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8

2009/10/28 18:48

1.

 

 이틀이나 밤을 샜으니 몸이 좋을리 없다.

 

 끙끙대다가, 결국 스터디를 취소했다.

 

 다행(?) 히도 스터디 원들이 그리 싫어하진 않았다.

 

 스터디가 공부하기에는 나쁘지 않은데, 한 스터디원 때문에 은근히 마음에 부담이 크게 된다.

 

 수요일이 스터디이면, 화요일부터는 마음이 무겁다가 수요일 밤이 되면 짐을 확 내려놓은듯

 

 건강상태가 날개를 펴듯 좋아진다.

 

2회독만 끝나면, 다른 스터디를 조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서로 마음도 편하게 해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스터디는 조직하기 힘든걸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이기적인지 모르겠다.

 

결국 그런 사람의 모습도, 세상이 배양하여 만들어낸 모습일텐데 누굴 탓할까.

 

 

 

2.

 

 시험이 대략 250일... 정도 남았다.

 

 한 200일 전까지 전과목을 3회독 예쁘게 해주면 정말 무리는 없을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직장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긴장감을 좀 놓은거 같다.

 

 지난 며칠간.... 좀 부끄럽다.

 

 그 전에도 공부를 너무 잘 하려고 하다보니 오히려 하루에 해야할 결과에 못미치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냥. 남들하는 만큼만 꾸준히 하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자격증을 위한 시험이라고 해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하면 아닌것보다 낫겠지.

 

 결국 마음이 조급한 사람이 늘 자신에게 지는 것이다.

 

 늘 여유로운 마음으로, 공부에 대한 것이나 사람에 대한 것이나 생각해야겠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친구를 만나러 중국에 간다. 11/6-9 까지.

 

 그녀를 만나면 무엇에 있어서든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항상 마음으로 움직여야 무엇이든 열심히 할수 있는 것인데, 그런 동기가 좀 부족해서

 

 삭막했었다.

 

 그러나 핑계겠지.  때로는 나 자신을 기계라고 생각하고 해야하는 법.

 

 씁쓸하거나 슬프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거나 마음이 동요하거나 그런것들 다 핑계일뿐.

 

 그런 일도 나 자신이 만든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게 나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허무하게 생각될수도 있는 것을  허망하게만 생각하지 않고 좋게 생각할수 있는 마음이

 

 생긴것이 그나마..... 나이가 먹어서 그렇게 된게 아닐까 싶다.

 

 모든 자기가 한 행동들을 긍정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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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깊이 궁금한것.

2009/10/09 00:46

 

 

 

 

 

 

모 정당에 관여하게 되면서 어떤 특정한 성향의 젊은 남성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노동자와의 연대에 대해서 스스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지지를 보내고

 

가속화되는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 두루두루 비판적이며

 

이명박은 당근 싫어하고

 

노무현과 김대중의 모든 정책에 대해서 찬동하진 않지만 그들을 정치인으로서 인정하고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와 국가주의와 기타 이와 관련한 폐습에 대하여 진저리치는

 

가방끈도 좀 있고 그에따라 살아온 문화적 자본의 풍요함에 따른 취향도 있으면서

 

특유의 익숙해온 경쟁사회에서 아주 영리하고 자연스럽게 대처하고

 

인간관계에 대해서 체화되고 숙달된 자연스러운 요령과 여유를 갖고 있지만

 

만일 자신이 낙오되거나 인정받지 못했을때 굉장히 은근한 짜증을 드러내는

 

'소외' 라는 것에 정말로는 익숙해본적이 없는.

 

 

 

그래도 성실하고 근면하고 의지도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믿을만한 사람들

 

적어도 ' 대단히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비상식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거라고 믿겨지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직 사람을 잘 볼줄 몰라서인지 정말로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 친구들이

 

정말로 여성주의에 대해서 어떤 입장 갖고 있는지.

 

남들앞에서 의견을 내놓는것 빼고,

 

아니, '주의'  라고 말할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인생과 관련해서 '그런 생각'

 

들은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근데 아무도 진심을 안 밝히는 것 같다.

 

그렇다.

 

뭐.  살다보면 잘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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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눈동자와 빨치산문학

2009/09/28 03:31

 

 

 

 

 

우리집은 어린시절 상당히 엄격한 집안이어서 자식들은 외출도 tv시청도 아주 제한된 한도에

 

서만 할 수 있었다.  우리집은 드라마도 잘 보는 집이 아니었다.

 

그러니 드라마도 소수의 몇개만 보았는데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때 여명의 눈동자를

 

 아버지가 꽤 빼놓지 않고고 보았던거 같다.

 

 

 

그때 주인공이었던 채시라는 가냘프면서도 강인한 여성미가 있고  도시적인 느낌

 

을 주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않은 동그마한 윤곽에 오밀조밀하고 해사한 동양미도 가졌고,

 

또한 나이치고 연기도 꽤 하는 청춘스타 였었다. 

 

 

여명의 눈동자 전반부에는 주인공 여옥이가 정신대에 끌려가서 군인에게 처음으로 폭력적으로

 

당하고 절망하여 자살을 하기위해 도자기를 깨서 손목을 마구긋고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비명지

 

르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나는  무언가 성적인 의미로 아주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일을 당한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하게 일을 당했고 어떤 의미인줄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즉 그당시에는 구체적 역사적 사건이라고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밖에 모르면

 

서도 왠지 그 처음시작할때 나오는 슬픈 단조의 피아노 반주와 역사에 휘말리는 주인공들의

 

처절한 생존의식에 매혹되어 어린 마음에 왠지 여운이 깊은 드라마로 남았었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 여주인공 채시라는 예전처럼 해사한 청순미보다는  완벽주의

 

이미지의40대 중견연기파가 되었고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세상도 많이 변했다.  티비만 켜면 도무지 볼래야 볼수없는 막장드라마가

 

판치고 이데올로기를 소재로 삼은 드라마는 3공화국,4공화국, 광주항쟁, 해방전후까지 다 써먹

 

어서 더 이상 이제 정치드라마는 대세가 아니게되었다.

