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 코드로 본 나는 가수다.

[잡생각]

잡설을 하나 푼다. MBC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 대한 말들이 많다. 나도 한 사람의 TV 마니아(?)로서 한 마디해야 겠다. 먼저 나는 이 블로그에 <슈퍼스타K2>, <세시봉>에 대한 글을 올렸었다. 두 글에서 오늘날 문화산업에 전형적인 도식schema -- 특히, 이야기 창출 능력과 제작 과정을 전면화하는 현상, 즉 사적인 이야기의 공론화, 그 이면에 있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을 간략히 묘사한 적이 있다. 나 자신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복잡한 내용이 얽혀있는 일련의 프로그램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앞의 두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나는 <나가수>도 앞선 글에서 밝힌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나가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가지 점을 메모 삼아 -- 말 그대로 메모!! -- 언급해 두고자 한다. 문제는 왜 이렇게 대중들이 분노하는가이다. 이는 '장르', '경쟁', '눈물', '권위', '멘토', '참여'라는 주제로 요약된다. 먼저 밝혀두자면, 여기서 풀어내는 글은 나의 고유한 창작물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담소를 내 식대로 짧고, '거칠게' 정리한 것이다. 쉽게 말해, 메모 수준이다. 그리고 내가 쓰는 축약적인 사투리가 많아 눈에 거슬릴 것이다. 양해 바란다.

1. 장르

<나가수>와 관련한 시중의 논평 가운데, 프로그램의 성격이 애매하다는 논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나가수>가 서바이벌 오디션과 리얼 버라이어티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다는 거다. 더 정확히는 <나가수>는 가요+토크쇼+오디션+리어리티를 합쳤는데, 어느 쪽인지 모호하다. 내가 볼 때도, 프로그램 자체가 성격이 무척 애매하다. 짐작컨대, 기본적으로 <나가수>의 형식은 서바이벌 오디션인데, 실제 녹화 현장은 리얼 버라어티로 진행되었을 공산이 크다. 이렇게 보면, 김건모가 탈락했을 때, 김건모나 진행자인 이소라, 김영희 PD의 반응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련의 반응은 마치 <1박2일>과 <무한도전>에서 강호동과 유재석 등이 제작진과 게임 규칙을 협상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포멧은 '지나치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따랐다. 이런 과도한 오디션'화'는 프로그램의 흥미를 유발했지만, 예능 버라이어티의 재미 -- 즉, 규칙을 넘나드는 묘미는 제약했다. 물론, 요즘 대다수 프로그램이 이런 장르 간 혼합의 형태를 띤다. 한 가지 포멧만을 가지고서는 변덕스러운 시청자의 구미에 소구할 수 없고, 또한 어느 정도 실험을 하면서 시간이 흘러야 포멧이 안정화된다. 이는 미디어 생산물이 위험을 분산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이런 형태는 <무한도전>이 <무모한 도전>에서부터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 한국형 리얼 버라이어티로 정착되는 과정을 상기해보면 명확해진다. 덧붙여, <나가수>를 비롯해 <신입사원>, <위대한 탄생>으로 이어지는 최근 MBC의 예능 흐름이 오디션의 형식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이른 포멧은 <무한도전>과 <1박2일>, <남자의 자격>류의 '미션' 버라이어티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가수>는 균형과 초점을 잃었다. <일밤>의 낮은 시청률이 부른 과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럼 오디션 규범 -- 승자진출, 패자탈락 -- 이 과도했다는 것만으로, <나가수>의 '약속 파기'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 우회해보자.

