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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에 대해

남한 헌정사상 최초의 합법 사민주의 정당을 결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이른바 법살에 문제가 있었음을 정부기관에서

공식 확인했다고 한다.

50년만의 일이라는 말도 전한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들에서

하나의 상처에 겨우 딱정이가 앉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아

이것이다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우나 예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둔 바 있어 올려 본다.

 

Ⅰ. 유연기와 3.1운동

  조봉암은 1899년 9월 25일 강화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고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는 그저 장난치기 좋아하고 세상일에 큰 관심이 없는 평범하게 자라왔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의 결과 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유년기의 조봉암은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명석했었다. 그는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만을 마치고 직업을 찾았고 18세 되던 해에 강화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주산이 빨라 남들보다 10배는 빨리 일을 했다고 한다.

3.1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1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출옥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YMCA 중학부에서 공부를 할 요량이었으나 일 욕심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공부에 마음을 둘 수 없었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나 평안남도에서 체포가 되었는데 YMCA를 중심으로 거사가 준비 중이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옥고를 치른 조봉암은 민족감정이 더욱 강해졌다고 해고한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들에 가지만 그곳에서도 정규 수업보다 도서관에서 책읽기에 몰두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논의되고 있었고 그도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몇몇 친분이 있는 자들과 함께 ‘흑도회’를 만들었으나 이내 볼셰비키즘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일본에서 3년을 보내고 1922년 8월 서울로 돌아와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Ⅱ. 해방, 공산당과의 결별

 서울로 돌아온 조봉암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연합대회 준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2개월도 못돼 소련의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리는 코민테른 연합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 대회에는 조선에서의 공산당 운동을 주도하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함께 참석했고 그는 국내파의 대표로 참석을 했다. 그러나 두 개의 해외파간의 갈등으로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에서 탈퇴를 하게 되고 조봉암 등은 “우리는 연합대회가 되지 못하고 어느 일파의 대회로만 진행되는 까닭에 더 이상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대회장을 나왔고 그 경과를 코민테른에 전보로 알렸다. 이후 부하린의 중재로 1922년 12월 각 조직을 해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르뷰로(Korburo)가 코민테른 극동지부안에 발족했으나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이른바 카우트브(KUTV-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수업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달하지 못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 1923년 귀국해서 국제공산청년동맹 국내 대표로 일을 하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준비하고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이념적 조직체인 화요회를 결성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을 발족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1928년까지 4차례의 창당대회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축소되었고 1930년 중국공산당에 편입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1926년 일제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청년동맹이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해서 지하활동을 했지만 1931년 6월에 프랑스공원에서 잡혀 신의주에서 7년형을 살고 1941년에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몰린 일제의 예비검속에 의해 1945년 1월 다시 체포되어 8월 15일 해방을 맞아서야 출옥하게 되었다. 그는 출옥직후 인천으로 향해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이를 건국준비회 인천지부로 전환했으며 이와 함께 노동운동, 공산단 재건운동에 몰입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되면서 민전의장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박헌영 등의 공산당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1946년 7월에 민전의장 사퇴와 함께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천에서 내가 민전의장일 뿐 아니라 공산당 등 모든 좌익운동의 지도자로 지내는 중에도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등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사도 있었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신탁통치 반대회의를 열어놓고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찬성 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연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습니다. ...... 내 나라도 잊어버리고 내 민족도 생각지 않고 지시대로만 하는 것은 옳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공산당과의 결별후 조봉암은 여운형,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1946년 12월 미군정청이 출범시킨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좌, 극우 배척운동을 펼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전환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기 중간정당을 창당이라는 정치적 행보를 지속하게 되고 이른바 ‘비미비소의 민족자주 노선’을 택해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워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에 인천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제의로 농림부 장관을 맞았고 이때 양곡매입법, 농지개혁법,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출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국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두 차례에 걸친 정치파동이 발생했고 1954년 2차 정치파동 이후 국회 내 호헌동지회와 함께 통일 야당을 만들기로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서상일 등과 함께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그는 대통령선거 후보로 두 번째 입후보했다.