 

 

어느날 머리도 식힐겸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여명의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18년이 지났으니 나도 초등학교때와는 하늘과 땅만큼 세상보는 눈이 달라졌고,

 

그런 나의 시선으로 다시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고 1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은근히 사람 폐인 만들기 좋은 드라마인지,  단숨에 한 일주일동안 20여편을 보았다^^

 

다시 보아도 상당히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완성도가 있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드라마를 촬영할 당시는 90,91년도 노태우 정권때이니 지금보다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더 허용되지않았고 반공적 공세도 강했지만 한편으로  민주 정부에

 

대한 열망이 높음과 동시에 근현대사에 대한 재평가와 이념적 담론도 무척풍부해지던 시기였다. 

 

 

 1.  원작과 드라마

 

 원래 여명의 눈동자는 원작이 있는데 그 작가는 김성종이라고 추리소설계의 대부격인

 

사람인데,사실 작품마다 일단 치정과 여자를 벗기는 것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스탈이다.

 

여명의눈동자 원작도 토나올만큼쓸데없이외설적이고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많이 다르다.

 

김성종 본인이 무척 반공적인

 

데다가그 원작을신문에 연재할 당시가 70년대였으니 더욱더 최대치를 나쁜 아주 비인간적인

 

괴뢰 공산당으로 그리고 장하림과 윤여옥이 결국 진정한 사랑인것처럼 그렸다.

 

(아무튼 과거에 마을문고에서 이 책을 보고 반가워 했다가 도저히 못보겠다 싶어서 던져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로서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군의 생체실험이나 정신대 문제

 

이념적 대립등을 로맨스와 잘 버무려서 스토리의 전개만큼은 짜임새있고 흥행요소가 많았는지

 

제작하려고 김종학 피디가 열심히 추진을 했고 송지나작가가 원작 캐릭터를 아주 많이 각색해서

 

드라마를잘 만들었다.  송지나 햏도 그때로 치면 386세대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원작자의 관점이 당근 맘에 안들었을테고 김성종과 격하게 언쟁까지 하면서도

 

공산주의자인 최대치를 좀더 내면이 깊고 숨겨진 따스함이 있는, 그리고 일본군 학도병에서

 

팔로군, 마적,  빨치산에 이르는 그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게끔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관계

 

의 중심도 대치와 여옥의 필연적인 사랑으로 기울게끔 하고 장하림에 대해서는 여옥이 다소

 

신뢰와 동지적 감정을 가진 은인과 애인의 중간쯤으로, 중심이 아닌 옆에선 위치에 서게끔

 

했다.

 

 

( 그러나  아무래도 드라마 관점의 한계상 남한쪽 입장을 가진 장하림을 신사적으로 부드러운

 

고뇌하는 지식인 타입으로 그리고 최대치를 거친 공산주의자로 그리다 보니 많은 사랑들이

 

하림- 여옥 커플을 지지하고 소수의 대치- 여옥 파가 있었다고 한다.)

 

 

 

 2. 애정이 가는 인물들

 

 

  (1) 최대치

 

 

 

 

 송지나 작가가 애정을 기울여서 다듬은 캐릭터라고, (성격은 작가 자신의 남편의 성격을 생각

 

하며 묘사했다나) 80년대의 최고 청춘스타였던 최재성이 그야말로 인물에 적합한 캐릭터로서

 

잘 연기했다. (본인은 연기력이 부족하다며 출연을 고사했지만, 제작진의 설득에 출연을

 

결심했고, 이출연을 계기로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됬다고 한다.)

 

 다이하드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여러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것이며, 일본군 팔로군 마적

 

 조선의용군 빨치산을 넘나드는 여러번의 지위설정이 다소 드라마틱하게만 보일수 있지만,

 

 어쨌든 초지일관으로 삶에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외면은 차갑지만 내면은 열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사이판에서 아사직전에 사회주의자 김기문에게 구조된 이후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드라마에서는 크나큰 신념이 있기보다는 약자로서 짓눌려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에 '가장강한것' 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 좌파세력이 된다. 

 

 

 무뚝뚝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

 

다고 해야 할까.  여옥을 학도병 시절 만난 이후로 늘상 삶의 목적으로 두게 되고  여옥도

 

하림보다는 대치를 택할수밖에 없도록 운명적인 인연을 맺지만, 하림과의 대결(?)에서 승리자

 

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불행할정도로 여옥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지리산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여옥에 대한 회한과 슬픔만 갖는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아무튼 이 드라마 보고 최재성이 정말 기절할만큼 헉소리나게 멋있다는 것을 알았다.

 

별로 드라마 보고서 남 주인공에게 크게 감탄한적은 없는것 같은데... 음 난 아무래도

 

옛날 스타일을 좋아하나보다.

 

2000년대의 꽃미남들이 줄수 없는 중후하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듯 하면서도 차가운

 

 포스가 곁들여진 <그 당시의> 완벽한 모습이 지금의 <샤프함과는 거리가 먼> 최재성의

 

 모습도 좋게 보이게끔 한다. 음...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 이후에 찍은 영화들이 죄다 줄줄히

 

 망한 액션영화라서 젊은시절의 다양한 연기패턴을 구경하기 어렵다. 