2. 경쟁

<나가수> 대한 시청자 반응은 대부분 규칙 파기 -- 시청자와의 약속 -- 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불공정 사회'의 전형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논의를 일단 받아들여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나가수>, 혹은 오디션 프로그램 일반은 경쟁이라는 요소를 '전경화'한다. 그것도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서바이벌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오디션'화나 '서바이벌화'라고 하고 싶다. 이는 이런 서바벌(문화)의 전경화를 한국 사회에 일상적으로 전면화된 경쟁, 그리고 그것을 내면화한 사람들을 반영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슈퍼스타K>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반화된 생존문화가 버티고 있다. 여하튼, 이런 경쟁 규범의 내면화가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의 인기 비결이다. 즉, 대중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어떤 내면적 도식에 잘 들어맞는 프로그램 형식이라는 거다. 물론, 이런 경쟁 규범을 비판하는 포지션도, 이런 내면화 자체는 그리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수>가 약속을 어긴데 대한 비판은 왜 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나가수>를 통해 대중들이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경쟁 규범의 이상ideal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서바이벌, 혹은 경쟁 규칙이 부조리하고, 부와 권력 등에 따라 공정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중은 사회적 이상ideal을 공적인 장, 예를 들어 정치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인 대중매체에서 구현하게 된다. 연예인이 '사인'이 아닌 '공인'이 된 한국적 현실에서, <나가수>는 일종의 공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고, 이에 우리는 이상적인 완벽한 -- 그러니까, 공정한 -- 규칙, 그리고 경쟁을 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가수>는 대중의 이상을 배반한 것이다. 말은 어렵게 꼬았는데, 간단히 우리는 축구 경기에서 승패가 분명히 갈리고, 패자가 '아름답게' 떠나길 바라는 것이다. 마치, 오심도 축구경기의 한 부분이듯이, 경기를 보면서 그 속의 우여곡절을 즐기긴 하지만, 여하튼 축구는 승패가 갈리는 경기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선수와 감독, 심판이 뭔가 숙덕거리더니 승패를 바꿔버린 건데, 그럼 자연스레 관객들은 항의 하지 않겠는가? 낙장불입인데! 이게 우리가 가진 상식적 감각이다. 그렇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규칙'은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협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가수>나 일반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규칙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경직적인 반응을 보일까? 사실, MBC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위대한 탄생>을 보면, 제작진과 진행자들이 계속해서 참여자들에게 패자부활의 기회를 자의적으로 부여한다. 그에 대해 대부분 토를 달지 않고 우리는 편안하게 시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덧, 오늘 식사 중에 어떤 분이, 탈락에 대한 '가학증' 비스무리한 게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성공의 집착이 아닌 탈락에 대한 엄격함을 이렇게도 볼 수 있을 듯하다).
 
3. 권위

흔히들, 요즘을 탈권위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한 측면이다. 사실과 관계없이, 탈권위주의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노무현'이듯이 말이다. '노무현'을 꺼내든 이유는 단순하다. 탈권위주의 자체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는 유연성과 경쟁뿐만 아니라, 기존의 권위체계의 경직성을 해체하면서 '반권위', 혹은 '자율'을 사회적으로 유포한다. 예를 들어, 이는 복지국가와 관료제를 해체하는 논리였고, 한국에서는 1990년대 미국식 경영방식(과 담론, 가령 팀제와 창의력, 벤처 등)이 도입되는 주요 논리였다. 물론, 여기서의 명분은 이런 것들이 생산성과 효율을 이끈다는 것이다. 넓게 말해, 이런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포스트모더니티' -- 앞선 글에서 나는 이것이 유연적 축적체제를 깔고 있다고 봤다 -- 라고 칭했고, 그것이 취한 문화적 형태를 '포스트모던'이라고 했다. 이런 포스트모던한 현상이 잘 드러나는 영역이 미디어이다. 마찬가지로, 탈권위와 그에 대한 반응이 TV 생산물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시트콤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전혀 권위적인 인물이 아닐뿐더러 희화된 가부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권위로부터의 탈주는 일정한 댓가를 요구한다. 그러한 댓가 중 한 가지, 즉 탈권위의 보편화는 '히스테릭' 한 반응을 수반한다. 대표적으로 국내의 막장극을 들 수 있는데, <아내의 유혹>에서 끊임없는 복수의 변주, 그리고 극중 인물들은 엄청난 고음을 퍼붓는다. <아내의 유혹>은 사실, 탈권위 상태에서 어떻게든 일시적으로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반응도 있다. 이것은 미국 드라마 <닥터하우스>와 한국 드라마 <싸인>에서 잘 드러난다. <탁터하우스>의 하우스와 <싸인>의 박신양은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카리스마를 구현한다. 이런 인물, 즉 주체가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전문가는 탈권위적 상태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닥터하우스>에서 하우스가 없으면, 나름 전문가인 의사들도 헤메고 만다. 하우스만이 격랑의 환경을 뚫고 목표를 성취하는 선장이 될 수 있다. 좀 지루했지만, 다시 <나가수>로 돌아오면, 여기에는 <슈퍼스타K>의 이승철, <위대한 탄생>의 방시혁이 없다. 이런 독설 캐릭터가 어떤 권위를 구현해서, 우리를 대신해 참여자(혹은 가수)을 평가해주어야 하는데, <나가수>는 이미 검증된 훌륭한 가수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평가를 넘어서, 어떻게 야단칠 것인지, 이런 장치가 전혀 없다. 단지 5백 명의 시청자 평가단이 있을 뿐인데, 이들은 어떠한 대표성도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가수>는 이들을 배경으로만 편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대중이 그만한 가수들을 평가할 음악적 역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감상할뿐이다. 하지만, 질서를 세워주는 어떤 카리스카적 권위의 구현체가 없을 때, 시청자는 스스로 판관이 되고자 한다.

