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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과 메르켈, 닮았지만 다르다

 

 

 

한명숙과 메르켈, 닮았지만 다르다
여성·환경부장관 이어 첫 여성총리 공통점... 성격·정치노선은 '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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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숙(왼쪽) 국무총리 지명자와 메르켈 독일 총리.
ⓒ 오마이뉴스 이종호·연합뉴스/AP
노무현 대통령이 24일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62·고양 일산갑)을 총리후보로 지명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그가 첫 여성총리로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인물은 지난해 10월 보수적인 독일정치사에서 첫 여성총리 시대를 연 앙겔라 메르켈 총리(52)이다. 한명숙 의원실의 박영민 정책보좌관도 "한 의원의 총리지명은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서 첫 여성총리가 된 메르켈 독일총리와 비견된다"면서 '한국판 메르켈'에 대한 기대감을 강조했다.

물론 두 사람의 성격과 정치 역정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컬러'는 비슷하기보다는 오히려 판이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분단 국가라는 경험과 첫 여성총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청소년부장관과 환경부장관에 이어 총리가 된 점이 같다.

성격, 정치 역정, 정치인으로서 '컬러'는 판이하게 달라

메르켈 독일 총리 - 한명숙 총리 지명자

 

메르켈

성명

한명숙

1954년

출생연도

1944년

동독에서 성장

출생지

북한 평양시

라이프치히대 물리학

전공

이화여대 불문학·여성학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

경력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여성민우회 회장 등
기독민주당(CDU)

정당활동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연방의원, 여성청소년부장관, 경부장관, 연방총리

정치경력

국회의원,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 총리지명자

헬무트 콜 전 총리

정치적 후견인

김대중 전 대통령

냉철한 '독일판 철의 여성'

성격

온화한 '부드러운 카리스마'

 

ⓒ 오마이뉴스 김당
우선 두 사람은 모두 분단국가의 공산권에서 성장한 공통점이 있다.

메르켈은 1954년 서독 지역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지역 브란덴부르크주의 템플린에서 자랐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후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1978∼1990년)으로 일했다.

메르켈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에도 동베를린의 과학원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뉴욕타임스>지는 지난해 10월 프로필 기사에서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9일, 앙겔라 메르켈은 다른 때와 마찬 가지로 매주 가던 사우나에 들렸다. 몇 시간 후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서독으로 밀려가는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 대열에 뒤따라 뛰어들었다. 이처럼 그녀의 독일 역사와의 만남이 약간 뒤쳐지는 일은 그날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한 달 후에 민주화를 지지하는 정당들의 연합체인 '민주개벽'에 가입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90년 8월 '민주개벽'이 기독민주당(CDU)에 흡수통합됨으로써 그녀는 기민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90년 통독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선거에서 메르켈은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메르켈은 90년 12월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발탁으로 1991년 여성청소년부장관, 1994년 환경부장관을 거쳐 1998년 기민당 첫 여성 사무총장을 맡으며 거침없이 성장했다. 언론에서는 콜 총리의 도움을 많이 받은 그를 '콜의 양녀(養女)'라고 불렀다. 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처럼 뚝심을 갖춰 '독일의 대처'로도 통했다.

그리고 실제로 콜 수상이 1999년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자 메르켈은 자신의 오랜 정치적 스승과 결별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민당은 스스로 걷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기민당은 노(老)전사들이 없이도 정적들과 싸울수 있기 위하여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후견인을 걷어찬 것이다.

마침내 그는 2000년 4월 기민당 당수에 선출됐으며, 비자금 추문으로 휘청거릴 때는 정치적 은인인 콜 전 총리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며 정면돌파해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남성 중심의 보수 정당에서 정치 입문 15년 만에 첫 독일 여성 총리라는 자리에 올랐다.

메르켈, 베를린장벽 붕괴로 현실참여... 한명숙, 남편 만남 계기로 현실참여

메르켈보다 10살 위인 한명숙 지명자는 1944년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태어났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모와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기독교학교인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이화여대 사감을 거쳐 강원룡 목사가 설립한 한국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간사(1974∼1979)로서 사회생활을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평양에서 여섯 살 때까지밖에 살지 않았으나 고향이 평양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평생토록 가슴에 저미고 살아온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곁에서 50여년 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정사 때문에 한 의원은 이후 자연스럽게 여성과 평화 그리고 통일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한 의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 온 내가 이후 통일과 평화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메르켈이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격변기에 현실참여에 눈을 떴다면, 한 의원은 실향민인 부모님과 민주화운동가인 남편 박성준씨(66·성공회대 겸임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현실참여에 몸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행로를 바꾼 첫 번째 계기였다.

한 의원이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한 의원은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서울대생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는데 두 사람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이었다. 다음은 한 의원의 '고백'이다.

▲ 이화여대 불문학도 시절에 교정에서 친구와 함께.
ⓒ 한명숙 홈페이지
"고백하거니와 난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나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메르켈과 달리, 한 의원 현실참여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진영으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평범한 연구원에서 '손쉽게' 정치인이 된 메르켈과 달리, 한 의원의 현실참여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 의원은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듬해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6개월의 짧은 신혼생활의 추억만을 남겨둔 채 그의 곁을 떠났다. 한 의원은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서라도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낸 그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가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남편 박성준과의 만남에 이어 그의 인생을 뒤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보다는 오히려 나 스스로였다"면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으며 남편이 출옥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살벌한 감시의 눈길을 한시라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포함한 8명의 동지들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해 버렸다.

여성운동 1세대로서 활동가들의 대모(代母) 역할

▲ 13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 전공을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바꾼 남편 박성준씨의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한명숙 의원.
ⓒ 한명숙 홈페이지
2년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그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가가 되었다. 13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비슷한 시기에 출감한 남편 박성준도 전공을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바꾸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87년 2월에 그는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가 연합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결성을 주도했다. 여성연합은 이후 진보적 여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민주화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로서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대모(代母)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1989∼1994년)과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1993∼1996)를 맡으면서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 환경부 환경보전실무대책위원회 위원, 방송개혁국민회의 공동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후 1997년부터 2년간 미국 유니온신학대 객원연구원을 마치고 돌아와 남편과 함께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NGO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에게 정치참여를 권유한 것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물론 그는 YWCA 총무 출신의 이희호 여사와도 가까운 관계였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기용한 데 이어 2001년에는 그를 초대 여성부장관에 발탁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당시 그를 환경부장관으로 기용했으며, 그는 환경부장관으로서 정부의 기관평가와 언론사의 국무위원 평가에서 모두 '톱'을 차지하는 역량을 과시했다. 이어 그는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고양 일산갑)에 출마해 5선 의원인 한나라당 홍사덕 전 원내총무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해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고 원활한 업무 스타일과 온화한 성품이다. 결국 30년 동안 여성·민간부문에서 활동한 경험과 재선 의원 및 두 번의 장관 경력 그리고 온화한 성품이 건국 이후 첫 여성총리로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과연 '사회 양극화' 해소와 대선을 앞두고 '정치 양극화' 조정이라는 과제를 함께 안은 정권 후반기에 메르켈 같은 추진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이다.

다만, 메르켈보다 그에게 더 큰 기대를 걸 수 있는 점은 메르켈의 독일 역사와의 만남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 동독 시민들 대열에 뒤따라 뛰어든 것처럼 '약간 뒤처지는 일'이었던 데 반해, 그의 한국 역사와의 만남은 87년 6월항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 앞장서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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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16:29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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