 

 최명길과 함께 나온 영화 '장미빛 인생' 을 통해서만 아직 젊은 매력이 살아있는 연기를 확인했다.

 

 ('아담이 눈뜰때' 와 ' 시인과 도둑'  이라는 영활 무척보고 싶었으나 도대체 절대 구할길이

 

 없더라)

 

 

 

 

 

 

 (2) 김기문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였다고 하나, 마땅한 근거는 없다.

 

국민당군대에서 팔로군 첩자로 활동을 하다가 대치를 발견, 사회주의

 

자의 길로 인도 한다. 단호하고 강인하지만 인간적이고,  파벌싸움에서 희생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항상 인민을 먼저 생각하는,  그 당시로서는 미디어에서 별로 보여준적없는

 

긍정적인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인 여옥의 아버지와 대립하여

 

죽일수밖에 없었던 전 날에,  연안 ( 그 당시에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였다.) 에서 말없이 계속

 

담배를 피우던 장면이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윤홍철(여옥 아버지) 를

 

죽인 것에 대해서 훗날 최대치에게 비통하게 고백한다.

 

 " 윤홍철 선생을 죽이고 나서 나는 울었네... 그 분을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우리는 절대 후회를 해서는 안되네. 우리의 판단이 

 

 옳은지는훗날 후손들이 역사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네"

 

 

 드라마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해방후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파벌과 대립하였던 연안파

 

쪽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평생 개고생 하다가 한자리 하지도 못하고 한국전쟁때 지리산에서

 

조용히, 정직하게 병사하는 결말이 수많은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 같다.

 

 

(3) 최대치 동료 일본인병사

 

 

 

 드라마 초반부에 나오는,  관동군의 최대치의 일본인 동료병사다.

 

 시종일관 겁이 많고 나약하지만  최대치를 무척 좋아하여 " 사까이~ (최대치 일본이름"

 

 하고 이것저것 맨날 수다를 떤다.

 

 버마에서 관동군이 미군에게 패배하여 고립되었을때 숲속에서 며칠씩 굶다가 결국 숨진다.

 

 " 전쟁이 끝나면.... 난 우동집을 열거야. 그때 사까이도 꼭 놀러와 "

 

 라는  대사와  미군이 버린 버터덩어리를 꿍쳐놓고 있다가 최대치에게 나눠 주면서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깜찍하다.

 

 

 (4) 성도 (사진 못찾음)

 

 

 나중에 모래시계에도 나오는, 비열한 인물로 잘 나오는 정성모가 연기하는데

 

 극우적 독립운동가의 측근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후에는

 

우익 정치 집단의 일원으로 일하다가 북한에 미군정 스파이로 장하림과 함께

 

차출되었다가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임진강변에서 죽는다.

 

 극렬한 반공주의적 성향을 갖고있고 동시에 해방전에는 심지굳은 독립운동가의 모습으로

 

나오다가 또 해방후에는 열심히 전평의 노동자들 때려잡는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모습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직접 몽둥이 들고 때려잡는(?) 역할들은 돈주고 산

 

아래 똘마니들인 정치깡패들이 하지 않았을까, 싶은 의문점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역시 조선의 해방을 애닯게 열망해왔던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는지,  마지막으로 임진강변에서 장하림의 품에 안겨서 숨지면서 하는대사가

 

 " 아직 해방이 안되었나?"  

 

 나름대로는 자신의 신념에 차서 조선독립에 평생을 바쳤지만 죽음에 한해서는 너덜너덜한

 

헝겊조각이강물에 떠내려가듯 그렇게 흔적없이 초라한 모습이기에 쓸쓸하다.

 

 

 

 

 (5) 윤홍철

 

 

 

 

 전라도 남원의 지주출신 독립운동가, 한마디로 김구 같은 정치성향을 지닌 민족주의적 독립

 

 운동가로 나온다.  공산주의 독립운동 세력과는 대립하고 극우 친미적인 노일영과도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해방을 위해서는 일단 민족이 모두 단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최대치가 공산주의 테러집단에 가입하여 노일영 암살을 위하여 윤홍철에게 접근한다.

 

 최대치는  윤홍철은 여옥의 아버지이기에 그 역시 그를 이용한다는 것에 갈등한다. 

 

   

 홍철과 가까워진 후  내심 그의 사상적 혼란을 내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을 알수 있다.

 

 " 그런데 노일영같은 친미 자본가는 옳다고볼수 없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그거 자기만 잘살

 

  자고 하는거 아닙니까?"

 

 

 홍철은 그 질문에

 

 " 난 자네를 이미 사위, 아니 아들과 같이 생각하네.  아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주길 바라네.

 

  나중에 내 자네에게 시간을 내어 맑스주의에 대한 나의 견해를 얘기해주겠네"

 

  하며 최대치의 손을 잡고 쓰다듬는다. 그는 외동딸의 정혼자라는 이유로 대치에게

 

  극도의 신뢰와 애정을 가지게 되고 노일영에게 대치를 소개해주게까지 된다.

 

 

  그러나 최대치는 결국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 하고 노일영을 암살하고 홍철을 위한

 

 한약재만 사놓고 몰래 도망친다.  (이것으로 그는 스스로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게

 

 된다.)

 

  충격받은 홍철은 대치를 찾아 연안까지 가지만 김기문은 조직이 우파에게 노출된 이상 그를

 

 그냥 돌려보낼수는 없기에 인민재판으로 생매장한다.

 

 

 

 그밖에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더 있지만 팔이 아파서  생략....

