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경제질서>와 테크놀로지

칼럼

1996년 4월 3일 미국 몬타나주 링컨에서 한 남성이 검거됐다. 이 남성은 폭탄테러로 22명의 중경상자, 3명의 사망자를 낸 혐의로 체포되었다. 특이한 점은, 체포되기 1년 전 자신이 작성한 50페이지에 이르는 선언문을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에 보내고 그 선언문을 게재할 경우 테러를 멈추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선언문은 다음과 같았다.

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한글번역본: 산업사회와 그 미래)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테러는 일반적인 패턴의 범죄가 아니었다. 돈을 노린 게 아니었고 특정개인에 대한 분노 때문도 아니었으며 재미로 누군가를 죽인 것도 아니었다. 카진스키의 테러는 그 자신의 논리적 사유의 결과, 즉 신념에 의한 테러였다.

카진스키가 보여준 생각과 행동을 카진스키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것은 소심한 보수주의자의 태도다. 그들은 언제나 사태를 축소하는 버릇이 있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보다는 결과를 억제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래서 카진스키의 테러를 낳은 거대한 뿌리는 보지 못하고 그 땅 위에 빼꼼히 올라온 작은 싹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카진스키를 체포한 것으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케이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카진스키의 선언문이다. 그는 사람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그 선언문을 유력지에 게재하려고 했다. 선언문에 담긴 내용이 카진스키를 움직인 동력이었다. 카진스키는 체포됐지만 카진스키의 선언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테크놀로지의 끝에 뭐가 있는지 보라"던 그의 화두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낳고 있을 뿐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고 살려면 테크놀로지를 포기할 수 없다."면서 자포자기하든지 "테크놀로지가 더 발달하면 나아지지 않겠나?"라는 근거없는 전망을 늘어놓으며 점점 커지는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카진스키는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고 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카진스키가 열여섯에 하버드를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최연소 조교수가 되어 놀라운 수학적 업적을 마구 쏟아낼 때 주변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야말로 앞날창창 탄탄대로의 인생. 하지만 카진스키는 얼마 후 모두 부러워하는 그 자리를 내팽개치고 몬타나의 숲으로 들어간다. 카진스키가 대학에서 뭘 보고 느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선언문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식인들의 지식탐구나 사회운동가의 활동은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목표와 정반대로 가고 있었고 아마도 그는 자기 일(수학)이 전체시스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 행위와 목표 사이에서 모순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작업들 전부가 세상을 망치는데 응용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진스키는 돈이나 명예 때문에 자기모순을 참아내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정직했고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삼림벌채·개발사업 등으로 자기 거처마저 파괴될 위험에 처하자 산업테크놀로지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테러가 아니라 선언문이다. 그는 자기 혼자 시스템 전체와 대적하는 건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카진스키의 진짜 목적은 선언문이고 테러는 그저 대중의 주의를 선언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쇼였을 것이다.

