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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대중음악 100대 명반 ‘들국화’1위

 

 

커버스토리]대중음악 100대 명반 ‘들국화’1위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7-08-23 10:27 | 최종수정 2007-08-23 10:39 기사원문보기
 

 

그룹 들국화의 데뷔 음반(1985)이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혔다.

 

경향신문은 문화기획·대중음악 전문매체인 ‘가슴네트워크’에 의뢰, 평론가·기자·방송PD·음반기획자 등 국내의 대중음악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선정했다. 그 결과, 들국화 데뷔 음반이 1위에 올랐다. 이 음반은 총 207점을 획득했으며, 선정위원의 87%인 45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별도의 추천 음반 리스트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선정위원이 들국화의 데뷔음반을 ‘명반’으로 꼽은 셈이다.

 

선정위원장 박준흠씨(가슴네트워크 대표)는 들국화의 음악을 ‘80년대 새로운 음악의 시작’이라고 평했다. 그들의 데뷔음반을 시작으로 80년대 중·후반 ‘한국대중음악의 르네상스’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현대 음악 마니아의 감성과도 동떨어지지 않으며, 서구 대중음악의 트렌드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세련된’ 한국대중음악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2위는 유재하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사랑하기 때문에’(87)였다. 41명의 선정위원으로부터 182점을 얻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작사·작곡·편곡을 모두 해낸 유재하야말로 한국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음악적 자주의 완전 실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3위는 71년 발표된 김민기의 유일한 독집 음반이다. 발매 직후 전량 압수돼 폐기됐고, 모든 곡이 금지된 이 음반에 대해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대중가요가 그저 그런 사랑과 이별, 눈물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예술적 산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라고 말했다.

 

김창완·창훈·창익 형제의 산울림 1, 2집은 5, 6위에 나란히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산울림은 4위, 11위를 차지한 어떤날의 음반과 함께 20위권 내에 2장의 앨범을 올린 밴드다.

 

90년대 음반으로 10위권에 든 것은 9위인 델리 스파이스 데뷔음반(97), 10위인 이상은의 ‘공무도하가’(95)였다. 90년대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며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순식간에 바꾼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규 음반은 4장 모두 100위권에 들었다. 데뷔음반(92)이 24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2집(93)이 30위, 4집(95)이 36위, 3집(94)이 57위를 차지했다.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트로트 장르 음반은 순위권에 포함되지 못했다. 박준흠씨는 “트로트 장르는 앨범으로서의 완성도보다는 싱글 중심의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 ‘앨범 차트’에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70년대 이전 음악이 포함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60년대까지는 ‘히트곡 모음집’ 개념이 강했지,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적 주제를 갖고 작품으로서의 음반으로 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상위권 순위를 살펴보면 80년대 중·후반에 명반이 쏟아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상위 20위에 오른 음반중 10장이 이 시기에 발매됐다. 박준흠씨는 “들국화가 데뷔한 85년에서 김현식이 죽은 90년까지 한국 대중음악계는 스타일이 가장 다양했고, 여러 세대 음악인이 공존했으며, 주류 음악권에서 명반이 나왔던 시기”라고 분석했다. 예상과 달리 90년대 대중음악을 주도한 프로듀서 겸 작곡자들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프로듀싱 등 ‘기능적’ 측면보다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창작력’을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박준흠씨는 “음악산업의 핵심은 ‘작품으로서의 앨범’”이라며 “음반을 사는 음악 마니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음악사적인 부분에서도 음반이라는 개념을 환기한다는 측면에 이번 기획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은 앞으로 1위~100위 음반에 대한 리뷰를 1년여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글 백승찬·사진 박재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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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선 ‘걸들의 전쟁’ 뜨거운 걸~

 

 

뉴스 > 국제 > 북미/중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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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1일 (화) 19:11   한겨레

미 대선 ‘걸들의 전쟁’ 뜨거운 걸~


[한겨레]

“당신은 최고의 후보. 나는 오바마에 푹 빠졌어.” “힐러리와의 토론에서 거칠게 구는 모습이 좋았어.”

지난 6월13일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돼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동영상 뮤직비디오 ‘난 오바마에게 반했어’의 한 대목이다. 3분 남짓짜리 이 동영상에는 성적 매력을 한껏 풍기는 20대 여성이 등장해 관능적인 춤과 노래로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 연기자·모델로 활동 중인 앰버 리 에틴저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오바마 걸’로 불리며 유명세를 타게 됐다.

동영상은 오바마의 선거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자들도 동영상 공개 뒤 언론에 “오바마 의원에 대한 지지보다는 ‘재미’를 위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조직적 선거운동과 무관하게 제작된 손수 제작물(UCC)이 뜻밖의 대히트를 친 셈이다.

난 오바마에게 반했어 I got a crush…on Obama (오바마 걸)



오바마 걸의 인기가 치솟자 다른 유력 후보들의 ‘걸’들도 잇따라 등장해, <유튜브>에선 ‘걸들의 전쟁’이 뜨겁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민주)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힐러리 걸’인 태린 서던은 일반인들을 연예인으로 데뷔시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어메리컨 아이돌’ 출신 가수·댄서다. 그는 “오바마도 좋지만, 당신은 오바마에게 없는 게 있어” “힐러리 당신은 다른 여성들보다 피부도 좋아”라고 노래한다.

핫포힐 HottforHill (힐러리 걸)



토론 2008 오바마 걸 vs 줄리아니 걸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도 반격에 나섰다. ‘줄리아니 걸’은 춤과 베개 싸움으로 오바마 걸과 ‘전투’를 벌인다. 가장 최근 등장한 ‘롬니 걸들의 공격’이란 제목의 동영상에선 금발 세쌍동이 ‘롬니 걸들’이 “롬니 지지”를 확인한다.

정치인들이 인터넷을 선거운동이나 주요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그 기법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정치인의 장점을 나열하는 차원은 이미 넘어섰다. 뮤직비디오나 영화 뺨치는 영상물로 특히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고, 한발 더 나가 온라인에서 ‘대리전’까지 치른다. 이번 ‘걸들의 전쟁’의 최대 수혜자인 오바마는 “인터넷 세상에서 가능한, 풍부한 상상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창작물은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제작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적 견해에서 짧은 길이의 영상물을 만들다 보니 △섹시한 흑인 오바마 △좋은 피부의 매력적인 힐러리 △세 번 결혼한 줄리아니 △잘 생긴 롬니 등 ‘이미지’만 지나치게 강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롬니걸들의 공격 Romney Girls Attack Obama Girl!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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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o 네로 오버 버닝

 

 

mirageact2 (2006-05-04 16:37 작성)1대1 질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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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평
아~ 동영상은 용량만 고려하면 되는군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1. 일반적인 공CD는 700MB/ 80Min인데, 여기에서 시간인 80분은 CD플레이어에서 재생되도록 오디오 CD로 만들었을 때의 시간입니다. 400MB의 1시간 50분짜리 동영상의 경우는 오디오가 아니라 데이터이기 때문에 시간이 아닌 400MB가 중요합니다. 즉 동영상같은 데이터의 경우 재생 시간이 아닌 동영상의 용량만 고려해주면 됩니다.

오버버닝을 할 때는 700MB 공CD의 용량인 702MB를 초과하는 데이터를 구울 때입니다. 703MB 이상의 데이터의 경우 오버버닝을 해야 구울 수 있습니다. 

 

2. 아래의 설명은 네로 6.3.1.20버전으로 설명입니다.

800MB 공CD를 구우려면 오버버닝을 해야합니다. 즉 700MB 공CD를 사용하면 오버버닝 옵션을 하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3MB를 초과하는 용량을 구울 경우 오버버닝을 해야합니다. 오버 버닝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Nero StartSmart를 실행 시키고 "데이터굽기"를 선택합니다. 그런 다음 기본메뉴 "파일"에서 "기본 설정"을 선택하면 "일반"에 시디의 관한 설정 사항이 있습니다. 800MB 공시디를 오버버닝하려면 황색마커를 79분으로 적색마커를 85분으로 설정합니다. 일단 700MB로 오버버닝을 하려해도 마찬가지 설정을 해놓고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기본설정에서 "고급기능"을 선택한 후 "디스크 동시 쓰기 오버버능 기록 사용 가능"을 체크합니다. 그리고 CD길이를 90분 30초로 설정합니다. 이러고 나서 확인을 누룹니다. 여기까지가 오버버닝에 필요한 설정을 끝 마친 것입니다. 다음으로 구울 800Mb 공시디를 라이터에 넣습니다. 공CD가 들어가면 자동으로 네로가 실행되도록 설정되었다며 "데이터 굽기"를 선택합니다. 그런 다음 구울 파일들을 선택하고 "굽기"버튼을 누른 다음"멀티세션"에서 "멀티세션이 아님"을 체크한 후 "굽기"에서 "Disk-At-Once/96"을 체크합니다. 이런 다음 굽기를 하면 800MB 공CD를 구울 수 있습니다.

 

Nero 6 안에는 네로 버닝롬이 들어있습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그림을 첨부합니다.

 

 

위의 두 그림은 위에 설명한 오버버닝 설정 사항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위의 설명대로 설정한 뒤에 오버버닝을 하여 굽는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네로6를 실행시키거나 공CD를 넣으면 자동으로 실행이 됩니다.

 

 

"데이터"를 선택합니다. 일반적으로 영화등의 데이터를 굽는다만 "데이터 디스크 만들기"를 선택하면 됩니다.

 

 

"데이터 디스크 만들기"를 선택하면 위의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구울려는 데이터가 들어있는 드라이브에서 파일을 선택합니다.

 

 

마우스로 드래그하여 왼편으로 옮깁니다.

 

 

굽기 버튼(CD에 성냥불 모양의 버튼)을 눌러 위와 같이 설정합니다.

 

 

동시디스크쓰기/96을 선택하고 굽기를 누릅니다.