 

 

 

 

 3.  재밌는 부분

 

  대치가 처음에 홍철에게 몰래접근하여 들통이 난 이후로 자신과 여옥과의 인연을 얘기하며

 

 " 죄송합니다. 저희는 정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   하며 홍철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로서는 아무리 전쟁판이라고 해도 나름 양반집 규수인 여옥과 혼전에 육체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장인되는 홍철에게 고백하는 것은 무척 죄송스런 일이었던것이 당연했을것이다.

 

 

  나중에 여옥도 연안까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 아버지의 손자가 있어요... 허락도 없이 아이를 가져서 죄송해요..."

 

  하며 눈물을 흘린다. 

 

  세련된 신지식의 수혜자들로서 (이들은 그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다가 사회주의자이고

 

  미군스파이이다)

 

 급박한 정세  안에 있으면서도 가부장적 정조라는

 

 문제앞에서는 작아지는 모습들이 오히려 약간은 신선하고 재밌게(?)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 드라마에서는 여옥이 여필종부 하는듯 보이지만 알고보면 대치없이도 혼자 잘 살고,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생각할때는  의존보다는 관계에 대한 자존심을 조용히 보여준다.

 

 대치는 여옥에게 겉으로만 센척하지만 알고보면 여옥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마음에 그녀에게 은근히 저자세를 보인다. 그를 마음약해지게 하는 것은 여옥과

 

아들, 두 존재 뿐이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여옥이 장하림의 집에 피신하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화내지 못한다.  여옥에게 어쨌거나 관계의 중심은 대치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장하림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각별한 존재이이고 또한 자신이 없는 동안 여옥과

 

생존을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드라마의 삼각관계에서 나오

 

는 노골적으로 질투에 드러내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은근히 드러낸다.

 

 

 

 어쩌면 아내가 정말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지만,  전쟁통이라고 해도 노골적으로  옛날애인을 

 

 돌봐주며 간호해주면서 남편보고 구해달라고  하는

 

( 한국전쟁 시작후 미군정출신인 장하림은 인민재판중에 구사일생으로 살

 

 아났지만 큰 부상을 입게되고,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여옥을 찾아온 인민군 대장

 

 대치에게 여옥은 하림을 구해달라고 한다.)  아내를 받아들일수밖에 없는것이 재밌는 점이다. 

 

 

 늘상 이런식으로

 

 장하림과 얽힐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대치는 여옥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

 

 두 남자 곁을 번갈아 오고갈수 밖에 없는 여옥도 이중플레이라기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두사람

 

모두를 놓을수 없는 관계를 맺을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휴머니티라고 보여졌기 때문에

 

 '이중플레이 싫어하는 우리나라 시청자들' 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은것으로 알고 있다.

 

 

 4. 아쉬운 점

 

  엘리트 좋아하는 송지나가 써서 그런지 (사실 그 사람 잘못은 아니다. 원작이 원래 그런걸)

 

  주인공들이 사상을 대하는 방식도 매우 관념적이다.

 

  장하림은 해방후에 미군정에서 일을 계속하게 되고 심지어 북에 생존을 걸고 스파이로 간다음

 

  나중에는 빨치산 때려잡는 토벌군까지 하게 되지만,  항상 자신은

 

 명백한 입장이 없다하며 좌우 대립중 한쪽을 택할것을 강요하는 현실사이에서 고뇌한다.

 

 그당시 역사적 상황에서야 충분히 그런고뇌가 없을레야 없을수가 없었겠지만,

 

 결국 장하림이 최종적으로 취하는 입장들은 아주 일관성있게 하나의 흐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를 휴머니스트이자 중립적인 지식인으로 그린것이 이 드라마의 한계이다.

 

 

 

  

 

 

 

최대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다소 무자비하지만 '알고보면'  인간적인 공산주의자로 그려

 

지는데,  열심히 공산주의에 인생을 투신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을 별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가장 강한 세력이 되어 설움을 당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택했을 뿐이라는 대사가 여러번

 

나온다.  ( 어찌보면 모든것을 들춰내고 남은 솔직한 욕망의 밑바닥은 모든사람이 그런

 

형태를 띄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역사에 대해서주체적이지 못하고 어떤 선택을 해도 몸은 열심히 뛰고 있지만 그들의

 

선택은 체화된 것이 아닌 모습을 항상 보여준다.  실제로 장하림은 동경의대 출신 수재,

 

 최대치는 북경대학교 상과대학 출신으로 나오는데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나 그런식의

 

 주인공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항상 유사한 방식이다.  구조에 희생당한 인텔리인 주인공

 

 들이 항상 자신의 과거의 행보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그렇게 만든 구조를 원망하며 제3자적

 

 시선을 취하는 틀거리는 이제 그만좀 써먹었으면 좋게다는 바램이 있다.

 

 

 박상원이 연기하는 장하림 역할은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태백산맥 김범우도

 

 같은이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사람은 장하림같은 행보를 걸은 사람은

 

 아니었고,  미군정에서 잠깐 일하다가 후에는 조용히 학교 선생하고 글쓰며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대치와의 대결구도를 살리고 어느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내지는

 

드라마라는 한계 + 작가와 원작자의 한계 때문에 드라마 캐릭터가 그리 된 것 같다.

 

 

 

 

  

 

 아뭏든 그리해서 여명의 눈동자를 보고나니,  재밌고 인상에 남는 장면이  여기에는 다 열거

 

 할수 없을정도로 많았고,  어느정도 한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로서는 정말 영향력

 

 있었던 드라마였다는 것이 충분히 인정됬다.