필자가 카진스키를 거론하는 것은 카진스키를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라 카진스키를 통해 발현된 어떤 생각과 대결하기 위해 그의 포지션과 그가 가진 생각의 요점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카진스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위험한 폭발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실비오 게젤이 제시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 The Natural Economic Order>의 장점을 더 뚜렷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카진스키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카진스키가 되어야 한다.(과학자들한테 폭탄을 보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카진스키가 무얼 보고 듣고 느꼈는지 카진스키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사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카진스키가 가진 생각, 즉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상당수가 공감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카진스키의 생각이 싹튼 바로 그 토양에서 우리도 살고 있다. 우리도 카진스키처럼 생각한다. 테크놀로지와 그에 기반한 사회제도들이 점점 우리 삶을 제한하고 숨막히게 한다는 것. 우리는 삶의 편리를 위해 기계를 발명했지만 그 기계가 만들어낸 시스템의 노예이기도 하다는 것.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자연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있고 이런 경향은 평범한 삶마저 위협할 정도로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 폭탄테러는 굳이 카진스키가 아니라도 다른 누구, 그러니까 존이나 메리 아니면 철수나 나카무라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카진스키를 그저 미치광이로 몰고 안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런 범죄를 사법적으로 처리하는 것 외의 영역에서 살필 것은 "누가 그런 짓을 했냐?"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떤 토양에서 싹을 틔웠는가?"다. 우리는 그 토양을 살펴본 다음에 개입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카진스키의 생각 역시 카진스키 자신이 비판했던 좌파주의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현실에 대한 기계적인 반작용'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우리는 카진스키의 생각을 검토하여 오류가 있는지 밝히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렇다면 카진스키가 찾아낸 답을 살펴보자. 카진스키는 테크놀로지를 사회문제의 근원으로 본다. 그의 테러는 그 전제 위에 서 있다. 테크놀로지가 사회문제의 근원이라면 테크놀로지를 파괴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틀렸다. 사회문제의 근원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경제시스템(화폐제도와 토지제도)의 결함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그 경제시스템에서 나온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카진스키의 문제의식은 특히 중앙집권적 형태의 테크놀로지에 주목한다. 중앙집권적 테크놀로지가 사람이 살면서 거쳐가야 할 자연스런 권력과정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 하지만 테크놀로지가 중앙집권적 형태를 취하는 건 경제시스템의 결함이 테크놀로지를 그런 형태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대강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돈 액면가가 불변하여 기본이자가 발생하고 경제주체는 그에 따라 단기적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유도된다. 중앙정부는 기업들과 거대사업을 기획한다. 사업 크기를 키워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그 거대사업을 따내는 몇 개의 기업이 재벌로 성장한다.) 거대사업을 위해서 거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거대한 발전방식이 필요하고, 거대한 기계가 필요하고, 거대한 노동력이 필요하고, 거대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거주시키는 거대도시가 필요하고, 이 사람들을 이런 부자연스러운 환경에 적응시키고 다루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교육·미디어가 필요하고, 소수의견을 합법적으로 묵살시키기 위한 투표제가 필요하고, 부적응자를 걷어내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의료·법률·치안이 필요해지고 또 다른 거대정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거대군대·거대무기가 필요해진다. 이 모든 흐름은 각 개인의 힘을 한곳에 집중시킨다. 이 과정에서 카진스키가 지적한 대로 사람이 체험해야 할 자연스런 권력과정과 자율성은 훼손된다.

우리가 실비오 게젤의 제안대로 화폐제도와 토지제도의 결함을 바로잡는다면 그 결함에서 태어난 중앙집권적 테크놀로지도 다른 형태로 바뀔 것이다. 땅이 지대를 낳지 않고 돈이 이자를 낳지 않으며 제대로 순환한다면, 즉 땅이 모두의 것이 되고 돈이 분산된다면 산업도 분산화되고, 테크놀로지도 분산화되고, 그 산업과 테크놀로지를 지탱하는 에너지발전방식도 분산화되고, 정치권력·경제권력도 분산되고, 인구도 분산되고, 도시구조도 분산화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갈등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에 그것들을 처리하는데 필요했던 복잡한 문화와 제도 역시 단순해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돈이 경제주체를 장기적으로 더 적은 감가상각으로 유도하므로 테크놀로지가 사람과 자연에 봉사하게 된다. 더 적은 감가상각을 지향하는 것 때문에 자원을 아끼고, 자연을 보호하며, 테크놀로지의 작동방식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게 된다. 수동형태양에너지passive solar energy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일부가 그런 테크놀로지의 원형일 수 있다.1

카진스키는 테크놀로지 배후에 있는 경제시스템의 결함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테크놀로지의 가능성도 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목표로 가는 올바른 수단을 찾지 못했다. 카진스키가 말한 역사법칙을 보면 그가 잘못된 길로 유도된 까닭을 알 수 있다.(카진스키의 역사법칙은 그가 가진 생각의 토대이므로 잘 살펴봐야 한다.) 필자는 그가 제시한 제1원칙·제2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각 사회현상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 같은 레벨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나 결과가 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선행하는 원인을 건드린다면 거기에 종속된 나머지 요소들도 변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일으키려고 모든 걸 다 일일히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행요소, 그러니까 첫번째 도미노는 아주 사소해보이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아주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릴 수 있다면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허리케인을 만들 것이다. 제3원칙도 동의하지 않는다. 예측은 완전히 같은 조건의 사례를 갖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비슷한 사례 여러가지에서 의미있는 맥락을 찾고 그 맥락으로 유추하여 충분히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 제3원칙은 카진스키 사유방식이 현대과학이 신봉하는 실험연구방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조건에서 정해진 변수를 넣고 그 결과를 확인해야 올바른 지식을 알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아마 이 제3원칙을 만들었을 것이다.(그가 수학자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도 일급 수학자였다.) 제4원칙·제5원칙도 동의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는 미리 설계할 수 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의 조건만 사람의 본성에 맞게 세팅하면 나머지는 각 경제주체의 상호작용으로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카진스키는 기계를 파괴하자고 했지만 그의 사유방식은 기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현상과 현상을 유기적으로 잇는 고리들을 놓쳤고 기계처럼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다.