 

오버버닝을 할 경우 다음 단계에서 오버버닝을 할 것이냐고 묻는데 오버버닝으로 선택하면 됩니다. 오버버닝은 라이터기 자체에 무리를 주게 되므로 자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굽더라도 8배속 정도의 저배속으로 굽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를 공CD에 구울 때 자막파일인 smi파일은 avi파일과 함께 공CD에 집어넣어서 굽습니

다. 이렇게 하면 영화를 볼 때 자동으로 자막파일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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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막는 건 파시즘, 진중권을 내버려 둬라

 

 

'비판' 막는 건 파시즘, 진중권을 내버려 둬라
[取중眞담] 심형래의 <디 워>를 둘러싼 이전투구 논쟁에 붙여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 진중권씨는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영화 <디 워>의 관한 비판적 견해를 이야기했다가 네티즌에게 십자포화를 맞았다. ⓒ MBC
 
 

탤런트 홍석천이 타의에 의해 '커밍아웃'됐던 지난 2000년. 문화평론가 이재현이 했던 말을 새삼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차이로 인한 차별은 폭력"이라는 것을.

개봉한지 열흘이 채 못 돼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침체된 한국영화계에 '대박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 스크린쿼터가 깨지고, 이전에 개봉했던 한국영화들이 줄줄이 고전을 면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 '가뭄 속 단비'였기 때문일까? <디 워>에서 파생된 갖가지 논란이 한국사회와 인터넷을 혼란의 태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원칙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작품과 작가를 놓고 벌어지는 '뜨거운 토론'이 나쁠 것은 없다. 고래로부터 문화예술이란 그런 고통 섞인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지금은 자그마한 소품 한 점 가격이 최소 수백만 달러에 육박하는 화가 고흐(1853~1890)도 살아 생전엔 수많은 혹평에 시달렸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문학적 대업(大業)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톨스토이와 존 스타인벡에게도 비판세력은 엄연히 존재했다.

산업적 측면이 극단적으로 강화된 장르이긴 하지만 영화 역시 문화예술의 범주 속에 포함된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화 <디 워>와 이 작품의 제작·연출자인 심형래에 대한 논쟁은 '(산업)예술로서의 영화'가 겪어야할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성공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글쎄요"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재 진행중인 <디 워>와 심형래 관련 논쟁에는 논의을 진행하는데 기본이라 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독단과 아집의 배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논쟁과 무관한 무차별적 인신 공격... 비판이 '죄악' 돼버린 해괴한 상황

<디 워> 개봉 직후 영화 <후회하지 않아>를 연출한 이송희일 감독이 심형래와 <디 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거기엔 대다수 관객과 네티즌들의 의견과는 상반된 비판적 입장이 담겨있었다. 다소 거친 표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글이 인터넷에 알려진 후 네티즌이 보여준 반응은 '거침' 정도가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이송 감독의 <디 워> 평가에 대한 비난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성정체성(이송희일 감독은 동성애자다)을 놓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은 네티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부 네티즌의 <디 워> 감싸기와 비판자에 대한 무차별적 질타는 며칠 후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에게로 옮겨갔다. "심형래 감독은 겸손해야 한다"고 한 김조 대표의 조언은 "그러는 너는 겸손하냐"라는 냉소적 대답으로 돌아왔고, "성씨가 2자인 놈들은 하여간 재수 없어"라는 이번 논쟁과 무관한 모욕까지 당해야했다.

10일에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디 워>와 심형래를 무자비한 어조로 공격한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혔다. 지난 밤 출연한 MBC 100분토론에서의 발언으로 인해 인터넷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언론사들은 경쟁하듯 진중권의 한마디 한마디를 다시 재생해 여러 개의 유사한 기사를 반복재생산 하고 있고, 포털사이트 기사마다에 달린 댓글 중 상당수가 인용하기조차 힘든 육두문자와 상소리, 욕설을 담고 있다. '의견'이라기보단 독단의 강요 혹은, 아집 부리기라 이름 붙여 마땅한 것들도 부지기수다.

진중권이 100분토론 도중 "심약한 평론가는 지금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비판을 하지 말라니? 심형래와 <디 워>가 국가보안법인가"라고 발끈했던 게 터무니없는 과장과 무조건적 분노는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 영화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논쟁에 한국사회가 달아오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비판의 자유의 허용하지 않는 세상이 '파시즘' 불러올 수도

우리는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을 아직 기억한다. 당시 히틀러와 괴벨스, 괴링이 주도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zis)은 게르만민족의 혈통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모든 선과 정의를 자신들이 소유했다는 독선과 아집에 빠져있었다. 착각에 불과한 그 아집과 독선은 전 유럽을 전쟁의 포연 속으로 내몰았고, 200~4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학살이란 비극을 낳았다.

<디 워>를 둘러싼 이번 논쟁을 쭉 지켜봤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네티즌들 속에 자리한 독단과 아집에서 히틀러가 주도한 '파시즘'의 음습한 그늘을 봤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거나, 호들갑일까? "맞다. 호들갑이다"라 답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논쟁의 상대를 논리가 아닌 욕설로 제압하려 들고, 자신과 다른 견해를 인신공격과 조롱으로 폄하하는 세상, 즉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세상엔 희망과 발전 또한 없다는 것. 이런 곳이 바로 파시스트의 세상 아닌가.

또한, 세상 어떤 누구도 영화와 연출자를 평가하는 견해의 차이로 의해 폭력적 차별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 아래 다시 한번, 너무나 당연해서 오래 곱씹어야 할 이재현의 말을 옮긴다.

"차이로 인한 차별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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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는 엉망진창, '영구 없다' 하는 꼴&quot;

 

디 워>는 엉망진창, '영구 없다' 하는 꼴"
[논쟁] 진중권 <100분 토론>에서 <디 워> 독설 '뜨거운 논란'
텍스트만보기   조은미(cool) 기자   
 
 
 
▲ MBC <100분 토론>이 '<디 워>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란 주제로 10일 오전에 열려 뜨거운 도마에 올랐다. ⓒ MBC
 
 

"심형래 감독은 영화에 대한 철학이 없다. 애국주의 코드, 민족주의, 시장 코드, 인생극장에다 CG 하나다."

"<디 워>엔 기초인 플롯 전체가 없다. 바둑으로 말하면 대마가 잡힌 거다. 대마가 없는 상태에서 이 바둑알이 상아고 이 상아를 국산기술로 깎았다. 칭찬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네티즌들이 그럼 '네가 직접 만들어라' 이러는데, 계란이 곯았는지 안 곯았는지 알기 위해서 직접 치킨이 돼서 알을 낳을 필요는 없는 거다."

"비평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꼭지가 돌아서 (비평을) 썼다."


진중권씨는 용감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10일 새벽 0시 20분 시작한 MBC <100분 토론> '<디 워>, 과연 한국 영화의 희망인가?'에 참석해 <디 워>와 <디 워>를 둘러싼 분위기에 통렬한 독설을 퍼부었다.

이날 <100분 토론>엔 동국대 겸임교수이자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사인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이자 전 데일리서프라이즈 편집장인 문화평론가 하재근씨, 스포츠조선 영화전문기자인 김천홍 기자, 중앙대 겸임교수이자 전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인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애초에 "심형래 감독 겸손이 필요하다"는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던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의 출연으로 기대감이 높았으나, 뜨거운 발언은 문화평론가 진중권씨에게서 쏟아졌다.

진행자 손석희씨는 "<그때 그 사람들> <괴물>에 이어 한국영화에 대한 토론은 세 번째"라며, "(<디워>에 대해 토론한다고 하니까) 게시판엔 7000건이 넘는 의견이 올라왔다. 토론도 시작 전에 이런 건 처음이다"며 뜨거운 반응을 예고했다.

애국, 민족, 시장주의, 인생극장 이 4가지 코드가 <디 워>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대뜸 "<디 워>엔 애국코드, 민족코드, 시장주의 코드, 인생극장 코드, 이 네 가지 코드가 있다"고 지적하며 포문을 열었다.

진중권씨는 이 영화를 한국에서만 보겠다고 했다면 인기 없었을 텐데, 한국영화를 가지고 할리우드에 진출하겠다 해서 '애국코드'요, '아리랑' 들어가고 '디스 이즈 코리안 레전드' 들어가고 이걸 미국 사람들에게 보여준단 열망이 들어간 '민족 코드'요, CG를 예전엔 사서했는데 이젠 우리가 하게 됐다는 국산화의 자긍심이 들어간 '시장주의 코드'요, 마지막으로 심형래 감독의 '인생극장 코드'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디 워> 포스터. ⓒ 쇼박스
 
진중권씨는 이어 "인터뷰를 다 분석해 보면 심형래 감독 자신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거의 없다. 영화 철학이나 영화 미학에 대한 언급은 없다"며 "내가 보기에 썩 좋은 영화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엉망진창"이지만 "CG는 볼만하다. 대중들이 거기 감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진중권씨는 "가장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꼼꼼하게 지적하는 비평이 작가에 대한 최대한 예의라 생각한다"며 "(이 영화가) 엄청 허술하다. 영화 전체를 보면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진씨는 "주인공들이 계속 도망만 다니고, 구해주는 것도 다 남들이 도와주고 마지막 결말에 그 많은 대군이 목걸이 하나로 날아간다. 그 목걸이를 작동시키는데도 또 주인공들이 한 일이 없다. 부라퀴를 물리치기 위해 선한 이무기를 불러주기 위해 주인공들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며, "이게 뭐냐면 '데우스엑스 마키나'라고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오는 신'이라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진씨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위기에 주인공을 몰아놓고 어찌 구할지 몰라, 신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와 주인공을 구한다, 신이 인간을 구해준다"며,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악당이 총을 쏘려고 하면 외계에서 날아온 별똥별에 맞아 해결이 된다는 이런 구조, 우연에 맡기는 구조는 피해야 한다는 게 극작술의 기초다. 25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얘기다. 그런데 심형래 감독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디 워>야말로 하느님의 뜻으로 갑자기 모든 게 해결된다며, 진중권씨는 "아무리 스토리 구조가 허술하더라도 결말에서 주인공이 한 역할이 없는, 그렇게 허술한 구조를 갖는 영화는 사실 없다. 당연히 평론가들의 평이 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화평론가 하재근씨가 "원래 평론가는 냉정하달 수 있지만 난 거기 동의가 안 된다"며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자, 또 진중권씨는 "평론하고 응원을 착각하는 것 같고, 영화하고 축구를 착각하는 것 같다"며 "'잘 한다, 잘한다'가 평론가가 할 일이 아니다. 평론가라는 건 예술 커뮤니케이션에서 피드백 시스템으로, 잘못했을 때 지적해서 다음 제작할 때 제대로 나와야 한다"고 설명한 뒤 "지적하고 잘해라 해야 하는데, 잘한다, 잘한다 하면 제대로 나오겠냐?"고 반박했다.