 

 

 

 

 이렇게 드라마를 보고나니 빨치산과 그 활동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된 소설을 찾아보니 대하소설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세가지가 있었고 조정래의 아리랑도 해방후 얘기지만 초반에는

 

빨치산의 후손 얘기를 약간 다룬다. 이보다 좀더 실화적인 논픽션의 성격을 띈 전직

 

빨치산의 소설 정관호의 ' 남도 빨치산' 이라는 소설도 있고 아무튼 꽤 있었다.  태백산맥은

 

옛날에 본데다가 조정래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사실 책 한 질을 다보면 그  사람

 

특유의 문체와 흐름에 살짝 질리는 면도 있고하여 아리랑을 썩 보고 싶진 않고 지리산은

 

무척 재밌다고는 하지만 약간 걸리는 면도 있고 남부군은 영화로 보고나니

 

그사람 소설을 꼭 보고싶지는 않아졌다. 

 

 

그러다가 정지아의 ' 빨치산의 딸들' 이라는 책을 찾게되었다.

 

작가 정지아의 부모님은 실제로 두분다 빨치산이었고, 그들의 딸들로 살아온 작가 본인만의

 

생생한 고뇌와 예민한 감성이 살아있는 작품일것 같아서 일단 1권 구입했는데 잠잘때마다

 

조금씩 읽어보려고 한다.

 

(정지아가 25살때 쓴 작품이라 한다. 아픔이 인간을 빨리 성숙시키는지.)

 

 

 

 

연애소설보다는 역사서나 혁명가 관련 소설이나 영화를보면서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과 재미가 한편으로는

 

묘하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단조로운

 

현실이 주는 무기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박진감넘치고 처절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삶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그것을 통해 낭만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당장 총에맞아 죽을 것이 두려웠던 그들이나,  생존을

 

 거는 긴박감보다는물흐르듯  참을성을 갖고 견뎌야 하는 평범한 인간들이나, 

 

결국 낭만이필요한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들에게  총을들고 사생결단해야 하는

 

비장함이 늘상필요하진 않겠지만 대신 지난한 현실이 끊임없이 자신을 장악하려고 넘실

 

댈때 그 파도를 유연하게 타고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낭만이 어디에서나 필요한거다.

 

 

아무튼 과거의 인간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들을 드라마를 보면서 또다시

 

생존의지를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되새김질 하고 있다니 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십수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그 장면

 

.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후반부에 나오는 제주도에서의,  생존에 지친 애환을  드러낸 안타까운

 

 애정신이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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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여자

2009/06/23 13:00

 

 

 

 

나도 멀쩡한 여자이니만큼

 

남자에 대해서 관심도 있고 멋있는 사람을 보면 '아 멋지네?'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어떤 끈적한 관계로 얽히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교감하고 싶은 욕구가 큰것이 요즘의

 

마음이고, 앞으로도 그렇고 과거도 그랬고 언제나 마주하고 싶고 소통할수 있는 대상이 빈곤한

 

세상이기에 나는 끈적한 로맨스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고위의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같은 경우는 이성을 너무나  털털하게 대해서

 

혹은 너무나 담백하게 대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곤 한다.

 

이런때에 썩 기분이 좋지 않다,

 

여대출신 어쩌고... 이런소리 듣기도 원치않고 하여

 

부정하고 싶은 신분도 아님에도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취급하시는 식의 그런소리

 

안듣게 하기 위하여 학교외의 공간에서는

 

어느정도 많이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성별대로 감정을 철저히 구획하여 가지는 듯 하다.

 

내가 서투른것이냐, 댁들이 서투른 것이냐.

 

어느쪽이든지 나쁘지 않은 관계로 좋게좋게 지낼수는 없을까?

 

 

내가 성별을 버리고 나아갈수는 없는것이냐?

 

아니면 내가 여자라는 정체성을 시시때때로 버리고 감추고 드러내는데 신경써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아니, 내가 이렇게 의식하지 않은래야 의식하지 않을수 없는 ' 여자' 라는 정체성은 무엇이냐?

 

어떤 경우든지 자유로울수는 없는것이냐, 지금 이대로

 

*****************************************************************************************

 

 

성희롱이라는 것들을 잊어버릴때쯤 되면 (?) 당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간들이 사는세계이다보니

 

놀랄것도 없고 크게 충격받을것도 없고 잠깐 기분나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되지만

 

그런짓들을 하는 양반(?) 들을

 

확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여도 상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것저것 따지며 가장 현명한 방법이 무얼까 머리쓰고 있는 와중에 하게 되는 생각이다.

 

글쎼, 아 진짜 기분이 더럽네.... 이런 기분이지 급분노하거나 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너따위에게 그런 취급받게 생겼냐, 누군가 나대신

 

머리를 골프채로 두들겨서 백사장의 모래처럼 만들

 

어준다고 해도 그럴가치도 없다  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들기는 한다.

 

이것도 나잇살과 여러 경험의 습득에서 나오는 여유겠지만.

 

어쨌든 내가 잘못처신한게 뭔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설마 그렇지는 않지.

 

근데

 

상대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나도 왠만하면 이런거 까발리거나 공론화하지 않고 조용히 마치 없었던 일처럼 지나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하다고 할수는 없을정도로, 이런일의 대처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조만한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여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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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과 부활

2009/06/20 01:05

 

 

 

 

김태원이 요즘 티비에 나와서 종행무진하고 있다.