4. 멘토

탈권위 시대의 권위를 연장하면, '의존의 문화'가 버티고 있다. 이는 <나가수>가 아닌, <위대한 탄생>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위대한 탄생>에는 특이하게 멘토 제도가 등장하는데, 멘토는 의존문화의 한 종류이다. 사실, 멘토와 멘티는 원래 심리 코치 기법 중에 하나로서, 2천 년대 들어 국내 기업의 사회화 기법으로 도입되었고, 경영담론이 일반회 되면서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나아가 멘토 제도 자체가 노동자들의 기업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정신생활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장치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멘토를 '원하는가?' 먼저, 보다 광범위한 의존 문화의 형성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메커니즘만 언급하자면, 우리는 이를 교육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유치원부터 나에게 필요한 지식과 조언, 기술을 외부에서 구매하는 문화에 이제 익숙하다. 대표적인 기제가 학원과 과외를 통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지어 대학생들 학부 학점을 위해서 과외에 의존한다. 물론, 입사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 중에도 우리는 학원을 통해 전문지식을 구매한다. 이는 어떤 숙련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장을 의존하는 습관을 만들어낸다. 내가 굳이 학원을 언급한 것은 이런 전문지식 -- 여기서는 가수가 되는 자격 -- 을 갖추기 위해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현실 때문이다. 지식과 숙련은, 과거처럼 '안정된' 학교 제도, 가족, 지역사회, 혹은 기업 위계 속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급변하는 환경에서 지식과 숙련을 구매한다. 예전에 <대학가요제>를 비롯한 가요제 출신들은, 방송 다음날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들이 요즘 기준으로 하면, 과연 가수로 데뷰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아마, 엄청난 독설을 듣고, 연습생 생활을 거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의존의 문화는 단순히 전문 지식과 숙련 전수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좀 심리학적인 해석이지만, '카리스카적' 권위(자)를 갈구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 존재를 원하는 광범위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탈권위 시대의 이면, 즉 불안한 시대에 정체성의 안정의 추구 경향이다. 개인은 오늘날, 불안정한 시대를 견디면서 뭔가 영웅같은 존재를 갈구한다고나 할까. 여하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별적' 생존 문화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전문적 지식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형태로 길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역설적으로 어떤 카리스마적 권위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나가수>는 어떤 권위, 어떤 멘토, 어떤 전문가도 없다. 왜냐하면 참여 가수들 자체가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할 수는 없지 않는가?