영화 막판에 관객이 안 우니까 대신 용이 울고 지나가더라

이어서 진중권씨는 <디 워>에 "기초인 플롯 전체가 없다"며 "바둑으로 말하면 대마가 잡힌 거다. 대마가 없는 상태에서 이 바둑알이 상아고 이 상아를 국산 기술로 깎았다. 칭찬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또 "배우들이 하나도 할 게 없다보니까 연기할 게 없는 거고, 배우가 뭘 해야 할지 모르니 당연히 연기가 어색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일급배우를 갔다 써도 변변히 연기할 게 없으니까 캐릭터를 드러낼 수가 없고, 개성이 없다"며 "이렇게 할 일이 없으면 연애라도 해야 하는데 연애도 안 한다. 그러니 마지막에 키스할 때 황당하다. 심지어 '어우. 쟤네 촬영하다 감독 몰래 사귀었나보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고 비꼬았다.

이어서 진씨는 "그러니 막판에 둘이 헤어질 때, 슬프지 않고, 슬퍼야 되는데, 관객이 울어야 되는데 관객이 안 우니까 대신 용이 울고 지나간다. 이게 이런 문제"라며 "배우가 연기를 못한 게 아니라, 일급 배우를 갖다 놔도 대본이 안 되면 연기가 나올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도마에 오른 '평론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진중권씨는 따끔하게 반박했다.

진중권씨는 영화마다 평론가들 평이 다른데 "이 영화가 엉망이라는데 대해선 모든 평론가들이 일치하는데, 이 정도 합의가 영화 내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대해서 대중들이 몰려와서 난리를 친다"며, "지금 어떤 분위기냐면 말을 못하는 분위기다. 옛날 황우석 때 말 못한 것처럼, 심형래 감독에 대해 말하려면 지금 모험이다. 지금 이게 제대로 된 평가냐?"고 지적했다.

 
▲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MBC <100분 토론>에 참석해 영화 <디 워>와 <디 워>를 둘러싼 분위기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 MBC
 
 

또 진중권씨는 "이게 모 인터넷 사이트 대문에 칼럼으로 올라온 글인데, 칼럼 제목이 뭐냐면 "<디 워> 전쟁이 시작됐다. 충무로를 타격하라"다. 진군나팔 빵빠바방 울려가는 이런 분위기에서 심약한 평론가는 말 못한다"며, "<디 워> 평가 받아야 한다. 아주 냉정하게 평가 받아야 하는데 심 감독도 피드백이 들어오는데, 지금 '와! 끝내줘요. 감동 했어요' 이러느라 냉정한 논의가 하나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씨는 이어서 "영구아트가 개발한 그래픽 소프트웨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얘기가 하나도 안 된다"며, "영화평론가들은 안 좋은 영화에 대해선 혹평을 해댔다. 그런데 왜 이 영화에 대해서만 이런 수난을 겪어야 하냐.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냐"고 되물었다.

비평 좀 하게 냅둬라

<100분 토론>에 참여한 한 시민논객이 "심형래 감독에 대한 깊은 글들은 없었다. 평론의 부재 아니냐"는 지적하자 이에 대해서도 진중권씨는 열변을 토했다.

진중권씨는 "제 말도 10자로 하면 '애들아. 비평 좀 하게 냅둬'"라며 "이무기가 LA에 나타난 것도, 여자를 잡기 위해서 대군단이 나타난 것도 다 CG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보철이 자꾸 변신하고 자기 정체를 숨기는 것도 메타몹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며 "필연성을 시나리오 안에 심어놔야 하는데 그게 없다. 그러니 우린 황당하다"고 꼬집었다. 또 "오로지 CG 하나면 된다는 심형래 감독 생각이 작품에 드러난다"며, "평론가들이 볼 때 평론하기가 민망하다"고 털어놨다.

또 진중권씨는 "자꾸 (심형래 감독을) 무시한다고 하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말한 걸 갖고 이야기한 것이다. (관객들이) '아리랑' 나와서 눈물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인생극장'이라 찡하다. CG 볼만하다. 이것 빼곤 없다"며, "문제는 그러면서도 애국 코드가 아니다, 민족 코드가 아니라고 하니 황당하다. 영구가 '영구 없다' 하는 것과 똑같다"고 비판했다.

이런 진중권씨의 비판에 대해 <100분 토론>의 한 시민논객이 "진중권씨가 과거에 영화 <300>을 평가하면서 '이건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처럼 <디 워>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비판하자 진중권씨는 이건 다르다고 반박했다.

진중권씨는 "<300>은 너무 단순해서 문제지, 기본적으로 서사가 있다"며, "장르 영화도 기본적으로 지킬 게 있는데 인과 관계에 의해 결말이 와야 한다. <300>엔 그게 있는데 <디 워>는 그게 없다"고 꼬집었다.

또다른 시민논객이 "냉정하거나 분석적인 비평을 쓰지 않았다"는 지적에 진중권씨는 "<씨네21>에 비평을 썼다. 왜 썼냐면 비평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네티즌들이 하는 걸 보고 꼭지가 돌아서 썼다"며 "네티즌들이 하는 이야기가 '네가 직접 만들어라' 이런 이야기인데, 계란이 곯았는지 안 곯았는지 말기 위해서 직접 치킨이 돼서 알을 낳을 필요는 없는 거다"고 통렬하게 반박했다. 진씨는 이어서 "'충무로의 사주를 받았냐' 이런 건데, 충무로와 저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면 한 달에 한 번 지하철 갈아타는 관계"라고 덧붙였다.

나와 충무로? 한 달에 한 번, 지하철 갈아타는 관계

 
▲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MBC <100분 토론>에 패널로 출연해 영화 <디 워>에 대해 특유의 독설로 비판했다. ⓒ MBC
 
 

이어서 시민논객이 "어떤 영화든 비평할 가치가 있지 않냐? 비평할 가치가 없는 영화인데 댓글 때문에 화가 나서 달았다고 했는데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다"고 지적하자 진중권씨는 "뭐가 위험하냐? 심형래 감독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왜 그렇게 위험하냐? 그게 국가보안법인가?"라며 "그런 발언 자체가 상태의 비정상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진중권씨는 또 "꼼꼼하게 다 찍었지 않냐"며, "여러분들이 심형래 감독 도와준다고 하는 게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게, 심형래 감독은 영화에 대한 철학이 없다. 암만 인터뷰를 봐도 없다. 애국주의 코드, 민족주의, 시장 코드, 인생극장에다 CG 하나"라고 꼬집었다.

진씨는 이어서 "여러분이 환호한 이 철학이 작품 어떻게 망치냐면 이런 것"이라며, "조선 남녀가 LA에 환생하는데 이유가 제시 안 된다. 영화 외적인 필요성을 그냥 삽입한 애국주의 코드다. LA에서 미국 배우를 데리고 갑자기 '아리랑'이 흘러버린다. 민족주의 코드"라고 지적했다. 또 " (심형래 발언이 담긴 자막) 엔딩이 불필요하게 올라간다. 바로 인생극장 코드"라며, "그건 진짜 세계 영화사상 코미디인데 그거 빼야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런 걸 지적하는 게 평론가의 임무"라고 덧붙였다.

또 진중권씨는 "(스포츠조선) 김천홍 기자도 '화려한 CG를 보면서 자랑스럽다'고 썼는데, <트랜스포머>를 보고 자랑스럽단 느낌 못 받는다. 이렇게 애국주의 코드를 쓰면서 왜 아니라고 하냐?"고 반박했다.

<100분 토론> 진행자인 손석희씨가 "다른 영화도 애국주의 코드를 쓰는데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고 묻자 진중권씨는 "<괴물>에 대해 욕했을 때, '봉준호 감독 만세, 우리가 봉준호 감독을 지켜줘야 해' 이런 건 없었다"며, "애국주의 코드, 민족주의 코드, 인간극장이 미국에서 통하냐? 거기서도 <무릎 팍 도사> 할 거냐? 안 통한다. 우리가 만든 CG에 관심 갖냐? 안 갖는다. 우리는 <용가리>랑 <디 워>를 비교하지만, 그 사람들은 <디 워>를 <트랜스포머>랑 비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진중권씨는 "중요한 건 CG 기술인데 이것만 갖고 버틸 수 있냐는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 영화가 나갈 때 심형래 감독이 이런 건 취하고 이런 건 보충해야 한다로 논의가 가야 하는데 얘길 못 꺼내게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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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누리꾼 비난? 정상적인 '비정상'이다"
  <디워> 비판한 진중권 "누리꾼 자극하는 기자들도 큰 문제"
 
  2007-08-10 오후 12:27:32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를 혹평한 문화평론가 진중권 교수(중앙대)에 대한 누리꾼들의 논란이 달아오르자 이에 대해 진중권 교수는 10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예상했던 반응"이라며 "이는 정상적인 '비정상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진중권 교수는 지난 9일 '디-워(D-WAR),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라는 주제로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 출현해 <디워>에 대한 따가운 비판을 내놓은 바 있다. 이후 <100분 토론> 게시판을 비롯해 관련 기사에는 수천 건이 넘는 비난글이 올라오는가 하면 주요 포털사이트에는 진중권 교수의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진 교수에 대한 누리꾼들의 관심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다.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나 영웅 통해 대리실현하려는 욕구"
  
▲ <100분토론>에 출현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MBC

  진 교수는 "황우석 사태 당시처럼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성역으로 만드는 현상이 재연되는 걸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아직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나 영웅을 통해서 대리 실현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것 같다"고 밝혔다.
  