 

사실 나는 김태원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야릇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개그맨처럼 인식되기 전에

 

부터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 이승철과 함께 나오면 이승철보다는 그에게 마이크가 가기를 바라곤

 

했었다.  그 까만머리로 얼굴을 뒤덮고 기타를 치는 모습이 신비롭기도 했지만,

 

그가 작곡하는

 

스타일을 보았을때, 90년대에 대한 향수를 잃지않게 해주면서도

 

매우 서정적이고 그러면서도  진부한 멜로디에 안주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점이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입담이 좋은 사람인줄은 몰랐지만ㅋ

 

물론 김태원의 사람됨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요즘 김태원을 초딩들도 알아보고 있는 이 마당에 뭐랄까, 약간.... 이런느낌을

 

받는다.   괴팍하지만 번뜩이는 재기의 매력을 가진 사람을 과에서 나혼자  좋아해서

 

 군대간동안 내내 기다렸는데 제대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발견하고

 

추파를 던지는 느낌이라고나 해야할까. 물론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변한것(?)은 아니지만.

 

(비유가 좀 구리지만. 물론 실제로 이런 경험은 없다. 아뭏든....)

 

김태원이 티비에 나온이후로 부활 콘서트가 전회 매진되었다고 하니, 참 미디어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미안하게도 돈주고 콘서트를 가본적은 없어서 직접공연을 본적은 없지만, 부활의 보컬들은

 

다 ' 사줄만한' 목소리를 지닌사람들이다.  여기서 사줄만하다는 것은 가창력이 객관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결코 못하지 않지만,  결코 그 가창력이 노래자체보다 부각됨으로써 음악

 

자체보다는 ' 솜씨있는 노래자랑' 을 보다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김태원이

 

만든 곡을 위하여 그 보컬이 존재한다고 볼수 있을정도로 작곡스타일에 맞는 보컬들이 역대

 

존재해왔다.  김태원이 좋아하는 보컬스타일은 고음이 자유롭게 올라가면서도, 거칠지않고

 

깨끗하면서 결코 얇지는 않지만 너무 굵다는 느낌을 주지않는 스타일인것 같다.

 

 

 

그런점에서

 

부활의 역대보컬중에서 이승철이 가장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사람인양 대중들에게 인식

 

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승철을 부활의 보컬로서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꼭 그의 상업적인 추구나 솔로앨범 음악의 식상한 스타일, 김태원과의 불화가 있다는 여러가지

 

소문때문만은 아니다.)

 

 

 

이승철의 가창력은 물론 천상에서 갓 뽑아온것같은 음색으로 뛰어나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보다 뭐랄까... 좀 얇고 여리다는 느낌을 준다. 지나치게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해야할까.  부활의 보컬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서정적인 것이 아니라,  거친듯 하면서

 

도 그 안에 부드러움이 내포되어야 할필요가 있다.  마치 무뚝뚝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어색하지만 내면에는 따뜻함을 지닌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이승철의

 

재결합이 앞으로 전혀 있을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른 보컬들이 이승철보다 전혀 못할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김태원이 칭송했던 박완규는 이승철 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람

 

이지만 나는 뭐 글쎄 그냥 그렇고,  정단, 이성욱등  부활이 아주 대히트를 치지 않았을때의

 

보컬들을 더 좋아한다.

 

 

 

현재 부활의 보컬은 정동하라는 젊은 사람인데, 처음 노래부르는 것을 들었을때는 이전 보컬들보다

 

어찌 저리 못한 아이를 뽑았나. sg워너비보다 노래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걸.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듣다보니 감미로운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뛰어난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태원이 지나친 알콜과 흡연으로 인하여 언제까지 활동을 할수 있을지 모르니, 돈이 생기면

 

한번쯤 콘서트에 후회하지 않도록 가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점에서 오늘밤에는 낮에 논탓에 밤새 외워야할것이 많지만

 

잠시

 

부활- 안녕, 리플리히, 추억이면  

 

레드제플린-moby dick, baby i'm goonna leave u, heart breaker

 

를 감상해야겠다.

 

 

엄밀히 말하면 레드제플린과 부활은 음악의 기원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봐야겠지만, 레드제플

 

린은 내가 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고, 부활은 내가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룹

 

이며 둘다 서정적인 음악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쌍둥이와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활이 락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근히 배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의견

 

이 뜻하는 바도 알고 있기 때문에 존중하지만, 내가 레드제플린과 부활을 동일시 한다는 것은

 

순전히 나의 애호의 측면에서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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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영화제보기&....

2009/06/17 12:49

1. 인권영화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라는 영화 한편을 감상했다.

 

 이 영화는 나와 같은 수업을 청강하신 분이 감독인 영화로 성폭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영화다.

 

 원래 월욜에 스터디가 있어서 마음이 약간 바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에 이 영화 촬영감독 님인

 

 아오리가 미리 연락주시지 않았다면 굳이 보러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도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않고 그냥 지나갈수는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마음이 약간 불편해졌다.  껍질이 벗겨진채로 이 세상의 공포나 모든 괴로움에

 

대해서 취약한 상태에 있는 나로서는,  실제로 성폭력 경험자인 출연자가 감독과의 토크쇼에서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어 질의 답변을 하는걸 보고 여러가지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고통을 생각하며 자기것인양 감정이입하여 괴로워해주는 것은 첫번째 단계이지만

 

두번쨰 단계에서는 그 고통을 함께해주면서 결국 본인 스스로가 그 고통을 스스로 해결할만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믿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내용은 특별하게 새롭게 다가오거나 재기발랄한 연출력이

 

돋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던점이 예상외의 점이었다. 그래서 약간 실망했다.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영화를 보기좋게 만드는 것은 주요가 되는 중요한 점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서도  눈에 들어오는 구성과 창의력의 관점에서 좀 아쉬웠다고나 할까.  