5. 참여

조금 더 나아가 보자. 탈권위시대는 '참여'를 미덕으로 삼는다(엄밀히 얘기하면, 여기에 '민주'를 덧붙일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신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가 애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선택'과 '참여'이다. 이는 소비자 선택(참여)에서부터 시민의 선택(참여), 국민의 선택(참여), 시청자 선택(참여), 채널 선택 등 끝도 없다. 일반적으로, TV 생산물은 시청자를 겨냥하지만, 최근 경향은 시청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산과정에 참여시킨다. 이 과정에서 독특한 (도덕)감정, 느낌이 동원된다. 그러니까, <사랑의 리퀘스트>에 우리가 전화를 걸면서, 뭔가 착한 일을 했다고 느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슈퍼스타K>에 투표하면서 소비자 주권을 실현한, 내가 선택한 느낌을 받는다. <나가수>는 연령대별 500명의 시청자가 참여해 탈락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들의 기준은 라이브 현장에서 받은 총체적인 느낌이다. 과거에 우리는 고음을 질러대면 노래를 잘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라이브를 잘해야 노래를 잘 한다고 본다. <슈퍼스타K>와 <위대한 탄생>은 여기에, 약간의 전문적 지식, 예를 들어, 감정표현과 가사 이해라는 요소도 첨가한다. 그런데 <나가수>는 단지, 이들은 가수가 노래할 때, 감동적인 표정이 화면에 비춰질 뿐이고, 퇴장하면서 간략한 인터뷰만 할뿐이다. 이들의 식견은 없고, 단지 모호한 감동과 투표라는 양화된 권리만 존재한다. 그리고, <나가수>는 <슈퍼스타K>와 달리, 투표 결과가 방송 전에 정해져 있으므로, 이런 시청자 참여조차 매우 취약하다. 여하튼, <나가수>는 참여라는 코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시청자는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는 감동했어요, 라는 수동적 반응을 중심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이런 부분적인 참여는 어쩌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미끼일 것이다. 시청자 참여를 가장한 동원일뿐이다. 탈권위주의 시대의 참여란 이만큼 빈약하다. 당연히, 대중들이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고, 우리는 참여라는 행위를 통해, 모종의 즐거움을 얻는데, 즉 뭔가 내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참여가 좌절당한 보상이든 뭐든간에, 이상적인 공적 장에의 참여 -- 혹은 참견 -- 행위이다. 물론, 이를 일련의 TV 생산물이 이용하지만 말이다.

6. 눈물

눈물은 <나가수>를 비롯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감정 형성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모든 TV 생산물이 특정한 '눈물'을 동원한다. 몇 가지만 언급하면, 고생담 계열과 성공담 계열이 있는데 이는 주로 토크쇼, 오디션 프로그램, <인생극장>류의 다큐에서 많이 활용된다. 회고담 혹은 향수 계열은 <세시봉>, <7080콘서트>, <가요무대> 등에서 지배적이다. 동정에 의한 눈물은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두드러지고, 여기에다가 대놓고 슬픈 눈물을 이용하는 경우는 <아름다운 동행>이나 <인간극장>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투쟁 시에는 분노의 눈물도 필요하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눈물'을 동원하는 것을 어떤 이는 '청승'의 정조라고도 하는데, 즉 우리가 한 동안 '쿨함'을 즐기는 듯하지만 실상은 '쿨한 척'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청승이든 뭐든, 이런 감정을 짜내려면(즉, 만들어 내려면) 일정한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나가수>는 이런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제 특히, 충분한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
이런 배경의 창출은 완성품이 아닌 제조 과정을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다. 7명의 가수, 그들을 도와주는 음악인, 7명의 코미디언 매니저가 엮어내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는 무엇보다 방송시간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고, 두 번째 경연(공연이 아니다!)에서, <신입사원> 코너를 잘라내고, 약 3시간 동안 <나가수>를 방영했을 때는 좀 나아졌다. 시청자가 아무리, 엘리지의 정서를 가지고 있더라도, 툭치면 툭하고 눈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소라의 히스테릭한 반응과 김제동의 눈물을 제한된 정보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반응이 찌질해 보일 수 밖에 없다. <나가수>가 실패한 또 하나는 오신션 경쟁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음악, 그리고 인간적 감동 -- 이건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의 전매특허이다 -- 에 대한 감동을 중심으로 한 점이다. 이건 사실, 숙련된 음악인에 대한 감동일텐데, 알다시피 우리 현실은 더 이상 이런 숙련의 시대가 아니다. <나가수>는 오디션의 성공담과 숙련된 음악인의 진성성(무엇보다 음악성)-인간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머문다. 그렇다면, 성공담의 눈물 -- 이미 성공한 가수들이므로 -- 이 아닌 진성정-인간성의 눈물은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정서는, 탈숙련이 보편화된 우리 현실에서 퇴보하는 것이고, 나아가 유사가족주의, 그냥 '끈끈함'이라고 하는 정서를 확인하고 강화한다. 특정 가수들이 인간적, 음악적으로 원숙한 것과 음악인들의 우정이 감동을 준다고 하지만, 이는 어차피 오디션의 형식 속에 있는 것이고, 게다가 현실도 그런 원자화된 오디션 상태에 있다. 남을 밟아야 하는 현실 말이다. 그래서, <나가수>의 눈물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상상하는 것에 대한 눈물, 그러니까 그런 감동은 매우 회고적이고 회한적이다.
 