하지만 카진스키 주장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일리가 있다. 특히 좌파주의2에 대한 지적은 예리하다. 자연스런 권력과정·자율성이 침해당한 것에 대한 기계적인 반작용으로 좌파주의가 나왔다는 주장은 곱씹어 볼만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운동들은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 기존 사회운동이 사회문제의 근원을 건드리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카진스키가 말한 것처럼 기계적인 반작용 그 이상이 아닐 것이다. 대중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화폐제도 토지제도의 결함을 바로잡지 않는 한 그 어떤 정권교체나 정책도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대중들의 분노를 밑천삼아 자기들의 정치적 영향력만 키우려는 사람들을 주의하라. 오히려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외쳐야 한다. "그래서 당신들은 우리한테 무얼 해줄 수 있소? 당신들이 내놓은 해법은 모두 진부하오. 당신이 전에 해먹던 사람보다 착하다는 말도 이제 믿지 않겠소. 화폐제도 토지제도의 결함은 당신 역시 타락시킬 게 뻔하니까. 그러니 개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돈(화폐제도)과 땅(토지제도)을 개혁하시오. 게젤의 명료한 제안대로 돈순환과 땅을 국유화하시오. 지금처럼 사람들이 제도적인 구걸(복지)을 하게 만들지 말고 언젠가 부작용을 낳을 스테로이드(인위적인 경기부양)만 투여하지 말고 공정한 게임의 룰을 부여하란 말이오. 그게 아니면 당신 입을 꿰매버리고 우리들이 하겠소."

기존 경제시스템 결함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래서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테크놀로지가 지금처럼 계속 세를 넓혀간다면 카진스키의 예언은 불길하게도 거의 모든 측면에서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것이다. 카진스키가 좌파주의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 보여준 통찰력은 수학적 사고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그의 살아있는 경험이나 관찰에서 추론됐을 것이다. 그의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어떤 것은 기름진 땅에서 자라났고 어떤 것은 황무지에서 자라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카진스키가 비판한 좌파의 "지나친 사회화"는 양날의 검이다. 사람들이 사회문제나 정치에 더 많이 관심을 갖는 것은 사회유기체의 면역반응social immune response이다. 이런 경향 자체를 억압해서는 안되는데, 그 까닭은 사회운동이 올바른 방향을 찾았을 때 이 소위 "지나친 사회화" 경향이 세상을 바로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알러지성비염 환자가 항히스타민제로 그 면역반응을 억제할 때 제대로 낫지 않고 증상이 만성화되며, 오히려 그 환자 섭생을 바꿔서 면역력이 자기 몸을 복구하는 방향으로 올바르게 유도해야 근본적으로 치유되는 것과 같다. 면역반응 자체를 억제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지나친 사회화"경향은 실비오 게젤의 개혁안이 실행되어 사회가 근본적으로 건강해질 때 비로소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그런 면역반응이 더이상 필요없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다. 더이상 치유해야할 병이 사회유기체에 남아있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 때 개인화될 것이다. 노자老子는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모르는 세상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그런 세상이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로 완성될 것이다.

Creative Commons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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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양전지로 대표되는 능동형태양에너지active solar energy는 기존 테크놀로지와 마찬가지로 중앙집중형이다. 따라서 기존 테크놀로지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건 올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수동형태양에너지나 적정기술의 단서는 세계 각국의 전통건축물·전통도구, 동식물 서식환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카진스키는 이 용어를 전통적인 맑스주의를 뜻하는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기존 사회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고 있음을 주의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2014/09/26 22:14 2014/09/26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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