 

글쎄, 영화를 보고나니, 생존자인 여성들이 함께 얘기를 나누고 저항하는 과정속에서 치유받고

 

강해지는 그런과정이 내게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성폭력으로 기인한 괴로움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다른 문제에 대해서 목표에 대해서...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런것에 대한 기대도 감각도

 

가질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원래 타인과 나를 많이 나누는 성격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새롭게 공부하고 싶은 지식들과

 

배우고 싶은 세계 속을 탐미적으로 몰두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2.  노사모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후배 2명과 어제 오랜만에 술을 한잔하는데 노무현 죽음 얘기가 나왔다.

 

 한명이 자신이 노사모였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노무현 죽음후 열흘이나 힘들었다고.

 

 

 그 친구의 성향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것도 없이 그저 어느정도의 편안함이 있는 관계

 

 에 불과하게 되어버렸지만,  노사모였다고 하니 묘한느낌이 들었다.

 

 

 물론 과거에 노무현지지자인것과 현재까지 노무현지지자인것과 큰 차이가 있으니 모두 한가지

 

 세트안에 집어넣을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노무현을 좋아하고 슬퍼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친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 만들어보고 싶은 세상이 어떤것인지 문들 궁금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하여 내가 개미 콧구멍 속의 털만큼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은 이유는

 

노무현이 펼친 정책과 그의 성향이 결국은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불공정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난 그저 그 어떤 정치적 사안에도

 

 무관심으로 일소해버리는 족속안에 발을 담그게 된것일까?

 

 

 아니면 내가 스무살 이래로 좌파들 (일단 이렇게 칭하자면)하고만 접해왔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밖에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 걸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일말의 소중함도 깨닫지 못해왔기 때문일까?

 

 

 그 어떤 이유이건 간에, 그것이 내가 느끼는 감정이고 내가 지금 현재 있는 자리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하고 그것에 대해 솔직해야만 오히려 나중에 갑자기 꺾여버리는 일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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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2009/05/18 06:07

 

 

 

 

어제 여러가지로 매우 기분이 좋지않아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영화를 보러나갔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 구리시내까지 걸어갈 기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서서 집근처를 배회하며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고나니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와서 이불속에 누워서 77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읽었다.

 

 

(이상문학상이라고해서 딱히 뭐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단 느낌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한잠 잤나, 아니면 자려고 누워있었나, 하다보니 결국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걸려있는 문제의 70%는 내가 해결볼 수 없는 것이라고.

 

 

가족들과 부대낌의 골치아픔 내지는

 

내가 생각해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치관들과 시시때때로 마주쳐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

 

자주전화하여 나에게 시름을 얹어놓는 어떤 친구의 문제

 

어른스럽지 않아서  의지가 되기 힘든 또다른 친구의 문제

 

반듯하게 나아갈 수 있는 구심점이 되어줄 이상향내지는 멘토의 부존재

 

오랜수험생활에서 나오는  신경예민해짐 등.

 

 

 

모두 내가 해결볼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머릿속으로 이 문제들을 나에게 납득가능하도록 이해시키기 위하여 애써보면 그 문제

 

들이 마치 해결된것처럼 그 순간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비슷한 형식의 문제에 맞닥

 

뜨리게 된다면 사실상 나는 현재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해할 에너지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

 

다는 거다.  또한 그 문제들을 나에게 납득 가능하도록 이해시키기 위하여 생각하는데에

드는에너지소모가 너무 커서 오히려 휠씬더 피곤해져서 인생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어떠한 문제들도 해결 볼수가 없다.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부나 하는 것.

 

그래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것.

 

그것만 내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 그렇게 되면 위의 문제들이 한순간에 해결될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 친구들과 적당히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둘수 있을것이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

 

나아가면서 생기는 다른 에너지들로 위에 나열한 문제들은 나에게 그다지 영향력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참 씁쓸하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그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피할수 있도록 내가 물질적 기제를 가지지 못하면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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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친구?

2009/04/17 22:44

 

 

 

 

 

선량하고 성실하고  그리고 반듯하고 딴재주 부릴줄 모르고 약간 고지식하고

 

그렇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마음이 차가운 그런....

 

그런 어떤 친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덩달아 무겁게 가라앉는것을 느낀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고

 

사실 별로 열심히 잘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가게 될 것이고

 

 

사실 내 인생 팍팍하다. 팍팍한지 오래됬다.

 

 

그러나 선량하고 착하고 반듯하고 그러나 마음에 혼란이 많은 그  친구에게

 

 

나는 내가 고른 많은 음악들을 들려주고 싶다.  그럴정도의 기운은 남아있다.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친구의 상처를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중에서는,

 

 

그중에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잘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가 나와 다른 점은 나보다 훨씬 순결하고 반듯한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내가 좀더 표독스럽고 비뚤어진 구석이 많고 많지만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공통점은 열정이 있고  열망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그걸 알고 힘을 얻었으면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친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자유지만,

 

 

난 그걸 확신한다.

 

 

약속해도 좋아.

 

너는 알게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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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겨 맞았나?

2008/09/02 20:28

 

 

 

 

오늘 잠깐씩 딴생각하면서 그래도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저녁 7시부터 등부터 허리가 온 몸이 두들겨 맞은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건 쪼금 엄살이고.... 힘이 약한 일곱살 배기가 때린정도라고나할까?)

 

 

요즘 주 3회씩 걷기 운동을 안한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몸이 비싸져서 매일 운동할것을 요구하고

 

있나보다.