생각할 수록, <나가수>는 복잡하다. 그래도 요약하자면, <나가수>의 패착은 모호한 장르와 초점,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상의 배반, 카리스마적 권위(자)의 부재, 이상적인 멘토의 부재, 참여라는 환상의 미약함, 눈물의 정당성 부족이다. 이렇게 <나가수>를 끌어들여,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논의를 꺼내는 것은, <나가수>가 실패한 지점, 대중의 분노에서 작동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셨겠지만, 위와 같은 6가지의 코드를 통한 메모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 변동이 <나가수>에 반영되어 있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현실에서 좌절된 무엇을 미디어를 통해 보상받고 투사하려 한다, 는 식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드림 소사이어티'라고나 할까. 이에 대한 생각은 정교해져야 할 것이나, 내가 게을러서 언제 할지는 모르겠다.

 

또다른 중요한 지점은 <나가수>에서 나타나는 현상, 나아가 <슈퍼스타K>와 <위대한 탄생>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논리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조직할 것인가이다. 이를 나는 잠정적으로, 사회의 '오디션화', '서바이벌화'라고 하고 싶다. 나는 '오디션화'를 단순한 현실을 포착하는 용어가 아니라, 경쟁문화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테크닉과 담론, 그리고 그에 구현된 이상적 열망과 관념들이 응집된 어떤 것으로 본다. 이런 오디션화는 어떤 식으로든 밟고 올라서야 하는 현실, 그리고 갈채를 향한 열망과 명망 -- 유명인 -- 을 향한 노력,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적인 '공정한' 경쟁이 있고, 인간적인 '멘토'도 있고, 인간적인 감동도 있는 그런 바램이 투사된 공간, 그리고 공적 영역으로 작동하는 영역 말이다. 나아가  이런 오디션화, 서바이벌화가 창출하는 주체 형태를 질문해야 한다. 위에 제시된 6개 코드가 한 가지 힌트가 될 듯도 하다. 여하튼, 혹자는 팬덤이 정치화될뿐만 아니라, 정치가 팬덤화 된다고 주장했는데, 마찬가지로 우리 일상이 오디션 프로그래을 만들어 냈듯이 역으로 우리의 일상이 점차 오디션화되고 있지 않을까? 말은 길게 했지만, 그냥 우리 머리와 감각 속에 들어와 박히는 도식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반적으로 미디어 -- 원래 미디어란 무엇 사이에 있어서 매개한다는 뜻이다. 미디어는 그래서 끊임없이 '재매개'하는 것이다. -- 가 만들어내는 도식이 사회적으로 유통된다고 볼 때,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지각과 감각, 의미구조를 구성한다고 볼 때, 이에 대한 논의가 좀더 깊이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의미투쟁의 영역이기도 한데, 참여라는 환상이 우리를 거리로 나서게 했지만 반대로 참여가 형식적인 투표행위로 축소되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가 실패한 지점을 우리가 우리, 우리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덧붙여, 거친 내용은 차츰 고치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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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22:59 2011/03/2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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