의 글을 보면 중국은 단순히 ‘극우 침략자’ 맥아더에 맞서 ‘자위적’으로 참전했으므로 중국의 한국전 책임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식으로 느껴진다. 이 문제에 대한 고지훈 씨의 의견을 들었으면 한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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