  진 교수는 "또 다른 문제는 신문기자들이 '공격'을 유도하는 점"이라며 "멀쩡하게 블로그에 올린 글을 기사로 써 공격을 하게 하는가 하면 또 다시 기사를 통해 비판한 이들에게 억지로 사과를 받아내려고까지 한다"고 비판했다.
  
  이는 지난 4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디워>에 대한 비판글이 한 통신사를 통해 기사화가 된 뒤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았던 이송희일 영화감독의 사례에 관한 지적이다.
  
  진 교수는 "정작 사과해야 할 이들은 공격하는 누리꾼들이 아닌가"라며 "(나에 대해 비난했던 누리꾼들이) 이제라도 사과하면 받아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냉정한 논의 이뤄질 수 없다"
  
▲ 영화 <디워>의 한 장면

  지난 9일 진 교수는 <100분 토론>에 출현해 '디 워'의 흥행 코드는 "한국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겠다는 애국 코드와 한국의 것이라는 민족 코드, CG 국산화에 대한 자부심, 심형래 감독의 인생역전 코드"라고 지적하며 "정작 영화 '디 워'는 진짜 허술하다"고 밝혔다.
  
  진 교수는 "꼼꼼하게 지적하는 것이 평론가의 몫"이라며 "그런데 '디 워'에서는 주인공이 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주인공을 구해주는 것도 다 남들"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영화에 이야기가 없다"며 "배우가 연기를 못했다고 하는데 1급배우를 갖다 놓고도 대본이 없으면 연기를 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헤어져도 슬프지가 않으니 용이 대신 울지 않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진 교수는 "'디 워'는 냉정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냉정한 논의가 이뤄질 수가 없다. 영구아트센터에서 만든 CG 수준에 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데 더이상의 논의가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에는 이외에도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 문화평론가 하재근씨, 김천홍 <스포츠조선> 기자가 논객으로 출연했다.
   
 
  강이현/기자
 
 
 
 
인터넷에 부는 "<디 워> 광풍"

 

디워’ 비평 못하는 상황, 비정상적 vs 관객을 평가하려는게 문제


 
[뉴스엔 김미영 기자]

영화 ‘디 워’(감독 심형래/제작 영구아트)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디워’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시사프로그램 MBC ‘손석희100분 토론’의 주제로 선정되기까지하며 대단한 영향력을 여실히 증명했다.

10일 방송된 ‘손석희의 100분 토론’은 ‘디 워,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디 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지난 1일 개봉해 9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나 ‘디 워’가 베일을 벗은 뒤 평단의 혹평과 네티즌의 호평이 엇갈리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패널로 출연한 김천홍 스포츠조선 영화전문기자는 “‘디 워’에 대한 논란이 본질적인 것을 벗어나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며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생각보다 극단적인 것은 아니며 정도와 바라보는 온도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김천홍 기자는 기본적으로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은 무난한 점수를 주는 반면 드라마 스토리의 허술함은 대체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면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호평과 혹평으로 나뉘며 논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김천홍 기자는 “문제는 영화에 대한 평가가 아닌, 비평가들이 관객에 대한 평가를 내려버린 것”이라며 “400만명이 본 영화를 단지 마케팅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400만 관객들을 낮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지금 ‘디 워’에 대한 말을 못하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며 “심형래 감독에 대해 말하는 건 ‘모험’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약한 평론가들은 말을 못한다”며 “‘디 워’는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얘기를 못꺼내는 지금 이 상황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날 함께 출연한 김조광수 대표 역시 “이전에 이송희일 감독의 글이 일파만파 퍼지며 마녀사냥식으로 확대되는 상황이 짜증이 나 내가 개인 블로그에 글을 올렸는데 그 역시 인터넷에 화제가 되면서 논란이 됐다”고 밝혔다.

이날 ‘100분 토론’에는 진중권 문화평론가와 김조광수 대표, 김천홍 기자와 하재근 문화평론가가 출연했다. 그러나 ‘디 워’에 대한 논란만을 부추겨 현재 ‘100분 토론’의 인터넷 게시판은 1만건이 넘는 글들이 올라오며 또 한번 인터넷 전쟁을 예고했다.

김미영 grandmy@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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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보다 아예 추첨이 민주적이다?

 

 

 

선거보다 아예 추첨이 민주적이다?
[독자투고] 초록정당은 민주노동당을 넘어설 수 있는가
 
 
 

다가오는 17대 대선을 맞이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이 뜨겁다. 명실상부한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을 치러야 한다. 지금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대선 예비후보자들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각자 자신들의 특장점을 온몸으로, 열정으로 쏟아내며, 당원들과 국민들과 호흡하며 불꽃 튀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 손짓, 눈빛, 표정, 호흡 그리고 그들이 쏟아내는 스토리텔링, 레토릭, 열정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법정에서의 연설과 토론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아테네에 쳐들어오는 외부의 적을 맞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공화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하는 전쟁의 영웅이 되겠다고 다짐하거나 출사표를 던지는 장군을 보는 것 같다.

고대에서의 생과 사의 전쟁터는 전형적인 정치의 무대였으며, 장군은 훌륭한 정치가였으며, 그들이 영웅인 이유는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중에서 누구를 찍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권영길은 아버지 같은 분이다. 심상정은 큰 누님 같은 분이다. 노회찬은 어린 조카들을 걱정하는 막내 삼촌 같은 분이다. 이 세 분 중에서 한 분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가혹하다.

이런 분들이 혼신으로 경주하고 있는 선거운동 분위기에 비해, 과연 선거는 민주적인가? 정당은 과두제를 피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좀 황당하기도 하고 생뚱맞은 것 같기도 하고, 선거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까지 하다.

솔직히 이 세 분들의 불꽃 튀는 경쟁을 보면서, 순진한 발상이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빚어지는 두 분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 그리고 불편함 때문에, 그리고 그 동안의 당내 경선이 대체로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 담합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이번에도 사실상 정파과두제가 평당원의 민주주의를 왜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선거로 뽑지 말고 추첨제로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 분 말고 대선 후보로 나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세 분이 워낙 탁월하니 나가기가 두려운 사람들에게도 덜 부담스럽게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사전에 일정한 자격심사를 받도록 하고, 자격심사를 받아 추려진 범위 내에서 추첨제로 뽑으면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을 포함한 웬만한 공무원도 그렇게 추첨제로 뽑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이미 깨우쳤겠지만, ‘탁월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탁월한 대표자를 뽑는 선거란 것이 ‘유사성의 원칙’과 ‘가능성의 평등’을 추구하는 추첨제보다 덜 민주적이고, 불평등하다는 생각, 그리고 선거를 기초로 한 정당 민주주의와 대의제 정부의 구성이 필연적으로 관료제를 부르고, 더 나아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 이른바, ‘과두제의 철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선거가 ‘민주정’이 아니라 아닌 ‘귀족정’이고,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포장된 귀족정이라는 주장은 고대부터 계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스키외, 루소 모두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귀족주의적 결과는 선거가 사용되는 환경과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선거 그 자체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몽테스키외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징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징이다”고 말했다.

『선거는 과연 민주적인가』(곽준혁 역, 후마니타스)의 저자 버나드 마넹에 의하면, 고대 아테네가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직접민주주의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그 핵심은 모든 시민이 권력에 참여하였는가에 여부에 있지 않고, 추첨제를 실시하였는가 여부라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테네에서도 정책과 공직자의 선임을 선거 제도로 뽑을 때도 있었지만, 민주정이라고 부르는 그 핵심에는 추첨제가 있는데, 추첨제는 모든 시민들이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평등’이 있고, 통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한다는 ‘유사성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고, 로마공화정에서 지배적으로 유행한 관리 선출 방식인 선거제도는 대표자가 피치자보다 덕과 능력 및 재산이 우월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리’에 입각했다고 보았다.

버나드 마넹에 의하면, 추첨제를 하지도 않고, 선거제도로만 하면서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포장된 일종의 귀족정’이고, 대의제적 정당민주주의가 대표자들을 피대표자인 대중들과 유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공헌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추점제도’와 비교해 볼 때, ‘귀족주의적인 탁월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선거제’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나 생활방식, 그리고 교육에 따라 시민들과는 구분되는 소위 엘리트의 통치로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단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 일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당과 정당에 의한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근대 대의제가 초기에 고대의 민주정과 공화정을 적절히 혼합한 ‘의회정치’에서 ‘탁월한 대표자’를 뽑자는 원칙이 있어 그나마 ‘최소한적’으로 민주주의 정신에 반응하였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대중정당 모델에 따른 대의형태와 이것의 필연적 귀결인, 탁월한 대표자를 인기영합적이고 선거공학적인 선거기능인으로 변질시키는 ‘선거전문가 정당’의 등장이 대의제의 ‘탁월성의 원칙’마저 훼손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정당의 가장 극명한 문제점으로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일 것 같은 정당에서도 예외 없이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지배하는 경향을 말하는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 관철된다고 주장하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미헬스(Michels, 1962)가 자신의 책 『정당사회학 : 근대 민주주의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김학이 역, 한길사)에서 밝힌 실증분석을 예로 들었다.

버나드 마넹은 미헬스의 ‘독일 사민주의 정당 분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미헬스(Michels, 1962)는 정당의 지도자와 대의원들이 노동계급이라는 배경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와 같은 생활을 한다고 지적했다. 미헬스는 노동계급 정당의 지도자들과 대의원들이 일단 그러한 권력의 자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초부터 달랐다고 주장했다.

