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탬프머니

칼럼

얼마전 홍동 마을활력소에서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홍동 분들은 지역경제의 선순환을 유도하려고 몇 차례 지역화폐를 시도하고 있다. 돈에 주목하는 것은, 이곳의 사회운동이 올바른 방향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사회문제의 뿌리는 상호관계가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것이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돈이기 때문에, 돈을 제대로 세팅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다.

 

필자는 이 강의에서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감가화폐(스탬프머니)를 지역화폐로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감가화폐 사례들을 끄집어냈다.

 

고대이집트에서는 농사를 지어서 곡식이 나오면 창고에 맡겼는데 창고에서 그 곡식 맡겼다는 증거로 곡식의 양과 보관한 날짜를 적은 도자기조각을 주었다. 그 도자기조각은 돈처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면 도자기조각 10개를 모아서 창고에 가져가도 9개분의 곡식만 받을 수 있었는데 도자기조각 1개는 보관료로 창고지기가 가져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자기조각을 쌓아두지 않고 바로 농지·관개시스템·건축물에 투자를 했고 그래서 이집트 경제는 피라미드같은 엄청난 유적을 남길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 시스템은 1000년동안 유지되다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폐기됐다.

 

중세유럽에서도 1150~1300년에 감가화폐를 썼다. 은자라는 걸 돈으로 썼는데 정부가 6개월~8개월마다 한 번씩 돈을 모두 거둬서 다시 찍어줬다. 다시 찍어낼 때 은의 일부는 다시 찍어내는 비용으로 거둬들였고, 그렇게 은함량을 줄여서 찍어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다시 거둬들이기 전에 빨리 소비해버렸고 그래서 경제가 잘 돌아갔다. 그 시대에 만든 건물 중에 유명한 교회건축물이 많다.

 

1930년대는 화폐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시기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는 유럽까지 휩쓸어버리는데 이 때 실비오 게젤의 제자들이 스탬프머니를 이용해서 지역경제를 되살린다. 독일 슈바넨킬헨에는 탄광이 있었는데 대공황 때문에 문을 닫는다. 이에 탄광 주인 헤벡커는 스탬프머니 베라를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노동자 임금으로 지불한다. 헤벡커는 베라를 발행하면서 지역상점에 노동자들이 그 돈 가져오면 받아달라고 했는데 상점들은 못받아준다고 했고 그래서 헤벡커 스스로 가게를 만들게 된다. 노동자들은 결국 헤벡커 가게만 이용하게 되자 지역상점들도 어쩔 수 없이 베라를 받아주게 된다. 그리고 지역상점들이 도매업자를 설득하고 도매업자는 생산자를 설득하고 생산자는 베라로 다른 걸 못 사니까 결국 슈바넨킬헨 석탄을 사게 되어 경제의 선순환이 만들어지고 지역경제가 살아났다. 이걸 보고 독일 전역 2000개 기업에서 스탬프머니를 쓰게 된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 뵈르글에서 사용한 스탬프머니 노동증명서.


 

1930년대 오스트리아 뵈르글의 사례는 가장 주목할만한 사례다. 대공항으로 전세계경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뵈르글의 시장 운터굿겐베르거는 실비오 게젤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증명서라는 스탬프머니를 발행하여 도시를 되살린다. 당시 뵈르글의 경제회생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전세계에서 뵈르글의 성공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한다.

 

뵈르글은 마을인구4000명 중 500명이 실업자였고 1000명이 예비실업자였다. 그러던 것이 노동증명서를 발행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이 노동증명서는 발행된 지 24시간만에 발행장소로 돌아올 정도로 순환속도가 빨랐다.한달마다 액면가 1%에 해당하는 인지를 붙여야 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붙여야 하는 시간이 오기 전에 돈을 다 써 버리려고 했고 그래서 순환속도가 일반돈보다 14배나 빨랐다는 것. 이 돈 때문에 뵈르글은 오스트리아 최초로 완전고용을 이루고 도시시설은 모두 보수되고 시의 부채도 모두 갚게 된다. 뵈르글의 놀라운 성공을 목격하고 오스트리아 200개 도시도 스탬프머니를 도입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은 국가통화시스템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결국 스탬프머니를 금지하고 운터굿겐베르거를 국가반역죄로 고소한다. 그 후 뵈르글 경제는 다시 쇠락하였고 실업률은 예전수준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은 1930년대의 기억을 묻어버렸고 오스트리아는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938년 나치독일에 병합되었다.

