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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산엔 '게릴라전'이 한창

 

 

10월 산엔 '게릴라전'이 한창
[떠나요! 우리땅 우리바다] 까탈이의 추억여행2
텍스트만보기   김남희(freesoul) 기자   
▲ 곰배령의 단풍은 화려한 치장이 아니라 은근한 수줍음으로 찾아온다.
ⓒ2005 김남희
10월 산은 게릴라전이다. 척후병처럼 기척도 없이 내려와 순식간에 온 산을, 산 아래 마을을, 한반도 남단을 죄 접수해버린다. 소리도 없는 일제공격에 결박당해 발만 동동 구르다 주저앉기 십상이다.

10월 산은 속도전이다. 치고 들어왔나 싶었더니 어느새 다 빠져나갔고, 가득 찼나 싶었더니 텅 비어 있다. 손 쓸 틈도 없이 무장해제 당해 두 손 번쩍 들고 엎드리기 십상이다.

10월 산은 위험하다. 10월 산에 들면 일상으로 돌아가 적응하기 어렵다. 바람 든 심장의 두근거림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10월에는 함부로 길을 나서지 않는 법이다.

▲ 맑은 가을 햇살 아래 나도 몸을 말려 잘 마른 빨래처럼 보송보송해지고 싶다.
ⓒ2005 김남희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의 가을은 빠르고 깊다.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어느새 중턱이다. 이곳에 내려온 지 이제 보름 남짓. 부러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어딘가에 짐을 부려놓고 정착민으로 두어 달 살고 싶었는데 서울은 아니었다. 내게 서울은 점점 낯선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낯설음에 불편함까지 더해져 겹으로 난감했다.

가까운 이로부터 이곳을 소개받은 후 나는 준비 없이 내려와 일주일을 머물렀다. 좋았다. 맵고 맑은 공기가, 망설임 없는 바람이, 하늘과 잇닿은 산이, 그 산 아래 깃든 사람의 마을이 좋았다. 눈을 두는 곳 어디에나 나무가 있고, 산이 있었다. 나무는 내가 지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고, 산은 몸을 두는 곳과 상관없이 늘 내 마음이 가 있는 곳이었다. 몸과 마음이 살아나던 시간이었다.

그 충만함을 잊지 못해 제대로 짐을 꾸려 다시 내려왔다. 나는 끝을 보고 싶었다. 치고 내려오는 가을산을 마중하고, 단풍의 눈을, 단풍의 속도를, 단풍의 성질을 낱낱이 지켜본 후, 마침내 잎 다 지고 허허롭게 선 늦가을산까지 마주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무를, 숲을, 산을, 제대로 한 번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여름 꽃 이미 다 진 자리에 저 홀로 남은 둥근이질풀 한 송이
ⓒ2005 김남희
진동리의 아침은 느리게 찾아온다. 산을 넘느라 기진한 해는 맵찬 아침 공기 속에 이미 녹녹해진 햇살을 풀어놓는다. 내가 머무는 집에서 강선리까지 이어지는 3킬로미터는 매일 아침 산책길이다. 40분을 걸어 올라가는 길. 삼거리를 지나 곰배령 가는 길로 들어서면 길은 조붓해지고 숲은 울창해진다. 물소리는 귓전을 울리며 길게 차오른다. 그 길에 가을이 깊다. 단풍이 들었다.

단풍은 엽록소가 빠지면서 잎들이 제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단풍 물 든다'가 아니라 '물 빠진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배웠다. 온 산의 나무들, 그 잎들이 물 빠지고 있다. 제 색을 찾아가고 있다. 허황했던 치장을 벗고 맨 얼굴로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산을 이루는 것들의 그 월동준비가 나는 눈물겹다. 그래서 이 길에서 내 발걸음은 늘 느리다.

▲ 곰배령 오르는 길에 이년 째 집만 짓고 있는 사나이가 있다. 그 사나이는 지나는 이를 붙잡아 제 집 벽이 될 판자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렇게 붙잡혀 나도 한 줄 써놓고 돌아섰다.
ⓒ2005 김남희
느리게 느리게 걷는 길. 산의 길은 다 다르다. 오르는 길이 다르고, 내려오는 길이 다르고, 멈춰 서서 바라보는 길이 또 다르다. 첫 햇살 받는 아침길이 다르고, 지는 해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저녁길이 다르다. 혼자 걷는 길이 다르고, 좋은 이의 발치에 두세 걸음쯤 떨어져 따라 걷는 길이 다르다. 맑고 밝은 기분으로 걷는 길이 다르고, 고요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걷는 길이 다르다. 첫 잎 틔우는 봄길이 다르고, 초록이 지쳐가는 여름길이 다르고,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길이 다르고, 눈 쌓인 겨울길이 다르다. 길은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다.