미헬스에 따르면, 정당은 (노동계급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게 그 사회계급 내에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가장 유능하고 박식한 노동자를 등용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이러한 더 똑똑하고, 더 야망에 찬 노동자들이 소기업자가 되었던 반면 지금은 정당의 관료가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정당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탈노동자화’된 엘리트들이 지배했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특별한 자질과 재능, 이른바 행동주의와 조직 기술에 근거해서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대중정당이 대의정부를 지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정부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당엘리트인 대표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행동주의와 조직기술에 있다. 투표자는 이제 더 이상 대표자의 자질을 판단하고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정파)인가를 보고 당의 조직과 행동에 익숙한 정당대변자를 자신의 대표자로 선출한다. 그리하여 투표란 유권자가 정당이 내세운 자신의 후보에 대해 동의하고 인준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정당민주주의는 활동가와 정당관료의 통치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볼 때, ‘탁월성의 원칙’을 강조하는 선거제도가,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을 갖고 있는 ‘추첨제도’와 비교해 볼 때, 좌파든 우파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근본적으로 선거제도가 계속되는 한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만을 반복할 것이라는 버나드 마넹의 지적 그리고 모든 조직은 ‘과두제의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미헬스의 지적으로부터 민주노동당이나 초록정당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지?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은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그동안 풀뿌리민주주의자(이른바 직접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왜 지방선거 때만 되면, 지방선거에 필사적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속시원하게 대답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직접민주주의자들이 왜 지방의회라는 대의제에 참가하려는 것일까? 지방의회라는 대의제를 활용하여 풀뿌리민주주의가 활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풀뿌리를 내세워 지방의원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아리송하다. 초록은 필자의 질문에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필자의 생각은 소박하다. 좌파든, 우파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추첨제도가 선거제도를 대체할 수 없다면(대체할 수 있다면 대환영이다), 솔직하게 대의제민주주의에 충실하거나 이를 보완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그 핵심은 미국의 건국자들이 연방주의를 도입해 중앙과 지방을 분리하고, 중앙권력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분리하고, 의회를 상원과 하원 양원제로,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분리해서 독재권력이 나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찾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특정 정파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는 탁월한 대표자라도 제대로 뽑아 덜 귀족정이 되도록, 덜 관료제와 과두정이 되지 않도록 토의민주주의와 공화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혼합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적어도 풀뿌리민주주의자들의 바램대로 적어도 지방차원에서 추첨제도가 실시될 수 있도록 하는 차별화된 전략과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22일 정오, 여의도공원에서 녹색정치선언식을 마치고 자전거 등으로 연설회가 열리는 대방동 여성회관까지 이동한 당원들. ⓒ 민주노동당
 
초록은 민주노동당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계급적 토양을 넘어 초록적 토양이 아직은(?) 덜 만개된 한국에서 초록(녹색)정당을 출범시키겠다는 초록정치연대의 고군분투도 대단하고 놀랍다. 정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경우 투표 행태와 정당 형성이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는 계급적 대중정당에서 후기산업사회의 탈물질주의 및 신사회운동을 반영하여 녹색정당이 출현하였으나,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여 1990년대에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대변하는 노동정당은 30년, 녹색정당은 10년이나 지체되어 2004년 17대 총선 이후에 민주노동당이, 2007년에 초록정당이 정치적인 명함을 내밀 수가 있었다.

이렇게 지체된 이유는 아마도 남북분단에 따른 극우-보수정권의 등장, 좌익-좌파-진보세력 탄압 및 억압(법제도, 정치현실), 우익 독점에 의한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 레드콤플렉스(red complex)가 존재하는 가운데, 민주화의 전개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좌-우익 대결, 계급균열이 정치적으로 억압(suppressed)된 가운데, 지역주의적 대결이 가장 핵심적인 균열 구조로 등장하고, 3김이 이것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하고 유지함으로써, 3김이 정치적으로 퇴장한 지난 2002년 대선 이후에나 민주노동당과 초록정치연대가 정치적 빛을 볼 수가 있었다.

이같이 지체된 이유로, 노동영역을 넘어 ‘포괄적 진보영역’(생태, 소수자, 인권, 평화, 여성)을 담아야 하는 민주노동당의 존재와 그것의 존재적 기반은, 탈근적 정치담론을 전문적으로 담아야 하는 초록정당의 출현에 또는 초록을 차별화하는 데, 불리한 환경 또는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당정치가 서구의 경우처럼, 계급균열에 기초한 정당정치를 가져오지 못하고 이를 대신한 지역주의 균열이 판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이 후기 산업사회적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순진하게, 시대착오적인 단계론적 접근으로 노동과 계급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을 넘어 녹색을 비롯한 포괄적 진보영역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생존을 위해 거버넌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계급적 대중정당들이 녹색정당이 출현한 것에 충격을 받아, 생존 차원으로 녹색정당의 가치와 아젠다를 순식간에 흡수하여, 녹색의 이미지를 포섭하여 결과적으로, 녹색정당의 정치적 진출을 어렵게 하였듯이, 민주노동당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지배적 이념인 사회주의가 이념형에서 생활 속에 내려와 소통하거나 아니면 수정 정정 되거나 또는 반증되는 ‘생활형’이 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올바름만을 믿는 종교집단이나 네오콘집단이 하는 것처럼, 천국의 세계만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이념으로 현실을 내려누르려고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초록정당의 녹색주의(생태주의 이념)도 생활형이 아니라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수준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특히, 민주노동당 내 일부 정파들은 이념적 가치와 신념이 너무 강한 나머지, 미국식 민주주를 전 세계에 급진적 방식으로 확산시켜보겠다는 미국의 이상주의자들인 네오콘처럼,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인 외교를 하지 않고 일방주의적으로 활동한다(아이러니하게도 외교를 더 열심히 하는 쪽은 미국의 현실주의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초록주의자들은 초록의 가치와 신념만을 가지고 네오콘처럼 행동할 가능성도 크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볼 때, 초록은 포괄적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겠는가? 더더욱 녹색주의(생태주의)적 이념형에서 시궁창 같은 현실 영역으로 내려와 생활형으로 소통할 수 있겠는가? 초록은 필자와 같이 이상주의자들에게 지친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2007년 07월 23일 (월) 13:25:41 채진원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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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자율과 萬惡의 근원 프랑스의 교육평준화에 눈먼 정부?

 

 

 

대학자율과 萬惡의 근원 프랑스의 교육평준화에 눈먼 정부?
 
번호 30709  글쓴이 시골훈장 (sintobule)  조회 916  누리 344 (349/5)  등록일 2007-7-9 06:28 대문 5 톡톡
 
 
 


언젠가 앨빈 토플러는 한국이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산업화시대의 근로자양성을 위한 공장식 교육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교육부총리 담화를 보고

자기정당의 존재부정으로 귀결된 가출犯如圈의 실용이나, 내신 50%반영을 따르지 않으면 강력한 행정제재를 하겠다던 김신일 교육부총리의, 사학들의 반발에 겁먹은 30%반영 국민담화를 바라보면서, 혁신을 시도하려는 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반발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은 자기정체성을 결국 부인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런 지도층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끝없는 반발세력에 대한 타협과, 공공이익의 양보에 의한 개인적인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안전보장뿐입니다.

이럴 때는 불의한 역사적 정체성과 부정부패의 결정체인 범야 냉전수구기득권층의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사육신 같은 절개와 무지막지한 어거지가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합니다.

한술 더 떠, 전국대학 총장간 토론회에서 노대통령의 '기회균등할당제'를 '교육받고 난 결과까지 균등화시키는 것은 역차별적인 감상주의'라 뒷다마 까고, 대학자율 규제 가능성에 대해 '토론을 빙자한 코미디'니, '권력자가 공공의 이익을 말하는 것은 독선' 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독선에 가득 찬 교수협회장도 있습니다. 새 열마리야! 그럼 대통령의 이익만을 말하라는 거냐? - -

▶ 프랑스의 대학자율화와 재정투자

최근 수구언론과 폴리페서polifessor들이 프랑스의 대학교육경쟁력 강화를 위한 재정투입과 대학자율화정책을 주구장창 예찬하며, 프랑스의 교육 평준화는 萬惡의 근원이었다는 지젓대로 결론과, 눈먼 참여정부가 프랑스대학자율화를 보지도 못한다며 아전인수의 요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며 떠드는 X가튼 XX들에게 서팡들은 다 아는 프랑스교육에 대한 진실을 디벼볼랍니다.

프랑스초등과정은 만6세에 입학, 5년 과정의 3학기제인데, CP(Cours preparatoire : 예비과정), CE(Cours elementaire : 초급과정, 2,3학년), CM(Cours moyen : 중급과정, 4,5학년)이 있습니다. CE와 CM은 각각 CE1, CE2, CM1, CM2로 세분되고 각 학년 사이에는 학습속도가 빠른 학생의 경우 월반할 수도 있고, 느린 경우 같은 학년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연간 일정은 대충, 1학기는 9월부터이며 뚜생(Toussaint 10월 22일~11월 3일까지)과 성탄바캉스(12월 17일~다음 해 1월 3일까지), 2학기에는 스키바캉스(2월 4일~2월 20일)와 봄 바캉스(4월 8일~24일까지), 3학기가 끝나면 긴 여름 바캉스(7월 4일에서 9월 4일까지)로 나눠집니다. 노는 것이 학기의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교육일수는 170일 정도로, 한명의 담임이 몇 년씩 아이들을 장기적으로 돌보기 때문에 아이의 식습관 같은 취향부터 독특한 재능까지 확실히 파악하게 되고, 교육 시간은 종류에 따라 30분에서 3시간까지 다양하게 아침 8시경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진행하고, 월화목금 주4회 수업이 기본입니다. 수업이 없는 수요일은 특별활동만 하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되는 긴 점심시간과 4시 반에서 6시까지의 방과 후 시간에도 특별활동을 합니다.

초, 중, 고의 특별활동을 책임지고 있는 주체는 파리시와 구청들인데, 구청을 통해 신청할 수 있는 특별활동 프로그램들은 구기 종목, 계절 스포츠, 투기 종목 등의 스포츠와, 회화, 조각, 고전 음악, 고전 및 현대 무용, 연극 등 예술 분야에 걸쳐 다양한 경험과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고 개인 교습비용도 지원합니다.

특이한 것은 공립학교의 1/3정도의 사립학교가 교사의 수준을 좌우하고 부모의 경제력에 차별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제대로 된 운동장을 갖춘 학교가 드믈어 공공시설을 사용하며 학교시설은 우리보다 열악합니다.