 

뵈르글의 경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봐야 한다. 지역공동체에 유익한 화폐운동을 중앙은행 또는 중앙정부가 억압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 사례에서 충분히 배워야 한다.

 

뵈르글에서 사용한 스탬프머니는 지금도 유효하다. 뵈르글이 스탬프머니를 발행할 때 상황은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킴가우어라는 스탬프머니를 사용하고 있다.

 

킴가우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노동증명서는 매달 감가상각되는 반면, 킴가우어는 분기마다 감가상각된다. 이에 비해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스탬프머니는 아래와 같이 매주마다 감가상각된다.

 

실비오 게젤이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 소개한 스탬프머니


 

감가상각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할수록 경제는 더 섬세하게 안정된 흐름을 유지할 것이다. 분기마다 감가하는 것보다는 달마다 감가하는 것이, 달마다 감가하는 것보다는 주마다 감가하는 것이 경제의 기복이 줄어들 것이다. (경제위기의 정도가 심할 수록 감가주기를 좁혀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스탬프 붙이는 일이 너무 잦으면 사용할 때 번거로움을 느낄 수도 있으니 뵈르글 노동증명서처럼 달마다 감가하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킴가우어는 기존화폐와 환전이 가능하다. 물론 액면가5%의 수수료가 붙긴 하지만. 국가통화에 빗대면 고정환율제라고 할 수 있다. 지역화폐와 기존화폐 환전은 가급적 금지해야 한다.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어쩔 수 없이 환전을 해야 한다면 킴가우어처럼 고정환율로 해야 하고 당연히 지역화폐를 기존화폐로 전환할 때 수수료를 물려서 그 전환을 억제해야 할 것이다. 수수료비용에도 불구하고 그 돈이 만들어내는 교환의 이익은 그 수수료 비용을 훨씬 더 뛰어넘게 된다.

 

필자는 뵈르글 노동증명서를 킴가우어보다 높이 평가하는데 노동증명서는 환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슈바넨킬헨의 베라는 탄광을 담보로 발행하였지만 뵈르글의 노동증명서는 담보가 없었다. 뵈르글의 사례는 실비오 게젤의 가르침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돈에 안전성을 부여하는 것은 돈재료나 특정담보물이 아니라 노동분화가 만들어내는 상품 그 자체다. 상품은 교환되어야 하는 강제에 종속되므로 돈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돈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공동체의 약속이며 담보물이 아니다. 이 점을 뵈르글은 정확히 보여주었다.

 

뵈르글의 성공은 운터굿겐베르거의 리더십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방법 말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뵈르글은 지역화폐를 뭔가로 담보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뵈르글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무無에서 시작해야 했고 그래서 어떤 타협도 없이 “과연 이렇게 해서 될까?”라는 의심도 없이 게젤의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역경제가 말 그대로 초토화된 곳에 감가화폐를 도입해 볼 필요가 있다. 중앙정부에 손 벌리지 못할 때 지역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감가화폐를 도입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은, 사람들의 노동·상품은 남아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교환되지 않고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환매개물 역할을 하는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한 것은 돈이 순환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순환하지 않는 건 돈의 액면가가 불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돈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순환할 수 밖에 없는 돈, 액면가가 고정불변하는 대신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는 돈, 감가화폐를 만드는 것이다. 오늘 10만원이 1달 후 9만원이 된다면 1달이 되기 전에 1만원은 소비될 것이다. 누구나 감가상각 손실을 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여태까지는 돈의 액면가가 불변한 것을 당연시해왔다. 하지만 세상재화가 다 감가상각되는 판에 돈 혼자 액면가가 보존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 돈과 상품 사이의 불균형이 교환을 억제하게 된다. 돈도 상품처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어야만 거침없이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것으로 막힘없는 경제흐름이 만들어진다.