 

조은것만 먹고 싶어하고, 7시간씩 꼭 자지 않으면 헤롱대고, 운동안하면 힘이 쭉빠지고

 

이게 내 비싼 몸뚱아리의 실체이지만 그래도... 해달라는대로 해줘야지.

 

 

 

오늘부터는 매일 운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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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즉흥, 당위의 삼박자

2008/09/01 21:33

 

(심심하고 답답하고 정신없어서 엉터리로 쓴 글이다. 읽게되는 사람이 염두에 두어주시길...)

 

 

공정한 인간이 되려고 애쓰고, 또한 나에게만 치우쳐서 사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 하지만

 

나 역시도 독선적이고 나 좋은대로 생각하는 면이 있는것만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내가 얼마나 나의 인성의 한계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타고난, 그리고 길러진 인성들은 그리 훌륭하지 않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절실하다고 느끼는 가치들이 매우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상황속에서 나 역시도 그것들에 무뎌지고 또한 그보다 더 나를 현혹시키고 빛나보이고 편안하게

 

하게끔하는 가치들에 눈알을 번쩍이며 달려드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그래도 결국 그것들 만으로

 

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앞에 말한 절실한 가치들에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며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코 행복할수 없으며 딱히 배울것도 없다는 것을

 

26년만 살았음에도 분명히 알게 됬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요즘은 나의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충실해야 할까.

 

즉흥과 당위라는 것이 결국은 서로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위는 의무, 즉흥은 향유

 

라고 생각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즉흥과 당위 둘다를 가져가고 싶다. 나에게는 당위속에서 찾아내어지는

 

과정속의 기쁨이 있고, 즉흥이라는 단어에서 ' 흥' 이라고 붙일수 있는 즐거움이라면 사실 그건

 

내가 아주 넓은 범위에서라도 허용하였고, 시도해보고 싶고 간절함이 조금이라도 있는 ' 진실의

 

당위' 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나야말고 사실 즉흥이건 당위건 그저 부지런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 아래 있지만,

 

요즈음에 깊이 깨닫는 것은 내가 이제껏 다소 당위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나의 깊은 즉흥

 

에 의거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당위라고 생각하여 왔던 것들은 서서히 가지를 쳐내었고,

 

엑기스라고 생각되는 당위만을 남기며 살아가게 됬을때 그건 아마 즉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좀 추상적이고 정신없지만,  과연 나는 어디까지 내 즉흥을 살려내고

 

그 감정에 충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는 걸까? 내 마음속의 깊은 에너지를 불러

 

올릴수 있는 감정의 촉수를 민감하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사실 즉흥적인 감정들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편한대로,

 

감정대로  행동하면서 그것들이

 

솔직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낮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가치 중립적이며 그 무엇에도 걸러지지 않은 천연의 감정이며 그것을 억제하는 것들은 진실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기는 경향이 크지만,   사실은 그들의 감정은 여러가지 상황과 이데올로기에 이미 한번 걸려져서 나온 것으로, 결코 완전한 감정 그 자체는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위하여 제도권의 학교, 종교, 가족 등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부정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관습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위하여 더 큰

 

자본이라는 것과 쉽게 결탁하는데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 물질이

 

주는 한도내에서 사람과 인습에게서 자유롭기 위하여 열심히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을 자신의 욕구와 동일시하면서, '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왜 비판하나?' 라고

 

반문한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 있어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고 본다.  나는 무언가에 대한

 

배움과 충돌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수 없다고 보고, 솔직한 정신이란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가장 쉽게 편해지는 길을 자유라고 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편해지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에 솔직

 

해지는 만큼, 타인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행하는 폭력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이 없게되는 것이다. 그 자신조차도 자신의 자유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면,  그 자신 스스로가

 

오류의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것이 낫다. 

 

물론 요즘의 세상은, 오류에 대해서 아주 관대하다.

 

오류를 지적하기에는 악다구니 치면서 생존해야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상사나 교수님에게는 솔직한 감정의 표출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으면서, 권력관계의 하위에 처해

 

있는 부하직원이나 후배에게는 자주 ' 천연의 ' 감정을  드러내면서 나 자신은 ' 솔직한 사람,

 

거짓을 모르고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을 움직이는 로직에

 

대해서 우스울정도로 무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자기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진정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오류와 손쉽게 타협하면서 그렇게 한번

 

타협할때마다 편하게 배에 붙어가는 뱃살에 대해서 냉혹해져야 한다.  나는 과연, 남들이

 

알아차리는, 대중이 지적하는, 나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때에만 나의 오류를

 

점검하는 사람이 아닌지.  아무도 밝혀낸 바 없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관행이라 여겨지는 행동들

 

에 대해서는 오류라기보다는 귀여운 실수 내지는 허술함으로 여기며 그 자체를 자신의 자연스러

 

움으로 타협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말이다.

 

나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만 정의롭고 순수한 사람이 아닌지 말이다.

 

 

요즘 나는 나를 굉장히 칭찬하고 긍정해주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다.

 

이제껏 별로 그렇게 살아온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내면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사실상 내가 내 배의 뱃살을 늘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거침없이 살아가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어떤 원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살면서, 그걸 나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합리화 하면서 사는것이 아닌지.

 

 

그러다보면 결국 나에게 하나 남는것없을텐데 말이다.

 

정의롭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명제가 닭살돋기 때문에 내던져버리면서, 그 당위가 주는 무게를

 

피해버리려고 하는건 별로다.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겸손한척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비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거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움직이는 비겁한 로직에 대해서 민감하게

 

꿰뚫고 비판하는 사람이 결국은 형편없음을 벗어나서 조금은 순수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정말 나자신의 생활태도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비겁한 로직을 합리화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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