중등교육과정은 중학 4년, 고교 3년 과정입니다. 아이들은 초, 중등 기본교육과정을 토대로, 고교3년 동안은 철저한 진로지도와 적성과 재능에 따라 적정분야를 선택하는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우리의 총점이나 평균, 과목석차 등의 성적에 대한 또래 간 비교나 계량화된 서열은 없으며, 일본과 우리의 주력 학습형태인 주입식 암기교육이나 객관식 학습테스트가 아닌, 정답이 없는 토론, 논술로 능력을 평가하며, 능력에 따른 유급과 월반제도와 교사 학부모간 학업성취도에 대한 수시상담(학부모소환)제도가 있습니다.

별도의 대학입학시험은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서인 바칼로레아 시험을 치는데 바칼로레아를 소지하면 대학입학 자격이 부여되고, 그마저도 재시험제도 때문에 진학이 좌절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바칼로레아도 계열별로 12종류나 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대학 진학에 유리한 과목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랑제꼴을 제외한 모든 대학은 바칼로레아만 있으면 지원하며, 대학지원 시, 면접관의 판단자료인 내신평가를 제출하고, 바칼로레아 통과자의 80%가 1년 등록금이 겨우 50만 원이하인 전국 90개 국공립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일반 고교와 달리 국가가 취업을 보장하는 기술 자격증 취득의 2년제 직업 고교도 있는데, 자격증 취득자가 대학 입학을 원할 경우 일반 고교로 편입하여 기술 바칼로레아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또, 엘리뜨 양성이 목적인 그랑제꼴은 각 고교 준비반에서 2~3년 더 공부한 뒤 치열한 경쟁시험을 치루기도 합니다. 일반대학은 대중적인 고등교육 및 석.박사 학위 과정을 포함한 순수 학문교육을 담당하는 반면, 그랑제꼴은 국가기관 등 현업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전문고급인력을 배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학비가 없으며 이공계 그랑제꼴들은 150~200만원의 학생생활비를 지급합니다.

특별히 그랑제꼴 과정을 많이 배출하는 5대 명문고교가 있는 곳으로 부모들이 이사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특별한 적성을 가진 탁월한 아이에 맞는 수준 높은 커리큘럼이 있는 곳을 취사선택하는 문제일 뿐이고, 역대 대통령과 총리들을 다수 배출한 국립행정학교(ENA) 같은 그랑제꼴도 효율적인 인재 양성이란 순기능을 인정받아 왔지만,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를 지속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프랑스에는 1000여개의 학부로 구성된 90개의 국,공립대학이 전국 500여 곳에 고루 분포돼 있으며, 사회정의와 기회균등이라는 역사적 전통과 국가 정신에 의해, 국가가 정한 동일한 시스템과 학생들의 등록금이 아닌 국가재정으로 경영되어오면서, 최근에는 다양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적응과 혁신에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계성을 해결하기 위한 대학교육재정과 운영에 대한 자율성과 대학간의 경쟁체제 도입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문제제기는, 한때 세계경제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산업경쟁력이 후퇴하고 있는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데 충분한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수아 피용은 총리취임의회연설에서 “새 정부는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 강화와 사회 통합을 위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여 프랑스를 21세기형 국가로 현대화 하겠다”며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면서, 헌법을 개정하여 소수 정당 입지 강화를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각종 개혁정책추진을 위해, 의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파를 대변하는 인물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만들고, 핵심위원회의 대표직은 야당인물을 지명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2012년까지 현재 8.1%의 실업률을 5%로 낮추고, 향후 5년간 500억 유로(약 6조2500억원)를 투입하여 대학현대화를 추진하고, 대학에 더 많은 자율권을 줘서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연 2%대에 머물러있는 경제성장률을 3%대까지 끌어올리고, 당장 내년부터 정부지출규모를 현 수준으로 동결하고 퇴직공무원의 자리 절반은 새로 충원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대학개혁의 골격도, OECD의 권고안 중, 학생선발, 직원채용, 강의과목개설, 민간으로부터 예산조달활성화, 재정, 석사과정선발시험도입, 대학운영위원회내 학생대표권축소 등에서 대학에 대폭 재량권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즉, 프랑스 교육문제는 사학들과 찌라시나 수구폴리페서들의 입맛대로 해석이나 우리와 같은 서열입시경쟁자율화가 아니라 연구중심대학으로서의 국제경쟁력과 20살 전후의 젊은이들 가운데 절반은 반드시 대학교육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초중등과정의 20%의 유급율과 대학자퇴율 41%가 대학경쟁력 약화를 가져오고, 실업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로 보고, 획일화된 국립대학 시스템을 뜯어고쳐 각 대학이 특성을 갖는 대학으로 거듭나게 하기위한 더 많은 자율권을 주고, 학생선발방식과 교수채용 및 승진에 간섭하지 않고, 대학이 갖춰야 할 재정적, 학문적 책임을 재정립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수십년간 정부에 의존해서 경쟁을 모르고 살아왔던 대학들이 이런 방침을 거부하고, 교원들과 학생들조차 프랑스의 평등가치를 훼손하는 미국식경쟁지상주의 발상이라며 강력 반발하자, 석사과정 선발시험도입을 포함한 일부 개혁안을 철회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1968년 일련번호를 붙여 전국대학을 평준화했습니다. 사교육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내신중심으로 대학진학을 합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서울대는 서열화 된 수능과 특목고출신 위주로 신입생을 싹쓸이 해 왔는데, 올해부터 계획된 교육정책대로 내신중심의 선발을 해야만 합니다. 수구찌라시나 폴리패서들이 망했다고 하는 세계100위권(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 대학순위에 파리6대학은 93위) 안팍의 프랑스 대학들은 많은 노벨상학자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한국의 S,K,Y는 지들이 원하는 데로 물 좋은 곳에서 월척?만 낚고 있었어도 150~200위권 정도에 불과하고, 아직도 노벨상수상자들을 배출하지 못하는 참담한 실적과, 자신들의 의욕적인 비주류 과학자조차 망신을 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즉,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프랑스의 내신평가에 의한 35년간의 대학진학전통이라는 배경을 무시하고, 프랑스가 채택하려는 대학자율과 재정투자정책만을 짜집기하여 언급하는 찌라시나 사학들의 저의는, 내신평가를 실시하기도 전에 공공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부교육정책무력화가 목적인 셈입니다.

▶ 교육풍토와 사학법

초중등 교육과정에 네 종류의 교육자가 있다고 합니다. 교장이 되기 위한 사람, 가르치려다 교장이 되는 사람, 가르치려다 가르치는 일로 끝나는 사람, 가르치려다 교육계의 불의에 중도 하차하는 사람.....

있으나 마나한 교감도 모자라 수석교사 자리가 생기고 교원평가를 한다고 합니다만, 사실 교원평가에 대한 전교조의 반발은, 그릇된 평가문화에 대한 불신과, 차등성과급제도로 초래되는 교사 상호간의 약육강식의 자본논리에 의해 공교육이 상업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교육이 양적으로는 세계최고라 하지만, 질적으로는 불의에 저항하는 교사들의 고초, 교육의 파행, 학생들의 피해, 그로인한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방고도 아닌 우리 교육의 중심이라는 강남의 고교에서 교사들이 학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성적을 조작했다고 합니다. 또, 대학생들이 강의를 부실하게 하는 교수들의 ‘퇴출 리스트’를 작성하고, 학과의 강사임용과정이 부적절하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총장에게 제출하는 등 수업의 품질개선을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합니다. 예를 들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의 교육은 총체적 부정부패에 빠진 상태이며 가히 혁명이 필요한 지경입니다.

2005년 말 사학법 개정은 참여정부의 큰 역사적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난 현재, 그 법을 통과시켰던 주역들이 개혁 취지를 무산시키는 정반대의 만신창이 사학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골인해 놓고도 스스로 노골을 외치고, 다시 자살골을 넣는 수준 낮은 영구 짓거리라고 말합니다.

성적은 아이들의 미래를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며, 아이들의 성적으로 교사를 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 교육의 혁신을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는 교육부 최고책임자가 찌라시의 여론조작과 사학과 수구폴리페서들의 집단행동이 있을 때마다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며 대통령과 다른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것은, 당초 교육정책에 의해 교육받은 아이들을 배신하고, 스스로의 직권을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일 뿐이며, 사학법을 걸레로 만들어 자기욕구 충족만 일삼는 불의한 입법부는, 우리 역사의 백년대계를 깊은 수렁에 파 묻어버리는 국민에 대한 반역행위일 뿐입니다.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EC%9D%98_%EA%B5%90%EC%9C%A1%EC%A0%9C%EB%8F%84

http://www.petifrance.com/education.htm

http://coree.campusfrance.org/kr/itmoe-i-e-i-oe-oe/i-e-i-i-ioeuroi-emu-ioe-180.html

 

ⓒ 시골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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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03.11.14
 

매트릭스의 철학,무엇을 말했는가

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나의 두뇌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그는 곧 이 운명을 전 인류에 지워 “모든 인간이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상상”하더니, 이어서 자기가 묻고자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물음 자체가 모순, 즉 “스스로 논파하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내 견해를 묻는다면, 나 역시 파트남처럼 ‘아니오’라고 대답할 게다. 세계 속에서 특정 사물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세계 전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의 문법은 ‘믿음’이라는 낱말의 문법 위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생각 또한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의심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라. 데카르트처럼 “방법적”으로만 회의를 하든, 아니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회의를 하든, 세계 전체를 회의하는 것은 철학적 난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로 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어디선가 주인공 네오는 해킹 프로그램을 감추려고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든다. 영화의 원작자들이 성경처럼 여긴다고 하는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시뮬라시옹’이란 그런 복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개념들이 실은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를 인터넷 버전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 사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에 대해 함구하는 게 철학자들의 못된 버릇인 모양이다.