Ⅲ. 조봉암과 진보당

  1956년 3월 31일에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서상일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이 되었으나 서상일은 불만을 품고 부통령 수락연락연설을 거절하면서 조봉암 계열과 서상일 계열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편 조봉암은 이승만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 후보간 양자 회담이 있었지만 결렬되게 된다. 그러나 이시기 조봉암은 이미 자유당의 부정선거 등을 대비해 후보를 사퇴할 것을 결심하고 그 시기에 대한 고민만을 남겨 놓았으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으로 가던 열차에서 뇌출혈로 급사하게 되어 조봉암이 유일한 야당후보가 된 것이다. 5월 15일 선거가 치러졌고 여러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총 투표수의 23.9%인 216만 3천여 표를 얻었다.

이러한 선거결과의 여세를 몰아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고 ‘민주 혁신 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혁신 세력의 단결을 추구했다. 그러나 혁신계 인사들 사이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다시 드러났으며 거기에 더해 정부 여당의 공작으로 내분이 벌어졌다. 따라서 조봉암 계열은 1956년 11월 10일에 서울에서 전국 대의원대회를 열고 그를 위원장으로 하고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 등을 부위원장으로 해서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 대회는 당 선언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모두 평화 통일을 강조했다. 선언문은 “경제 문화 방위 등 제 부문에 걸친 건설을 촉진 수행하여 우리의 민주적인 주체적 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이라함으로써 민주적 국토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 할 것임을 표명했고, 강령은 “유엔 및 미국을 비롯한 민주 우방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검거가 되었고 2월에는 진보당이 등록 취소가 된다. 7월 2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 되었으나 10월 4일 항소심과 1959년 2월 27일 상고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어 61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Ⅳ. 리더쉽평가

  조봉암은 여운형, 박헌영, 김구 등과 함께 정권쟁탈전에서 실패한 공통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선거에 입후보까지 해 상당한 지지를 획득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극단을 추구하기보다 통합적 조직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운형, 김구 등도 중간적 성향을 가지긴 했으나 조봉암은 구체적인 정치지도체로서의 정당활동에 중심을 두었고 계속해서 조직을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3.1운동 이후 일본에서의 흑도회 결성을 비롯해 서울로 돌아온 후 청년우원회, 노농총연맹, 조선공산당 등의 조직에 항상 간여했고 해방이후에도 민전을 결성하는 등 자신의 현실적 조직력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개인성에 있어서도 주변으로부터 후한 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목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죽산은 불굴의 애국애족정신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신념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은 불퇴전의 기개로써 즉각 행동에 옳기고, 그칠 줄 모르는 실천에 의해 그 실현에 힘썼다........ 특히 진보적 정치운동에 참여한 정치가로서의 위대성이 있었다. 이것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죽산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은 두드러진 것이었으며, 그를 다른 정치가와 크게 구별할 특징을 이룬 귀중한 자질이었다.”


그리고 부통형 후보로 나섰던 박기출은 이렇게도 평가를 한다.


“...... 그 성격 가운데 씻을 수 없는 혁명가적인 기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혁명가다운 대범성을 청산 못하고 있었다.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적인 바탕에서 우왕좌왕하는 자들까지도 신념과 생명을 걸고 같이 싸우던 참된 맹우와 같이 취급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 말하자면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고 따라서 대인관계에 세밀한 관찰과 주의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정태영, 오유석, 권대복(1999) 『죽산 조봉암 전집』제1, 3, 4, 6권, 세명서관

정태영(2006), 『조봉암과 진보당』, 후마니타스

권태복(1985), 『진보당』, 지양사

이영석(1983), 『죽산 조봉암』, 원음출판사

서중석(1999),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박태균(1995), 『조봉암 연구』,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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