▲ 꽃 지고, 잎도 다 지고, 오직 열매로 남아 새싹 틔울 봄을 기다린다.
ⓒ2005 김남희
날마다 새로운 길을 걸어 조금씩 익숙해지는 얼굴을 찾아 간다. 곰배령 입구에는 젊은 부부가 산다. 나는 날마다 핑계거리를 만들어 그 집으로 간다. 가서, 둘이 함께 채워가는 공간과 시간을 들여다보며, 둘의 꿈을 기웃거린다. 그 둘의 사는 모습이 하도 어여뻐 내 마음도 덩달아 달아오르곤 한다.

그래서 나도 꿈을 꾼다. 은밀한 꿈 하나. 어느 물 맑고 산 깊은 골짜기를 지나다 더벅머리 총각 혼자 사는 소박한 집 한 채를 찾아내면, 스윽 문을 열고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고 그냥 살아버리고 싶다는 꿈. 아무렇지 않게 부엌으로 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토닥토닥 파를 썰고 두부를 베어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 나뭇짐을 지고 돌아온 그이와 마주앉아 저녁밥을 나누고, 몸도 나누고, 남은 삶도 나누며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는 꿈. 그래서 산길을 걸을 때면 늘 남의 집을 기웃거리게 된다.

▲ 엽록소가 빠져 제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 단풍이다.
ⓒ2005 김남희
젊은 부부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삼형제 고개가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고개라 이름 붙일 만큼 가파른 길은 없다. 같이 걷는 이가 "여기가 첫째 고개, 이게 둘째 고개, 마지막 고개야" 하고 일러주어야 겨우 고개였음을 알 수 있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여기다 고개라는 이름을 붙였겠어. 한 겨울에 눈은 한 자가 쌓였는데, 지게라도 지고 이 길을 넘으려면 요만큼의 오르막도 높은 고개처럼 버거웠던 거지."

바라보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바라보는 건 어디까지나 낭만이고,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관찰의 시선일 뿐이지만, 산다는 것은 치열한 현실이자, 존재하는 대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참여의 움직임이다. 나는 여전히 산을 낭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직 산의 덕성에 기대어 살 자격이 없다.

▲ 자연이 그려놓은 가을 풍경화 한 점
ⓒ2005 김남희
산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어찌 모르는 것이 산에 관한 것뿐일까!). 거기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알지 못하고, 나무의 이름과 성질도 모르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산에 관한 한 나는 여전히 일자무식쟁이다. 그런 무식함이 부끄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한 내게는 늘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셈이니까. 산이, 산을 아는 사람이, 내게 줄 것들이 여전히 많으니까.

자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어수룩하고, 서투르고, 구멍투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오면 가르쳐줄 게 많다. 산도, 나무도, 풀도, 꽃도, 내게는 스승 아닌 것이 없다. 나의 서투름과, 나의 틈과, 나의 아무것도 모름과, 이 나이 되도록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것 없음이 때로는 세상과 소통하는 구멍이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지금 이름 불러주지 못하는 꽃들과 내가 구별해내지 못하는 나무들은 내가 불러주는 이름 따위 없이도 수천, 수만 년을 잘 살아왔다. 저 홀로 자유롭고, 스스로 빛나는 그것들이 나는 부럽다. 기다림을 알되, 그 기다림에서 자유로운 것들. 나무들과 꽃에 있어 기다림은 일상이고, 몸에 밴 것이다.

때를 열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데에 서두름도 없고, 서투름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그저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할 뿐이다. 다만 하고 또 할 뿐이다.

▲ 물 빛에 비친 단풍과 붉은 열매 몇 알
ⓒ2005 김남희
나는 점점 사람이든 사물이든 제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들이 좋아진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제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할 뿐인 사람과 짐승들. 산 아래 머무는 동안 나는 산을 바라보며 삶을 배운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그저 기다리며 견뎌가는 것임을,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또 할 뿐임을, 산 아래 마을에서 산을 통해 배우고 있다. 저 산에 지금 가을이 깊다.

 

2005-10-22 09:11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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