‘가상’에는 늘 인식론적 문제가 따른다.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면 그것은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현실’이 아직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조작은 개별적인 사실의 날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빠진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조작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시적 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가령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이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하마터면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된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폭로할 뻔했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의 관리자들은 이 돌발사태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놀라운 조작의 비밀은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을 한갓 우연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제시한 데에 있다. 더러운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외려 ‘대통령도 잘못 하면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된다. 얼마나 완벽한가?

‘시뮬라시옹’을 관리하는 자들의 골칫거리는, 미리 입력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가상의 세계로 치고 들어와 현실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현실이 자기 주장을 하면 가상의 가상성은 폭로된다. 관리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 1편의 시나리오는 이 ‘저지전략’의 포맷을 따른다. 저지되어야 할 ‘돌발사태’는 네오처럼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거스르는 자들. 이들은 제거되어야 할 ‘버그’다. ‘버그’는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그 속에 몰입해 있던 이를 돌연 바깥의 현실로 끄집어낸다. 버그를 잡아내는 프로그래머처럼 스미스 일당은 네오와 그의 친구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기계들의 도시로 향하는 네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다름없다. 네오는 시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전쟁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매트릭스>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이때만 해도 아직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존재했다. 선택은 기껏해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인간을 구하려고 네오는 행복한 가상을 포기하고 현실의 비참함을 받아들인다. 2편에서는 이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1편의 소박한 ‘해방’의 서사는 흔들린다. 만약 네오의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매트릭스 밖의 현실도 또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이제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느냐’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물음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할 수 있는 무한한 용량의 두뇌. 이런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이상이었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우연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일 뿐이며, 나의 자유의지는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결정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라플라스의 악마’다. 2편에서는 이 악마를 대변하는 목소리들이 강박적으로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시온은 이미 다섯번 멸망했고, 네오 역시 여섯번 태어났다. 우주는 유전하고, 만물은 윤회한다. 안더스의 논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 그가 말하는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니체의 ‘영겁회귀’에서도 불교적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게다. 현각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는 바, 석가모니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라고 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트릭스 탈출하기’가 되는 셈이다.

매트릭스 벗기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네오를 보는 괴로움 속에서도 2편을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매트릭스를 교란시키는 네오라는 ‘버그’마저도 매트릭스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 미리 입력된 존재로 상정된 데에서 비롯된다. 1편의 철학적 패러다임은 가상과 현실의 구별 위에 서 있는 플라톤적 매트릭스다. 하지만 리로디드된 2편의 패러다임은 가상이 아닌 현실 자체도 하나의 매트릭스, 그것도 새로이 생성되어 소멸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적 매트릭스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매트릭스의 필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 즉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비합리적 동인에서 비롯된 행위들이다. 2편에서 네오는 예정된 대로 시온을 구하러 가는 대신에 돌연 위험에 빠진 트리니티에게로 간다. 3편에서 네오는 스미스의 냉철한 합리성 앞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또 그가 구원해줄 인류들은 네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한다. 이 믿음은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믿음, 즉 ‘근거가 없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중세적 믿음이다.

이 우발성의 개입에, 합리적 결정론의 화신 스미스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쿠키를 집어던지며, “내가 집어던질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뭐 하러 구운 거야?” 하지만 스미스를 당혹하게 만든 이 돌발사태도 혹시 미리 예정된 게 아닐까? 결말 부분에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매트릭스의 과학자가 오라클에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지?”라고 묻자, 오라클은 가볍게 부정을 하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다. 이로써 대답은 슬쩍 유예된다.

종교와 철학

3편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십자가 책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네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스미스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든 사탄의 역할을 한다. 네오와 스미스가 3편에 걸쳐 벌이는 결투는 마치 광야에서 벌어진 사탄과 예수의 세 차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몸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네오는 몸 속에 스미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스미스를 사라지게 한다. 순간 묵시록에서 예언한 아마겟돈의 결전은 멈추고, 네오의 사도 요한이 군중 앞에서 인류가 구원받았음을 외친다. 기쁜 소리, 복음이다. 할렐루야,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이다.

성가족의 성스런 대화(웅덩이에 쓰러진 네오의 얼굴에서 언뜻 오라클을 본 것 같다.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는 수육(受肉)의 드라마, 즉 인류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이 되어 내려온 신의 얘기가 된다). 매트릭스의 창조주에게 오라클이 묻는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이제 저들에게도 자유를 줘야지.” 유일신교의 승리다. 이집트 당국은 다시 이 영화를 허용하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 창조주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고, 거기에 오라클은 “가능한 한 오래”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이 평화가 궁극적인 것은 아님이 슬쩍 암시된다. 기독교사관의 직선은 다시 불교사관의 원환과 합류한다.

포스트모던

이 절충주의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일반적 특징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온갖 철학과 온갖 종교에서 따온 인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에 종종 사용되는 기법이다. 나아가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신화나 신학 같은 고대적 모티브과 모순적 결합을 이룬다든지, 가장 대중적인 오락에 매우 난해한 지적 유희를 도입하여 대중과 엘리트를 가르는 구별을 내파(implosion)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키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키치’는 포스트모던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끝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유일물의 제작이 아니라 동일한 ‘코드’에 따라 수천, 수만개의 동일자를 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동일자를 무한복제하는 암세포에 비유한 바 있다.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것을 생산하는 인간들마저도 획일화한다.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획일적으로 만들고, 이 매트릭스 안의 인간 시뮬라크르들은 남이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따라 남의 삶을 살아가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다. <매트릭스>는 이런 현대사회의 영화적 반영이다.

아이러니와 몽타주

벗어날 길은 없을까? 포스트모던은 계몽의 서사와 해방의 수사를 비웃는다. 영화 속에서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네오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은 스미스나 메로빈지언에게 비웃음만 사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대중들은, 적어도 영화를 보러 온 순간만큼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과 그것의 세속적인 형태인 해방의 서사를 보고 싶어한다. 3편의 시나리오가 진부한 기독교적 대속의 서사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엘리트주의와 구별된다.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방의 수사는 벌써 낡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가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한다고 하나, 어쩌면 그 전투도 미리 체제의 프로그머에 의해 입력이 되어, 대중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헛된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해방의 뜨거운 열정과 순응의 차가운 지혜를 종합할 수는 없다. 영화의 결말처럼 다만 절충이 있을 뿐이다.

절충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네오가 스미스가 되고, 스미스가 네오가 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판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이다. 아니면, 두개의 생각을 부싯돌처럼 충돌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불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몽타주 예술이리라. 구원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구세주가 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구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뿐이다. 하긴, 촌스런 구원의 수사학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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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5/5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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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No. 427 200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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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물가 과연 역전되었나? 2 - 소득과 집세에 따라서

 

 

1.
며칠전 한일 물가 정말 역전되었나1 - 교통비를 중심으로 를 올렸더니 댓글이 150개를 육박했다.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었다. 일본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상황이었고, 한국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은 말도 안된다, 실제 수입이 2.5배에서 3배인데, 어떻게 물가를 단순비교하냐는 것이 주를 이뤘다. (근데 내용과 별개로 다짜고짜 반말에다가 욕하는 분들은 뭐하는 분들인지...)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아예 한일 년간수입 자체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일본 소득이 한국보다 2-3배이면 일본 교통비가 당연한 거고, 아니면 한국이 비싼 것일테니.



2. 우선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에 대해서
   블로거 기자 리장님께서 무료일간지를 보시고 정리를 해주셨다.

   http://savenature.tistory.com/104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은 2006년 현재 2780만원이다.
 
  그럼 일본 근로자 평균 연봉은 얼마일까.

  일본통계청이 2007년 1월 발표한 데이터를 살펴보면 437만엔
 (2005년 현재 - 그 이후 아직 발표되지 않았음)이다.
 (일본어 기사 원문을 보려면 -> 여기로)

3. 자 단순히 통계 데이타만 놓고 따져보자.
   일본인들의 수입이 한국의 두배인가?

   한화 대 엔화 환율을 단순히 1:10으로 놓고 봐도 2780 만원 대 4370만원이다. 일본 직장인들의 수입이 한국 직장인의 두배가 되려면 5560만원은 되야 한다.
     
   그런데 현재 환율로 따져보면 어떨까. 1:8을 적용시키더라도  3496만원 정도다.
   오늘 환율은 현재 1:7.5 엔화 약세를 감안하더라도 한화로는 3277만원이 된다.

   물가 비싼 일본이 한국보다 벌어들이는 돈은 겨우 500만원이 더 안된다는 결론이다.


4. 이 정도 수입에 일본 물가는 어떨까.
    현재 교통비는 앞에서 언급했고, 식사를 놓고 봅시다.

    일본인들이 흔히 먹는 라면은 400 - 500엔(그러나 라면만 딸랑 나온다는 거)
    그리고, 돈부리(덮밥)도 밥만 딸랑해서 400 - 600엔 정도 한다.
    돈까스는 좀 먹으려면 최하 700엔은 줘야한다.
    한국처럼 반찬 풍족하게 놓고 먹으려면 1000엔은 넘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일본 라면 400엔 정도 하는 가격인데, 이게 다다. 그 외 아무것도 안나온다.

  사실 싼 식사만 놓고 보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해보인다. 오히려 일본이 더 싸 보인다.
 
  그러나, 2007년 3월 현재 '일본 농림중앙금고'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점심값으로 평균 지불하는 금액은 평균 600엔으로 조사되었다. 언젠가 일본 신문에 500엔짜리 도시락 중에서 뭐를 사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600엔이면 한화로 4500원인 셈이다. 돈 많이 버는(?) 일본인들이 왜 이렇게 점심값을 줄이고 사는 것일까. 일본음식 드셔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반찬 같은거 500엔대에서는 도시락 말고 일반 식당에서는 생강과 짠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건 일본의 살인적인 주거비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부동산이 폭등해서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들이 5억 10억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전세가 있다. 어떤 분은 이런 댓글을 단 적이 있다.