 

한 지역이 성공하면 다른 지역들도 따라할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이던 지역이 멋지게 부활하면 그 지역을 내려보던 나머지 지역들도 서둘러 감가화폐를 도입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감가화폐는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돈이란 무엇인가?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 돈은 네트워크다. 돈은 교환매개물이다. 돈은 교환을 촉진해야 하고 방해하면 안된다. 따라서 돈은 이런 기능을 충족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감가되어야 한다. ‘액면가가 불변하는 돈’을 쓰면서 통장에 찍힌 그 눈꼽만한 이자를 보고 흐뭇해하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여러분들이여, 그 이자야말로 여러분들 노동·상품의 교환을 방해하고 부의 생산을 억제하며 여러분의 노동대가를 착취하는 큰 도둑임을 알라.

 

여러분은 ‘나쁜 돈’을 쓰면서, 그 ‘나쁜 돈’이 만들어낸 지옥에서 허덕이면서 정부에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한다. 환자가 약을 달라고 하는 것은 병이 있기 때문이고, 병이 나으면 약은 더이상 먹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난 여기서 이야기한다. 병의 뿌리인 돈을 개혁하라. 돈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하면 돈 자체가 사회적 연결망,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 다른 소모적인 사회적 장치들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돈의 결함을 보수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모두를 구할 것이다.

Creative Commons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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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4 23:47 2014/12/1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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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홀씨 2014/12/15 21:33 URL EDIT REPLY
은행의 기능을 한정시켜야 한다는 말로 들리네요.
중앙은행이 아닌 '지방은행'은 이 주장대로 '축장기능'에 감가상각을 하면 되지만 일반은행(시중은행)은 사업자금을 금리목적으로 대출하면 안된다는 말인가요?그것도 아니면 '지방은행'을 대신할 대안은행을 농촌마을에 설립하되, 공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설립해야 된다는 말인가요? 은행을 설립하려면 회사설립처럼 자본금(자산)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모아야 하는가요? 신협처럼 출자금으로 은행(마을금고)을 설립할 수 있나요? 이처럼 마을 고유의 마을금고- '대안은행?'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만 주류 시장경제가 내놓은 은행의 공적기능(소위 자본금공급)은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요? 그리고 현재 마을금고-'대안은행?'은 법적으로도 실현 가능한가요? 월급쟁이나 노동자들도 월급을 털어 마을금고(대안은행)을 설립할 수 있나요?
레인메이커 | 2014/12/30 15:09 URL EDIT
은행의 기능을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돈의 기능을 다시 세팅합니다.
감가화폐로 세팅하는 것이구요
감가화폐를 쓰면 은행의 기능은 자연스럽게 심플해집니다
기존은행의 번잡한 기능은 기존화폐의 결함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자연스런 경제질서> 파트Ⅳ. 공짜돈, 돈은 어떠해야 하는가 5. 공짜돈은 어떻게 판단될까 B.현금출납원 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폐운동은 크게 정공법과 게릴라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공법은 http://blog.jinbo.net/silviogesell/47 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고, 주류시장경제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게릴라전에 해당하는 게 지역화폐인데 지역경제를 방어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역화폐 하는 데 따로 돈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인쇄비는 들어가겠지만)
중요한 건 공동체구성원의 약속이지요.
물론, 구성원들 참여를 더 끌어내려고 지역화폐를 기존화폐나 실물재화로 담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구성원들이 아직 돈이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실비오 게젤의 경제이론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역경제주체들이 상품을 많이 만들어낼 수록
그것들을 교환하기 위해서 돈이 더 많이 필요해집니다.
지역화폐는 그만큼 발행하면 되구요.
평균물가가 변동하지 않게 돈의 양을 잘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교환대상이 되는 상품의 가격과 양을 조사할 필요가 있고
첫번째 조사한 평균물가와 두번재 조사한 평균물가를 비교하여
얼마나 오르거나 내렸는지 보고 그에 따라 돈의 양을 조절해야겠죠
작은 공동체에서 감가화폐를 시작할 때 통화량은 어느 정도는 경험에 의해서 결정될 겁니다. 3달 정도 경과를 관찰하다가 처음 발행량이 너무 많으면 줄이면 되고 부족하면 늘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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