    '너도 한번 전세 살아봐라. 그러면 월급보다 더 빨리 오르는 집값 때문에 속터진다'
   
 일본은 현재 버블이 붕괴된 후 집값이 폭락했다가 다시 서서히 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라면 전세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 한명이 이번에 늦깎이 장가를 가는데 6000만원이 서울 변두리 전세를 얻는 최하한선이라고 한다.(방 두개에 18-20평) 그렇다면 일본은 같은 크기 혹은 그 엇비슷한 크기로 얼마에 구할 수 있을까. 도쿄 변두리에 방두개 13평 정도를 얻으려면 최소 보증금 20만엔에 월세 10만엔에서 13만엔은 주어야 한다. (독신자용 원룸은 제외.)

  아는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제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에 보증금으로 들어가는 돈은 적지만 월 100만원에서 130만원 들어가는 집에 살고 싶냐, 아니면 6000만원짜리 전세를 들어가고 싶냐 라고.

  다들 당근 전세가 낫다고 한다.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혼전에 열심히 돈을 모으거나, 아니면 대출,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서 다달이 없어지는 월세는 안내고 싶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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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심의 경우 월세는 더더욱 올라간다. 15평 정도면 15만엔은 거뜬히 넘긴다. 신쥬쿠 도청차에서 바라본 도쿄

5. 사실, 일본 직장인들이 500엔짜리 도시락에 목숨 거는 이유도, 퇴근후 술한잔으로 끝내고 집에 와서 캔맥주를 사 마시는 것도 다 살인적인 주거비 때문이다. 이를테면 월세가 아니라 론을 끼고 자기집을 마련한 경우도 30년을 거쳐서 월세처럼 갚아야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집을 살때 자기 수입 대비 다달이 들어가는 월세와 비교해서 집을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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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서 교통비와 주거비를 빼면 식비, 의복비, 교육비 등이 들어가는데 식비나 의복비는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게 되었다 쳐도,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는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거비다.

  내가 한국에 있을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일본인들의 삶의 수준이 한국사람보다 수입만큼 더 나은가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오히려 그닥 더 높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높은 물가와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수입, 적은 양의 먹거리 등 때문이었다.

  일본의 보통 회사는 초봉이 20만엔이 안되는 회사도 수두룩하다.  

  그리고 가끔 일본 아르바이트 시급이 800엔에서 1000엔 하니까 우리나라의 2배 이상 아니냐고 하시는데, 그것도 돈을 많이 버는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정규직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임시직일 뿐이다. 일본 전체 노동인구가 2005년 현재 5300만명이라고 했을때, 그 중에서 38퍼센트는 비정규직 노동자 - 즉 계약직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2/3라는 사실. 부족한 가계 살림에 외벌이로는 답이 안나오니,수입을 보태러 쇼핑센터나 가게에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다. 프리 아르바이터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하층 노동자이거나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다.

6.
 사실 한국 물가 많이 올랐다.
 식당 음식값은 글쓴이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과 비슷하거나 1000원정도 올랐다.
 그러나 집값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올랐다. 또한 교통비도 무시못할 정도로 올랐다.
 실제 현재 나도 한국에서 오른 물가를 체감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외국과 비교해서 체감하기에는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나 지하철 공사 등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일본과 비교해서도 그렇다는게 내 생각이다. 글쎄....세상 사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겠지만, 한국이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아직까지도 살만한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국내 빈부격차나 수많은 모순점을 덮어두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다들 잘먹고 잘사는데 우리만 왜 이 모양이냐는 이야기만큼 미래가 없는 이야기도 없다. 물가와 소득, 그리고 생활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어느나라나 삶의 무게는 다 각각 지니고 있고, 평온해 보이는 그 나라 사람들도 전투하듯 박박 기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국은 한국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나은 길을 모색하면 된다.

 ps. 그렇다고 한국물가 싸니 만세 이런 이야기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고, 댓글 다실때는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욕설/협박 등은 기본적으로 통보없이 삭제할 예정이며 일절 대응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반대 의견이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예의를 갖추고 피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2. 다음번에는 먹거리에 대해서 좀더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것도 또 써라 마라 하시려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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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과학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기획리포트] 과학과 정치의 닮은 점은 '관찰의 이론의존성'
텍스트만보기   이종필(ststnight) 기자   
 
 
과학 발전에 있어서 실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우 널리 퍼져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든지, 무슨 연구소에서 어떤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든지 하는 얘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무런 이론적 편견도 없이 설계된 객관적인 실험의 결과로부터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자연법칙을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상식을 받아들인다.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물리실험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그때 과학에 대해 가졌던 심상을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연법칙은 객관적 실험을 거친 결과다?

예컨대 평면대 위의 수레에 줄을 연결해서 도르래를 통해 수직으로 늘어뜨린 다음 그 끝에 다양한 질량의 추를 연결해서 평면대 위의 수레의 가속운동을 관찰하는 실험이 있다.

수레를 가속시키는 추의 질량 변화와 수레 속도의 변화(즉 단위 시간당 이동 거리의 변화)를 비교해서 우리는 F=ma(F:힘, m:질량, a:가속도)라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실험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오랜 시간 운동량(p)의 질량과 속도(v)에 대한 관계(p=mv)나 에너지(E)의 관계(E=0.5mv²)도 이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중고등학교 물리수업도 아직 이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식'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자연현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편향적인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법칙을 이끌어 낸 경우도 있다.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학적 자료로부터 그의 제자 케플러가 그 유명한 자신의 3가지 법칙들을 유도한 경우라든지, 막스 플랑크가 1901년 흑체복사 곡선을 빛의 양자화 가설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설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케플러마저도 자신의 법칙들을 구축할 때 플라톤의 정다면체 '이론'에 기대고 있고, 플랑크가 촉발시킨 양자역학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몇 가지 가설하에 구축되어 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F=ma'는 떨어지는 사과와는 무관하게 힘(Force)에 대한 뉴턴역학의 정의에 가깝다.

실험 결과가 이론의 존폐를 결정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론이 실험의 구성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이론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실험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실험이란 어느 이론을 물질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처음부터 무작정 뭔가 새로운 현상을 보려고 시작하는 실험은 없다. 그 실험의 결과 또한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이런 관계는 핸슨의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론이 실험결과 해석을 바꾼다

보통 사람들(혹은 잘 모르는 과학자들)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과학에서 이론적 과정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는 무척 많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관찰적 사실'만을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대한 첫 실험적 검증은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질량이나 에너지의 존재가 그 주변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그 주변을 지나는 다른 물체(혹은 빛마저도)는 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 운동하게 된다. 이는 마치 침대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그 일대가 움푹 패는 것과 같다. 주변에 골프공이라도 있다면 이 패인(즉 휘어진) 면을 따라 볼링공 쪽으로 굴러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효과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극히 미미하다. 과학자들은 멀리 떨어진 별에서 나온 빛이 지구에 이를 때 질량이 아주 큰 태양 주변을 지나면서 그 경로가 휘어질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태양의 빛이 워낙 강렬해서 멀리서 오는 희미한 별빛을 제대로 관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기다려 관측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에딩턴은 일반상대론의 예측과 어긋나는 사진 검판을 일부러 제외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에딩턴은 망원경의 초점 등의 문제 때문에 제외했다고 해명했지만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에딩턴의 실험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에 실시된 일식 실험에서도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25년으로, 주로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일반상대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잇따른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었음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상대론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일반상대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패러다임 보호 본능

 
▲ 에딩턴의 실험
ⓒ 이종필
 
실험하는 사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결과나 상식과 동떨어진 결과를 얻게 되면 처음부터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고 여기기보다는 실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차들을 우선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기존 패러다임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보정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학계의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초의 이상한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제한조건들을 점검하는 것은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분명히 데이터 조작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실험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규모가 꽤 큰 실험그룹에서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실험그룹에서 관심 있었던 물리량은 어떤 비율에 대한 사인(sin)함수 값으로 표현된다. 중고등학교 때 다들 배웠겠지만, 사인함수는 기본적으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에 대한 다른 변의 비율로 정의되는 양이다. 따라서 이 값은 결코 1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처음 데이터를 열고 분석을 해 보니 그 결과가 1을 약간 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인함수 값이 1이 넘는다고 나왔으니 그 결과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심리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격론이 벌어졌고 다시 다양한 제한조건들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오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종적으로 0.99라는 결과로 공식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아무리 새로운 결과가 실험에서 관측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자연현상이나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혹은 몸담고 있는 기존의 이론적인 체계 내에서 그 결과를 해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까지 일종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어느 분야보다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에서도 자연세계에 대한 관찰과 실험 과정에서 일종의 '선입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면, 그보다 더 애매한 온갖 사회 영역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최근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망국론 부추기는 정치에 객관적 관찰 가능한가

 
▲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 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 주장 모두 합리적인 관측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정부 이후 지난 5년은 한마디로 '무능한 좌파정권 대 꼴통수구보수'의 격돌로 요약된다. 한편에서는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조중동>이 신정부를 '좌파=빨갱이=무능'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언론보도나 그 주장들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취재와 전문가들의 합리적인 분석 결과라고 쉬 믿는다.

그러나 과학 활동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는 드물다. 소재·사진·취재원·전문가, 이 모두는 편집부의 '이론'이나 선험적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참여정부 들어서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를 쓰고 싶으면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이곳 경기가 안 좋은 주된 원인이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의한 것인지 인근 대형할인점에 의한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나라가 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렸다. 2003~2004년에 걸친 대대적인 경제위기론이 그러했고 종부세 '세금폭탄'도 여기 해당한다.

다른 한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주장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혹은 전쟁난다)'는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가 탈당하긴 했지만, 이른바 빅2인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많은 국민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내 경선에 모두 참여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최소한의 상식과 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비록 자신과 정견이 다르지만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만큼 그 사회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말 그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자신의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서 지금처럼 또 무리하게 '나라 망해가는 관측'에만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관찰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과학자들은 어지간한 이론이나 주장은 잘 안 믿는다. 또한 실험 뿐만 아니라 이론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을 따지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인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실험도 쉽사리 거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과학에서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론과 실험결과들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과학의 힘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과학 하듯이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다양한 가치판단이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또 공유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사회가 열린 사회이고 선진화된 나라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찰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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